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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진 Nov 07. 2024

페리카나

차곡차곡 모아가던 것에 대하여


우리 가족이 가장 오래 살았던 아파트 입구 초입에는 작은 치킨집이 있었다. 우리가 이사를 오기 전부터 다른 곳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던 날까지 내내 같은 자리를 지키던 페리카나였다. 지금이야 치킨 브랜드가 우후죽순으로 늘어났다지만, 꼬맹이 시절 내게 치킨은 오직 페리카나뿐이었다. 항상 시키는 메뉴는 양념 반, 후라이드 반이었는데, 이유는 그저 다양하게 먹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양념을 한 마리 시키자니 달콤한 맛을 끝까지 먹지 못할 것 같고, 후라이드만을 먹자니 윤기가 반지르르 나고 진득한 달콤함을 외면하기는 어려웠다.

031-713-XXXX. 스마트폰과 배달 앱이 없는 시절에는 모든 것이 아날로그였다. 가끔 칭찬받을 일이라도 하면 엄마는 포상을 내려주듯 ‘이따 치킨 시켜 줄게’라고 말했는데, 그러면 나는 저녁까지 기다리다가 엄마의 신호가 떨어지면 곧바로 수화기를 들었다.

“아저씨, 여기 OO 아파트 1404호인데요, 반반 치킨 한 마리랑 콜라 큰 거 하나 갖다 주세요”


“양념 반 후라이드 반? 계산은 카드로 할래? 현금으로 할래?”


“(멀리 엄마에게 큰 소리로) 엄마! 계산 카드랑 현금 중에 어떤 거야?, 아저씨 현금이요!”


“현금? 오케이 알겠습니다~”

가까운 곳에 가게가 있기도 했고, 요즘과는 달리 치킨을 튀기자마자 주인아저씨가 직접 가져다주시는 구조였기에 초인종 소리는 금방 울렸다. 바쁜 손놀림으로 꺼낸 치킨 박스에는 늘 노란 고무줄과 종이 쿠폰이 한 장 끼워져 있었는데, 거기에는 쿠폰 10장을 모으면 후라이드 치킨 한 마리가 공짜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보통 한 번 주문할 때 한 마리씩 주문했으니 공짜 후라이드를 위해서는 최소 10번의 주문이 필요했다. 과연 공짜 치킨을 먹는 날이 있을까 아리송한 마음으로 부엌 찬장에 쿠폰을 모았는데, 쿠폰을 한 장 한 장 넣을 때마다 나와 페리카나 아저씨의 친밀도도 조금씩 쌓여갔다. 수화기 너머 들리는 목소리였지만, 늘 전화하는 쪽과 받는 쪽이 같았기 때문인지, 어느 날에는 내가 아파트 이름을 빼고 ‘1404호인데요’라고만 말하기도 했고, 또 어느 날에는 아저씨가 전화를 받자마자 ‘1404호죠?’라며 확신에 찬 물음을 했다. 지금도 낯선 이, 가까운 이를 가리지 않고 전화 통화에 어색함을 갖는 편이지만, 이상하게 치킨 주문만큼은 어렵지 않았다. 쿠폰을 모으듯 아저씨와 친밀함을 모았으니까.

어쩌다 쿠폰 10장을 모두 모은 날에는 마치 길을 걷다 행운을 주운 것 같았다. ‘몇 장이나 모았는지 세어볼까’ 가벼운 마음이 쿠폰을 하나씩 세며 커다란 기대로 부풀고, 기대가 확신이 되는 순간 언니와 나는 팔짝팔짝 뛰며 또다시 수화기를 잡았다. 쿠폰을 다 모았다는 건 동시에 가족들과 치킨을 먹은 날이 많았다는 의미였다. 우리 집은 ‘맛있는 음식은 가족과 함께’라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어서 그 옛날에는, 치킨도 가족이 모두 모일 수 있는 저녁에 시켜 먹었다. 치킨을 시키면 가족들의 취향을 알 수 있었다. 우선 아빠는 치킨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잘 먹지 않는 아빠를 보면 혹시나 맛있는 것을 우리에게 양보하는 것이 아닐지 심각하게 생각도 했는데, 조금 큰 뒤에 다시 생각해 보니 아빠는 그냥 치킨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었다. 엄마는 후라이드 치킨을 좋아했다. 특히 닭다리나 가슴살보다도 살이 야들야들한 날개나 목뼈를 좋아했는데, 이런 면에서 나는 엄마를 닮아 있었다. 엄마와 나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치킨의 튀김옷을 먼저 소금에 콕 찍어 먹고, 뽀얀 속살은 겨자소스를 곁들여 먹는 것을 좋아했다. 나와 다르게 언니는 양념치킨을 더 좋아했다. 은박지를 부욱 찢어 닭다리의 끝을 감싸고, 들고 먹다가 마지막에는 손가락에 묻은 소스까지 쏙쏙 빨아먹는 언니를 보면 양념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던 나도 입 안 가득 군침이 돌았다.

주인아저씨의 정겨운 뚜벅이 배달과 종이 쿠폰이 있던 페리카나 치킨은 새로운 신세대 치킨들이 등장하면서 기억에서 서서히 잊혀갔다. 치즈 가루가 듬뿍 뿌려진 치킨이나 마요네즈 소스가 버무려진 치킨의 맛은 강렬했지만 그만큼 쉽게 물렸다. 배달 음식은 종류가 다양해지면서 전화보다 앱을 통해 주문하게 되었고, 직접 배달 대신 배달비를 지불하는 대행 서비스가 등장했다. 달라진 건 또 있었다. 치킨은 더 이상 가족과 함께 먹는 음식이 아니었다. 이제는 마음만 먹으면 치킨은 혼자서도 시켜 먹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배달지 이곳저곳을 빙빙 돌다 반은 식은 채로 도착한 치킨 박스를 열 때면, 종이 쿠폰 없이 덩그러니 놓인 박스를 볼 때면, 혼자 먹다가 남은 것을 한 구석으로 치우게 되는 치킨을 볼 때면, 투박하더라도 정이 넘쳤던 페리카나 치킨이 생각난다. 치킨을 주문하는 목소리에서 ‘여전히 치킨을 먹으며 잘 지내고 있어요’라는 조용한 안부를 나눌 수 있었던, 꼭 한 자리에 모여 각자가 좋아하는 부위를 나눠 먹었던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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