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평화 Feb 13. 2024

아름다운 황혼

 

 1. 첫눈은 약속을 만든다

 첫눈이다. 앙상한 겨울나무에 눈꽃이 피었다. 뒷산에 움직이는 무엇인가가 보였다. 창문을 열어보니 청설모가 땅에 숨겨 놓은 먹이를 두 볼에 불룩하게 넣고 나무를 타고 있었다. 사방이 하얗다 보니 청설모의 행방이 다 보였다. 

 눈 오는 날이면 설레어진다. 누군가 만나고 싶다. 어떤 사람이 생각났다. 언젠가 한 번은 우리끼리 조용히 만나 서로의 이야기를 풀어야 했었다. 서랍에 있는 남편 수첩에서 미스 노의 전화번호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여보세요? A 씨의 아내입니다. 오래된 일이라서 생각이 나시는지요?”

 “형님, 그동안 생각을 많이 했었는데, 목소리 여전히 힘차시네요.”

 미스 노가 나를 형님이라고 부르며 극진히 대하는 태도가 스마트폰 음질에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나는 자연히 아우님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아우님, 첫눈이 오니까 아우님과 따뜻한 차 한 잔 하고 싶어서요.”

 “차 한 잔 가지고는 안 되지요. 우리 어디서 하룻밤 지내요.”

 “그럴까요? 마침 남편은 겨울 바다낚시 가서 집에 없어요.”

 “낚시 좋아하는 것은 여전하시네요. 잘 되었어요. 그럼 지금부터 두 시간 후 집 앞으로 모시러 갈게요. 참 일주일 여행 옷을 챙겨 오세요.” 

 미스 노는 내가 말할 틈을 주지 않고 압력을 가했다.  

 “잠깐요, 일주일은 어려워요. 사흘 정도면 괜찮아요.” 

 나의 말은 자연히 사정하는 투가 되었다. 전화는 내가 먼저 했는데, 미스 노는 기다렸다는 듯 약속을 낚아채어 입맛대로 결정하고 나는 따라가는 입장이 되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30년도 넘는 일이었을 것이다. 남편은 오퍼상을 경영했고, 미스 노는 여의도 룸살롱 고급 술집에서 일했다. 남편은 외국 바이어가 오면 그 깔끔한 룸살롱에서 대접하고는 했다. 바이어가 자주 오자 남편은 미스 노와 수시로 만나게 되었다.  

 어느 날 아침식사 후 커피를 마시면서 남편은 나한테 조용히 고백할 것이 있다고 말했다. 군대생활도 안 했고 살면서 크게 어려움을 겪어보지 않던 남편이 긴장한 듯 말하는 폼이 어울리지는 않았으나 중요한 일인 것만은 분명했다. 

 “내가 바이어 대접하러 다닌다던 술집에서 미스 노라는 여자를 알게 되었어. 그녀에게 딸이 하나 있었어. 딸이 내년에 초등학교에 가야 되는데 주민등록이 안 되어 있다는 거야.”

 “그럼 지금 일곱 살? 우리 딸하고 같은 나이네.”

 “응, 철부지 고등학교 때, 남자친구를 만나서 사귀다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동거를 시작했나 봐. 아이가 생겼는데 각자의 부모들은 반대했지만 그냥 아이를 낳았다고 하네.”

 “아이고, 어떻게 키우려고?” 

 나는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미스 노의 부모는 미스 노를 없는 자식처럼 취급하고 거들떠보지도 안 했대.” 

 “세상에 별 이상한 부모가 다 있네. 미스 노의 남편은 어떤 사람이었는데?”

 “처음에는 사이가 좋았는데, 갈수록 남편은 의처증이 심해지더래. 의처증은 가정폭력으로 이어지고 딸이 보는데도 때리곤 했다네. 엄마가 아빠한테 맞는 모습을 본 다음에는 아이가 경기를 하더래.”

 “그 자식 나쁜 놈이네.”

 “얼마 후부터는 아빠가 큰 소리만 쳐도 딸은 경기를 하더래. 잠자면서도 꿍꿍 앓기도 하고.”

 “아!” 

 자격 없는 부모의 행동에 나의 가슴 밑바닥에서 거의 신음소리가 나왔다. 

 “여기저기 물어서 청소년 정신과라는 곳을 찾아갔대. 병원에서는 의사가 요즘 이런 아이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고 심각한 사회문제라고 하면서 그 환경을 벗어나야 한다고 했대. 아이가 받는 스트레스가 너무 심각해서 이대로는 낫기도 어렵고 점점 더 나빠질 가능성이 높다고 하더래. 집에 와서 남편한테 딸 데리고 병원에 갔다 왔다고 말하며 의사가 한 말을 좀 걸러서 말을 했는데도 쓸데없이 병원에 갔다고 때리더래. 딸을 위해서도 남편과 같이 살 수가 없어 무작정 집을 나왔대. 그리고 자기 사정을 잘 아는 언니한테 가서 고민을 털어놓았다고 하네.” 

 내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그러자 언니가 지금 있는 곳을 소개해 주었대. 미스 노가 집에 없을 때에는 그 언니가 딸을 잘 보살펴 주었나 봐.” 

 남편은 내 눈치를 조심조심 살피며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며칠 전 내가 감기기운이 있으니까 밤에 가까이 오지 말라고 한 적이 있었지? 그때 술 마시고 미스 노하고 처음 관계를 가졌어. 당신이 화 안 내고 이해하여 줄 것 같아 지금 목숨 내걸고 이야기하는 거야. 어제 두 번째 그리고 그녀로부터 딸 이야기를 들은 거야.”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남편도 도진개진 똑같은 수컷이네. 올 것이 왔어. 너무 빨리 왔네. 결혼한 직장 선배들이 말했었던 한 번씩은 온다는 홍역이 드디어 남편을 찾아왔네. 내가 성인군자도 아니고 한바탕 신랄하게 퍼부어야 하는데 입은 움직이지를 않았다. 감정이 복받쳐 올라 화를 당연히 내야 하는데, 이성은 나에게 속삭였다.

 “좋은 방법을 생각해 봐. 문제도 해결하고 그에게 용서받는 길은 분명히 있어.”  

매거진의 이전글 아름다운 황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