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희정 Oct 28. 2024

[행정실장의 관점 2]

상급자가 아니다

(상황)

가끔 인터폰을 받는다.

"품의서에 실장님이 결재하셨는데, 이런 이런 것이 잘 못된 거 같습니다."

"아, 네네, 확인하겠습니다"라고 하면서 사장에게서 걸려온 통화를 마친다.


이럴 때면, 기분이 다운된다.

여러 생각도 교차한다.

오늘 아침에는 인터폰을 내려놓고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담당자에게 전화한다.


"사장님이 품의서 오류에 대해 인터폰을 해오니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제가 품의서 내용을 일일이 확인할까요? 하나하나 따져 묻고, 잘잘못을 말씀드려야 하나요?"


상대는 귀찮다는 듯

"확인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며 통화를 마친다.



(협조 결재자)

행정실장은 예산 집행과 관련하여 품의 시에는 협조 결재자, 지출 원인행위는 중간 결재자이며,

지출에 대해서는 최종 결재자이다.


일반적으로 계약 행위와 동일한 의미인 지출원인행위는 최종 결재자가 사장이다.

사장은 당연히 협조 결재자인 나에게 물을 수 있다.


내 관점을 전제하면서,

'사업 부서가 있고, 담당자가 정해져 있는 조직으로서 사장이 지적질을 해야 한다면,

사업 부서 담당자에게 직접 하는 것이 옳다'라고 본다.


사장이 협조자에게 이런저런 지적을 하는 것,

그 행위가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나, 마음이 불편한 것도 사실이다.



(태도의 변화)

사람은 누구나 불편을 느끼면,

고민으로 이어지고, 나아가서는 업무나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려 한다.

나도 예외가 아니다.


우선, '예산 품의 시 참고사항'을 업무용 메신저를 통해 전 직원에게 전달했다.

최근 선 품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거나, 예산 집행 과목에 대한 오류가 자주 발생하고 있으므로

'예산 품의 시 참고사항'을 철저하게 준수하라는 내용이다.


둘째, 다음번 징검다리 회의 자료에서 '예산 품의 시 참고사항의 철저한 준수'를 제목으로 달았다.

부장들을 대상으로 한 번 더 강조할 예정이다.


셋째, 연말 전 직원 연찬회 시 별도의 교육이다.

개선 정도 등의 상황을 지켜보면서 최종적인 실행 여부를 결정할 생각이다.


(독대)

다음 날 아침, 사장님과 마주했다.

준비한 용건은 두 가지다.     

첫째는 공무직의 난임과 관련한 자료 보고다.

둘째는 예산 집행 시 행정실장의 업무인 협조 결재에 대한 고민이다.     


업무 연찬 차원에서 난임과 관련된 법령들을 세부적으로 정리했다.      

교무실무사는 교원들과 달리, 

왜 질병 휴직을 사용하는가에 대해 설명드렸다.     


이어서, “협조 결재와 관련하여, 어제 아침 인터폰으로 말씀하신 내용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라고 운을 띄웠다.


“어제 사장님의 인터폰을 받고, 상당히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전화를 끊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결대로자람부 담당자에게 전화해서 짜증을 냈습니다.  

   

그분에게 ‘품의하신 공문에서 예산과목을 다르게 지정하여 아침부터 사장에게 연락이 왔고, 

이로 인해 마음이 몹시 불편합니다. 

앞으로 공문 작성 시 신중을 기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라고 했습니다.     


전화를 놓자마자, 후회가 밀려들더군요. 

두어 시간이 지난 후, 

‘짜증내서 죄송합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교원과 저는 공무원 직렬이 달라서, 제가 사무관이라 해도 부하 직원이 아니며, 

협조하는 관계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선생님들께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되며, 

존중해야 할 대상이기 때문에, 이 학교에서 근무한 내내 불편한 관계를 가져본 적이 없었습니다.   

  

교육청에서 6급때만 10년 이상 근무하면서

협조자는 업무상 직접 관련된 부분에 대해서만 간략히 따져보고, 

가급적 결재하는 것으로 배우고 실천해 왔습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전화나 쪽지를 보내서 수정을 요청한 적도 있지만, 

그런 일도 손에 꼽을 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또, 협조 결재자는 문서수정 권한도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른 부서에서 협조 요청으로 올라오는 문서에 대해 이견을 달지 않고, 

그대로 결재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사장님이 문서를 기안한 담당자가 아닌 저에게 말씀하시니 상당히 불편합니다.”     


