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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진 Sep 23. 2024

겨울은 지나가고 눈은 녹는다

추위를 견디는 이들에게


눈이 내리는 창 밖을 바라보며 행여 매서운 추위가 전해질까 보일러를 더욱 높였다. 따뜻하게 데워지는 바닥에 누워 천장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바라보고, 바라보고 있었는데 환하던 방 안은 어느덧 새까만 어둠이다. 2023.12.03

 

유독 잠이 오지 않던 밤, 여자는 뒤집어 놓았던 휴대폰을 들었다. 그날은 일요일로 넘어가던 토요일 새벽이었고, 토요일은 그나마 여자가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할 의지와 체력이 있는 요일이었기 때문에 미리 계획해놓았던 그날의 일들에 대해 곱씹으려던 것이었다.

하루를 시간 순서대로 나열하던 여자는 ‘오늘은 알람 소리도, 특별한 약속도 없이 일찍 잠에서 깬 기특한 날이다’라는 첫 문장을 썼고 그 뒤로 더 이상 글은 이어지지 않았다.

 

함박눈이 쌓이던 토요일. 유난히 일찍 잠에서 깬 여자는 커튼 뒤에 비치는, 눈 내리는 모습을 보고 ‘오늘은 좀 더 한기가 들겠구나’ 생각하며 실내 온도를 높였다. 그리곤 겨울에 하는 일들 중 자신이 좋아하는 뜨끈뜨끈한 방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잠시 멍을 때렸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건 멍한 생각이 아니라 최근 자신의 마음에 폭풍처럼 몰아치던 감정들에 대한 것이었다.

얼마 전 그녀는 바꾸고 싶었고, 바꿀 수 있다고 믿었고, 심지어 꽤 바뀌었다고 철석같이 생각했던 자신의 나약함이 실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극복하고 싶었던 마음의 크기가 반영되었기 때문일까. 한껏 부풀었던 기대감은 실망이라는 단어로는 담을 수 없는 거대한 절망으로 되돌아와 여자를 몇 날 며칠이나 괴롭혔는데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인물들 사이에서 누구에게 더 잘못이 있나 의미 없는 인과관계를 따지고, 그때 그러지 않았더라면 하는 후회를 하고, 과거를 계속해서 되새김하는 스스로를 한심해하느라 바닥에 누운 채로 토요일 하루를 보낸 것이다. 가끔은 이유 없는 분노와 눈물을 참지 못해 꺽꺽대며, 침대 밑으로 한없이 꺼지는 느낌에 잠에서 깨며, 어쩌면 이렇게는 영영 살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문득 자신이 하루 동안 뭘 먹었는지, 마셨는지, 심지어는 화장실을 가긴 했는지조차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에 깜짝 놀란 여자는 자신이 겪은 모든 감정들을 어딘가 써 내려갔다. 아무도 볼 수 없어서 철저히 안전한 공간이었다. 누구도 볼 수 없었기에 당연히 복잡한 심경을 누군가 알아주거나 위로하는 등의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처음으로 아무것도 없는 백지 위 그녀 자신을 드러낸 것이었다.

메모를 하는 것만으로 달라지는 일은 크게 없었다. 다만 꽁꽁 숨긴 글이라고 해도 새하얀 눈밭 위 쌓여가는 발걸음 마냥 빈 종이 위 빼곡히 채워지는 활자들을 보면 꼭 비밀의 누군가에게 속내를 털어놓는 기분이 들고, 그녀 자신조차 정확히 알지 못해 혼란스러웠던 마음을 단어 하나 하나로 정확히 짚어낼 수 있었을 뿐이었다. 정말 그뿐이었는데 요란하던 감정의 폭풍은 어느 순간 잦아들었고 그녀는 이제 간간히 흔들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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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겨울에는 유난히 눈이 자주 왔다. 도톰히 쌓이는 함박눈을 볼 때면 삐쭉 빼쭉 앙상한 나뭇가지가 눈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금방이라도 꺾일 것 같이 보였다. 그리고 그건 융통성이라고는 없어 휘어지기보다는 늘 부러지는 쪽인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위태롭던 나뭇가지는 한 번도 부러지지 않았고, 두껍게 쌓였던 눈은 늘 햇살이 비치면 흔적도 없이 녹았다.

 

겨울이 싫었던 나는 항상 여름만을 기다렸다. 여름이 끝나가는 이맘때쯤이면, 사랑하는 여름이 지고 있다는 것이 못내 아쉬웠고 다가올 가을과 겨울을 걱정하느라 남몰래 마음을 졸이기 바빴다. 그렇지만 날카로운 추위를 버텨야 하는 겨울이 다른 계절보다 더 길게 느껴진다고 해서 겨울이 끝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겨울이 지나면 포근한 봄이 왔고, 눈이 녹으면 꽃이 피었다. 그리고 나면 사랑해 마지않는 뜨거운 여름이 왔다. 우리의 삶도 그럴 것이다. 시리다고 해서 영영 시린 것이 아닌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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