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을 기념일처럼 살 수 있다면
10월의 마지막 날이었고 늦은 퇴근을 해야 하던 목요일, 퇴근을 하자마자 집에 들러 옷을 갈아입고 헬스장으로 향했다. 근래 들어 운동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려서 그대로 누워있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최근 배달 음식을 먹고 싶은 족족 먹어왔기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질질 끄는 걸음 도중 머리를 스치는 생각 하나. 오늘은 10월 31일이고 그러니까 할로윈 데이 파티를 준비하면 어떨까. 얼마 전 “곧 있으면 할로윈이네, 나도 코스튬 하고 싶다”하고 말하던 한서의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요즘 병원 실습을 하는 중이어서 밤 10시는 넘어야 집에 도착하겠지만 오히려 준비할 시간이 남아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운동하기 싫은 마음은 어느새 빨리 할로윈을 준비하겠다는 마음으로 바뀌어 느릿한 발걸음을 서두르게 했다.
애초에 열심일 의지도 없었을뿐더러 이제는 준비할 이벤트도 생겼겠다. 40분의 천국의 계단과 20분의 러닝으로 운동을 마무리 지은 뒤 다이소로 달려갔다. 이미 하루가 저물어가는 저녁에 할로윈 용품을 장바구니 가득 담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Jack-o-lantern 호박과 거미가 그려진 바구니, 화려한 장식에 하고 싶어 하던 코스튬까지 샀다. 틈틈이 간식도 준비했다. 종류가 다양할수록 풍성할 것 같아 그녀가 좋아하는 스콘과 마카롱을, trick or treat ceremony에 필요한 사탕과 초콜릿을 샀고, 파티 음식으로는 닭강정을 준비했다. 전날 친구와 닭강정 이야기를 나눴었는데, 마침 먹고 싶던 음식이기도 했고 색도 붉은색이니 할로윈 분위기에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집에 도착하니 오후 8시 30분, 남은 시간은 한 시간 반 남짓이다. 서둘러 씻고 곧장 벽 꾸미기에 돌입했다. 호박과 거미, 유령 모형이 대롱거리는 가랜드와 할로윈 그림이 그려진 커튼이 있었는데, 붙이기만 하면 되겠다는 쉬운 생각과 달리 과정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고정을 위한 마스킹 테이프는 자국이 남지 않는 대신 무게를 버티지 못했고, 일반 테이프를 사용하기에는 벽지가 훼손될 가능성이 컸다. 커튼은 기존 커튼이 자리하던 위치에 고정하니 테이블과 거리가 멀어져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이리저리 붙였다 뗐다 하며 겨우 공간을 구성하고, 테이블 위를 꾸미기 시작했다. 처음 구상한 그림에서는 허리 높이의, 너무 작지도 크지도 않은 적당한 크기의 사이드 테이블이 필요했는데, 조건에 맞는 테이블은 집에 없었다. 고민 끝에 갖고 있던 분리 수거함과 좌식 테이블의 상판을 합쳤다. 두 개의 색상이 모두 하얀색이라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았고, 위를 거미줄 모양의 테이블보로 덮으니, 원래부터 하나의 테이블인 것 같은 느낌까지 들었다. 참, 분리 수거함은 본래의 용도로 사용하던 것이 아니었고 작은 물건을 담는 수납공간으로 사용하던 것이었다.
어려운 문제가 해결되니 모든 일이 수월했다. 먼저 집에 있던 나무 장식과 검정 향초를 올렸다. 보랏빛의 거미 바구니에는 사탕과 초콜릿을 수북이 쌓고, 주황색 사탕 모양 그릇에는 스콘과 마카롱을 올린 뒤 금색 키세스 초콜릿을 사이사이 놓아 반짝거리는 느낌을 주었다. 다음에는 머리핀을 이용하여 유령이 둥둥 떠 있는 것처럼 만들었고, 소복하게 담은 닭강정에는 별과 구름 포크를, 컵에는 호박 귀신과 박쥐 모양 빨대를 꽂았다. 마지막으로 커다란 박쥐와 빨간 삼지창 풍선, 그리고 할로윈 캔들로 빈 곳을 채웠다. 미처 사용하지 못한 커튼은 침대 위에 펼치고 그 위에 요정 의상과 머리띠를 올렸다. 분주하게 움직이던 몸을 멈추자 방금까지 텅 비어 있던 침실 한쪽은 근사한 파티장으로 재탄생했는데, 음악까지 재생하니 더욱 그럴싸했다. 카메라에 채 담기지 않는 오싹하고 신비로운 분위기가 온 집안을 채웠다. 공교롭게도 준비가 끝나자마자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 HAPPY HALLOOWEEN ! ”
서프라이즈를 외치며 나가자 어리둥절한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 이내 가지런히 접혀 있던 의상으로 갈아입은 한서가 등장했다. 내 동생이지만 정말 예쁘고 귀여웠다. 요정 같다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말 그대로 요정까지 나타나자 비로소 완벽하다. 꼭 놀이동산 퍼레이드 속에 들어온 것 같았다. 동화 속에 머무르는 것 같던 아득한 감각은 아늑한 오렌지빛 조명 때문이었을까. 공간을 메우는 오싹한 음악 때문이었을까. 잔뜩 들뜬 마음 때문이었을까.
