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소가 된 우리 집 청각장애 녀석
인공와우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 데 최적화된 기기다. 다행히 이 와우 덕분에 수어를 쓸 수밖에 없었던 청각장애인이 단번에 의사소통 가능한 아이가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하지만 달팽이관에 심어진 전극 몇 개만으로 다양한 주파수와 음을 정확히 듣는 것은 구조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음악을 들을 때, 우리가 기대하는 만큼의 정확한 음을 듣거나 부르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건 어쩌면 부모로서의 욕심일지도 모른다. 사실 나조차도 인공와우가 우리 아이에게 어떤 소리로 세상을 들려주는지 직접 경험해 본 적이 없어서 그 소리가 항상 궁금하다. 성인 와우 착용자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그래서 우리 부모들에게 생생한 피드백이 된다. 그들은 말한다. "와우로 음악을 듣는 건 마치 청량한 오케스트라 음악을 헤비메탈로 바꿔놓은 것 같아요. 잘 들리던 라디오가 지하 주차장에 들어가면 치지직거리는 소리로 변하듯, 정확한 음을 듣는 건 마치 안갯속을 걷는 느낌이죠." 이런 이야기를 듣다 보니, 듣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 가능할지에 대해서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아이가 음악을 제대로 즐길 수 없다는 것보다 더 걱정되는 건, 언젠가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게 될 상황이었다. 인공와우를 착용한 채로 친구들 앞에서 가창시험을 본다는 건, 마치 체육 시간에 지체장애인에게 달리기를 평가하는 것과 같다는 말도 들었다. 초등 고학년이 되면 이 문제가 더 선명해진다. 고학년이 되었을 때, 아이가 장애 때문에 (음치라는 사실을 알고) 주눅 들지 않고 과감하게 노래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대부분의 난청 아이들은 가창시험을 다른 악기로 대체한다고들 한다. 노래하는 것이 오히려 스트레스가 되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부모로서 고민되는 부분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초등학교 3학년인 우리 집 청각장애 녀석은 자신이 심각한 음치라는 사실을 전혀 모른 채, 여전히 노래를 사랑하는 아이로 자랐다. 아이는 언제나 노래를 부르며, 가락을 따라간다기보다는 그저 자신의 마음속 리듬을 표현한다. 그 아이에게 노래는 그저 좋아하는 것이지, 음정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그러다 보니 우리 집엔 종종 고성방가가 울려 퍼진다. 그런데 아이의 이런 자신감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6 살 때 00 복지재단에서 운영하는 청각장애 아이들 합창단 '아이소리 앙상블'에 들어가 3년 동안 여러 무대에서 공연을 해봤기 때문이다. 이 합창단에 들어간 이후, 아이는 더 많은 노래를 배우게 되었고, 무대 경험 덕분에 음악을 즐기는 아이로 자라났다. 합창단에 들어간 첫해에는 아는 노래보다 모르는 노래가 많았지만, 그동안 다양한 노래를 접했고, 이젠 학교에서 새로운 동요를 배워오면 따라 부르기도 한다. 물론 음정은 엉망이지만, 그게 중요한가? 아이는 노래를 부를 때 누구보다 즐겁다.
