#017 - 2025년을 토론토에서 마무리하며

캐나다에서 열한 번째 연말

by Hiraeth

2015년 겨울부터 올해까지.

캐나다에서 보내는 열한 번째 연말이다.

정확히 말하면 10번째다.

2019년 연말은 한국에 방문했으니까.


이번 연말, 연초는 캘거리에 친구네서 머물 예정이다. 안 그래도 추운 겨울, 더 춥고 건조한 캘거리에서 열흘간 시간을 보내려고 한다.


나는 추위도 많이 타고, 겨울만 되면 이마가 나무껍질처럼 바삭거릴 정도로 피부도 건조하다. 이런 이유로 조금 망설였지만, 지금 아니면 쉽게 오지 않을 기회 같아서 비행기표를 끊었다.


캘거리 친구 부부와는 올해 유독 자주 만났다. 봄에는 그 친구들이 토론토를 방문했고, 여름엔 내가 캘거리에 가서 재택근무를 했다. 가을에는 함께 퀘벡시티에서 시간을 보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겨울에도 시간을 내서 올해는 사계절을 함께하기로 의미를 부여했다. 다녀와서는 캘거리 여행기를 써봐야겠다.


연말이 되면 아마존프라임이나 몇몇 OTT 사이트에서 무료 트라이얼을 할 기회가 주어진다. 덕분에 두 달 동안 하루 절반은 티비 앞에서, 절반은 침대 위에서 보냈다. 여느 때와 다르지 않게 최근 공개된 드라마들과 예능을 섭렵했다. 남는 시간은 오래된 드라마와 영화들을 보기 시작했다.


럭키넘버슬레븐

봄날은 간다

번지점프를 하다

연애의 온도

비트

그 겨울, 바람이 분다

연애시대

풀하우스

미안하다 사랑한다

안나 감독판

비밀은 없다

남자친구

미스터션샤인


비트와 안나를 제외하곤 모두 예전에 봤던 것들이다. ‘그들이 사는 세상’과 ‘상두야 학교 가자’는 보고 싶었지만, 없어서 못 봤다. (참고로 내가 본 최근 콘텐츠들은 제외한 게 이 정도다)


예전 드라마들은 다시 보면 참을 수 없이 촌스럽거나 오글거릴 때가 종종 있는데, 그래도 추억의 힘으로 보면 볼만하다. 예전 콘텐츠를 보면 시대도 많이 변하고 나도 많이 변했다는 게 실감이 난다.


지금 보면 너무 폭력적인 남자 주인공의 행동이나 대사가 예전엔 그렇게 인기를 끌었다. 좋아했던 장면이 더는 와닿지 않고, 생뚱맞은 장면이 내 마음을 흔들기도 한다.


드라마가 방영하던 그 시절 추억이 갑자기 떠오르기도 한다. ‘풀하우스’가 방영하던 시기는 2004년 내가 고등학교 때였다. 지금처럼 핸드폰으로 쉽게 드라마를 볼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수능을 앞둔 고3이 드라마를 보겠다고 그 시간에 집에 가는 건.. 우리집을 전쟁터로 만들겠다는 것과 같았다. 친구와 독서실 근처 슈퍼에 드라마 시간을 맞춰 갔다. 슈퍼 안에 주인아줌마가 쉴 수 있는 방이 있었는데, 컵라면을 시켜 먹으면서 아줌마가 보는 ‘풀하우스’를 몰래 훔쳐보았다. 어쩌면 함께 보았다가 맞을 수도 있다. 컵라면을 먹으면 단무지를 주셨는데, 그때 이후로 나는 라면과 단무지를 먹는 걸 좋아한다.


unnamed.jpg 나노바나나가 만든 가게 컵라면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드라마와 영화만 보고 있으면 순간순간 죄책감이 들 때가 있다. 그래서 하루 한 시간 정도는 실내 자전거를 타며 티비를 보았다.


한국에 살 때는 연말에 집에 들어올 새가 없이 모임들로 바빴었다. 일 년을 안 보던 친구들도 연말이나 연초엔 꼭 만났다. 캐나다에 와서도 1,2년은 그랬다.


지금은 40대라 그런지, 그때 너무 놀아서 그런 건지.. 연말은 그냥 조용히 혼자 집에서 보고 싶은 티비를 보며 맛있는 걸 먹는 게 좋다. 늘 하고 있는 일이지만, 매일 해도 좋다. 과거의 나는 연말에 큰 의미를 두고 무언가 하려고 했다면, 지금은 그냥 평범한 날들로 조용히 흘려보내고 있다. 아, 물론 더 달고, 맛있는 것들과 함께라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예전엔 친구와 같이 티비 보는 것도 좋아했는데, 요즘은 혼자 보는 게 더 좋다. 집중하기도 좋고, 무엇보다 편하다. 괜히 방해받지 않고 끝까지 즐길 수 있다.


알게 모르게 취향이나 성향이 바뀌어가고 있다. 20대에는 여행을 좋아했지만, 30대 대부분은 여행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번에 퀘벡시티를 다녀온 후, 다시 좋아하게 된 것 같은 느낌도 든다. 변덕이 심하다.


예전에 이효리가 방송에 나와서 무언가 단언하는 게 무섭다고 했다. 자신은 나이가 들고 환경이 바뀌면서 계속 변하는데, 예전에 했던 말들이 남아서 비난을 받을 때가 있다고. 나는 유명하지도, 누군가 내게 비난하지도 않았지만, 무슨 말인지 너무 이해가 간다.


몇 년 전 연말에 브런치에 쓴 글을 보니, 그때와 지금의 나는 딱히 달라진 것 같지 않다. 그때의 나를 공유하며 2025년도 마지막 브런치 글을 마친다. (https://brunch.co.kr/@hiraeth/4)


글을 읽는 모두가, 따뜻하고 무난한 연말이 되길 바래본다.


Screenshot 2025-12-24 at 6.51.58 PM.png



+ 메인사진은 필름 카메라로 찍었다.

+ 컵라면 사진은 나노바나나가 만들었다. 이미지와 내 기억은 확연히 다르지만 그냥 올려봄.

+ 마지막 사진은 챗지피티가 만든 나의 올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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