연신 감탄하는 한서를 배경 앞에 세워 사진을 찍고, 이대로 끝내기에는 아쉬워서 부모님께 영상통화도 걸었다. 처음에는 ‘이게 다 무어냐고, 대체 얼마를 쓴 거냐고’ 하던 엄마는 요정으로 변신한 한서를 보며 ‘참 예쁘긴 예쁘다고’ 미소 지었고, 그날 기분이 그리 좋지 않았다던 아빠는 시끌벅적한 우리를 보고 ‘기분이 좀 나아졌다’고 했다. 우리의 행복은 우리의 행복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파티를 마친 후에는 우리가 좋아하는 닭강정을 먹으면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기 말을 흘리듯이 듣지 않는 언니가 있어 좋다고, 큰 감동이었다고 그리고 자기는 아주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한서를 보며 새삼 오늘들인 시간과 노력을 되짚어보았다. 총 2시간 정도의 시간, 합쳐서 6만 원가량의 돈, 대략 300kcal 남짓 소모하는 체력이 바로 지금을 위해 필요했다. 놀이동산이 아니면 그리 큰 의미를 두지 않는 10월 31일, 일주일 중 가장 임팩트가 없는 목요일, 하루가 끝나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오후 10시 10분을 위해.
10월 31일 할로윈, 11월 11일 빼빼로 데이, 12월 25일 크리스마스, 이따금 찾아오는 기념일마다 주변에 나눌 것을 고민하며 금방 지나갈 잠깐을 위해 너무 많은 품을 들이는 것은 아닌지, 미끼인 것을 알면서도 매번 그물에 잡히는 물고기처럼 특정 소비를 촉진하는 자본주의의 함정에 미련하게 빠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실제로 나는 물고기자리였다. 믿거나 말거나. 문득 찾아보니 물고기자리의 특성은 다음과 같았다.
1. 꿈과 상상의 세계를 지배하는 것처럼 상상력이 풍부하고 자신만의 유토피아를 찾는다.
2. 이타적이고 세심하여 주변 사람의 작은 감정까지 인식한다.
3. 다른 사람들과 사랑을 나누고, 그들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영혼의 모든 부분을 바친다.
이건 물고기자리의 좋은 특성만을 적은 것이고, 반대로 현실감각을 잃기 쉽고 폭력적이거나 공격적인 상황에서는 마음을 잘 열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다고는 하지만. 어쨌거나 세상을 조금 더 행복하게 살고 싶은 낭만을 가진 별자리가 바로 물고기자리인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비록 시간과 돈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해도, 그렇게 해서라도 재미있는 추억과 기억에 오래 자리할 한때를 만들 수 있다면 모르는 척 그물에 잡혀도 괜찮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짧았던 밤이 지나고 며칠 뒤, 나란히 누워 SNS를 구경하던 중이었다. 그동안 한서가 올렸던 스토리를 보는데 나와 공유한 날이 참 많기도 많았다.
“언니 이날 기억나? 밤에 갑자기 눈 펑펑 내려서 같이 창문으로 구경하던 거”
“맞아, 구경하다가 호빵 생각난다고 새벽에 편의점 막 돌았는데. 결국 못 샀잖아”
“사진 보니까 또 호빵 먹고 싶네. 이번 겨울엔 꼭 미리 준비하자”
사진은 넘쳤고 시간은 오래 흘렀지만, 어떤 장면을 보아도 당시의 상황과 감정은 선명히 살아났다. 추위에 떨며 호빵을 찾다 결국 구하지 못하고 집에 돌아왔던 날에도 우리가 실망하지 않았던 것은 호빵보다 더 오래 남을 추억을 만들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함박눈이 펑펑 내리던 겨울날, 창문을 활짝 열고 하염없이 눈을 바라보던 시간. 새벽녘 편의점에 가기 위해 두꺼운 기모 옷과 털모자로 중무장하고 문을 나섰던 시간. 편의점을 세 곳이나 돌고도 구하지 못하고 돌아오던 길에 가로등에 비친 눈발을 올려보던 시간이 뜨끈한 호빵을 대신하고도 남았다.
오로지 한 사람을 위한 깜짝 파티를 준비하며 나는 꽤 많이 기뻤다. 진심으로.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 아니었고, 쓰지 않아도 되는 돈을 썼고, 애쓰지 않아도 될 힘이 들어갔지만, 환히 웃어주는 한 사람만 있다는 사실에 나는 기운이 났고, 기뻤고, 다가올 내일을 또 살게 할 힘을 얻었다. 없어도 그만이지만 있으면 더욱 좋은 것, 조금 더 즐거운 오늘을 보내기 위해 구태여 힘을 들이고 싶다. 행복할 내일을 기대하는, 상상의 바다를 헤엄치다 낭만의 그물에 속절없이 잡히는 물고기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