사장이 좀 당황하면서 말한다.

“제가 인터폰으로 말씀드린 것은 책망의 의미가 아닌데, 그렇게 들으셨다면 유감스럽습니다.

본래 의도는 회계 관계 문서라서 내용을 정확히 알고 싶어서 연락드린 것입니다.”     


덧붙여 내가 말했다.

“사장님이 저에게 말씀하시는 부분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며,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횟수가 쌓이다 보니, 

담당자에게 말을 할까? 말까? 

불편한 생각을 해오다가 

어제 처음으로 부서에 전화를 했습니다.”     


사장은 말을 매듭짓는다.

“예산 과목을 잘못 지정한 부분이라 담당자에게 전화할까 생각도 했습니다만, 

행정실장님이 정확히 알 것이기 때문에 연락한 것입니다. 

오해가 없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자기 주도)

학생 배치, 노무, 산업안전 등의 분야에서 20여 년간 근무했다.      

특히 전입학 알림이, 물품 관리전환 소요 조회, 통학구역 대장의 전산화 등 인터넷 시대에 필요한 맞춤형 업무를 순전히 자발적 의지로 선도했다. 

이런 이유로 사장의 지시나 지적에 의한 업무 처리를 선호하지 않는다.      

학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니, 

각기 다른 생각을 갖는 것도 당연하다. 

"내가 직원들의 잘못된 점을 찾아서 알려 주겠다. 

관리자의 능력은 오류에 대한 분별 가능한 식견이다."

이런 관점도 존중하며, 

공감하는 측면도 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내 관점과 크게 다른 면이 있어서 전적인 동의는 못 한다.

사실, 지적 내용이 죽고 살 정도로 중요한 사항도 아니다.

그저 일상적인 사소한 실수였다.     

담당자가 전자 문서 결재를 올리면서 

당해 사업이 아닌 다른 사업을 지정한 것이다.     

즉, 예산 집행 과목 오류다.

이런 사안은 뒤늦게라도 바로잡으면 된다.

실제 지난 7월에 완료된 사업인데, 

오류가 발견되어 수정하는 과정이다.

물론 문제의 근원은 담당자다.

담당자가 철저하게 업무를 처리하면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관리자는 이런 문제들을 자주 접한다.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근무하며, 그들 간 개인차가 있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사장은 나에게 인터폰으로 직원의 잘못을 지적했다.     

물론, 그 이유에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협조 결재를 했다'라는 책망도 담았을 것이다.

일리는 있다.

먼저 오류를 발견하고 수정하면 되는데,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변명하자면, 여러 이유를 댈 수 있다.

그러나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한 마디면 충분하다.

협조자, 나는 협조 결재를 할 뿐이다.

어쩌거나 마음이 불편하다.

그래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해본다.

첫째, 협조 결재자인 나는 예전과 같이 빠르게 업무를 처리하고, 사업 부서 입장을 옹호할 것이다.

행정실장이 협조 결재자로 올라오는 문서마다 

잘잘못을 따져 묻고, 

각종 오류를 살피기는 여러모로 부담스럽다.      

연간 예산이 25억원 이상이고,

사업 부서의 일들을 자세히 알기도 어렵거니와 

일일이 확인 후 결재를 하자면 시간도 훨씬 많이 소요된다. 

둘째, 사업 부서 선생님이나 직원들과 불편한 관계를 맺고 싶지 않다.

업무 수행 과정에서 잘잘못을 자주 지적하면, 

관계가 좋아질 수 없다.

매번 오류를 지적하지 않아도 

행정실의 처리 과정에서 대부분은 바로 잡힌다.

셋째, 특정인을 대상으로 오류 표명을 하지 않아도 되는 시스템을 갖고 있으며, 

이미 잘 활용하고 있다.

즉 '예산 품의 시 참고사항'을 파일로 작성해서 

오늘처럼 전달해야 할 사안이 발생하거나, 

학기초 등에 정기적으로 전파하고 있다.

전달내용을 숙지하면 예산 집행 부서와 담당자는 문제를 충분히 예방할 수 있다.

그만큼 정제된 내용이다.

내 관점을 정리하자면, 

지적질로 사무관의 권위를 세우고 싶지 않고,

누군가를 비난하면서 존재감을 높일 생각이 없다.     

내가 교육행정기관에서 지내온 것처럼, 

우리 학교 구성원들도 자발적 의지로 

맡은 바 업무를 처리해 주길 바랄 뿐이다.

작가의 이전글 [행정실장의 관점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