합창단에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휘자님은 난청 부모님들에게 대뜸 이렇게 말씀하셨다. “난청 친구들은 악보를 못 봐요.” 그 말을 듣고 나는 순간 속으로 화가 났다. '엥? 우리 애는 악보 볼 줄 아는데?’ 내가 그렇게 생각했던 이유는 단순했다. 아이는 학교에서 음악 시간에 악보를 읽을 줄 알고, 집에서도 나와 악보를 따라가며 노래를 부르곤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서서히 이해하게 됐다. 지휘자님의 말은 아이가 악보를 ‘본다’는 것과 악보 대로 ‘정확히 소리 낼 수 있다’는 것은 다른 문제라는 뜻이었다. 악보 속의 음을 정확히 들은 적이 없는 와우 착용 난청 아이들이 그 음을 그대로 재현해 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한 번도 '정확한 도' 음을 들어 본 적이 없으니, 아이가 노래할 때 '도' 음을 부를 때마다 음이 달라진다. 어느 날은 '도' 음이 ‘미’로 나오고, 또 다른 날은 ‘파’로 나오거나, 운이 좋으면 그나마 ‘도’가 되는 식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노래는 어떨까? 노래는 음정과 리듬이 어우러져 만들어지는 것이니, 난청 아이들이 정확한 음을 내는 것은 더욱 힘든 일이다. 합창을 한다는 건 기본적으로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화음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하지만 난청 아이들에게 그런 화음을 기대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모두가 각기 다른 음을 부르고 있을 테니까. 그들이 한 목소리로 화음을 이루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그게 중요한가? 아이들은 합창을 사랑하고, 노래하는 순간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노래가 그들에게 완벽한 소리가 아니라, 마음을 표현하는 또 하나의 도구라면, 그들은 그걸로 충분히 멋진 합창을 만들어 냈다. 그 사이 합창 단원들은 노래에 자심감까지 탑재하게 되었다. 이 또한 부모들에게는 너무 아름다운 일이었다.
재작년, 아이소리 앙상블 단원들은 00 호텔에서 영상을 촬영한 적이 있었다. 아이들은 준비도 많이 했고, 훌륭한 영상팀에 유명한 연주자들까지 동원된 그야말로 대단한 공연이었다. 무대 위에서 난청 아이들이 자신 있게 노래를 불렀다. 그 무대를 감상하던 부모님들도 지나가시던 분들도 감동하는 그런 촬영이었다. 하지만 막상 공연이 끝나고, 나중에 유튜브에 올라온 영상을 본 나는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노래는 감동을 넘어서 차마 들어줄 수 없을 정도로 불협화음이 가득했다. 아이는 무대 위에서 열심히 노래하고 있었지만, 나는 1분도 채 듣지 못하고 영상을 꺼버렸다. 수많은 연습, 자다가도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열심히 준비한 그 노래가 부모인 나에게도 듣기에 어려웠다. 내 생각보다 많이 절망적이었다.
'이번엔 차라리 공연에서 빠질까?' 작년 11월 공연이 다가올 때도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 공연은 아이소리 앙상블의 마지막 공연이 될 예정이었다. 유종의 미를 거둬야 한다고 생각했고, 아이도 그 공연을 무척 기대하고 있었다. 이번엔 지휘자님께서 큰 포부를 밝혔다. 귀빈들을 모시겠다는 말과 함께, 앙상블은 다시 한번 공연 준비에 들어갔다. 우리 아이는 이번에도 공연을 기대하며 집에서 흥얼거렸다. 노래를 틀어놓고 한창 신이 난 모습에 나는 처음엔 한숨이 나왔다. 재작년의 그 끔찍한 음정들이 떠오르며, 이번에도 똑같은 실망을 하게 될 것 같은 불안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때, 문득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했다. '왜 나는 결과에 이렇게 연연할까?'
아이에게는 노래하는 그 자체가 기쁨이었다. 무대 위에서 즐거움을 느끼고, 친구들과 함께 목소리를 내며 자신감을 얻는 그 순간이 중요한데, 나는 그동안 결과만을 평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 아이가 노래를 좋아하는데, 그 노래 실력을 내가 평가하는 게 과연 맞는 일일까? 더 깊이 생각해 보니, 노래 실력이 부족한 건 아이의 한계가 아니라, 인공와우라는 기기의 한계였다. 아이가 듣는 소리는 우리가 듣는 것과는 다르다. 노래를 정확히 따라 부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기기의 한계를 두고 나는 아이의 한계로 여겼던 것이다. 장애의 한계를 두지 말자고 늘 다짐하면서도, 나는 여전히 내 안에서 '장애인이 그렇지 뭐'라며 그 한계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아이의 가능성을 나 스스로 제한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나는 점차 마음이 편안해졌다. 공연에 대한 나의 시각도 바뀌었다. 노래가 좋지 않아도, 음정이 틀려도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아이가 그 무대를 진심으로 즐기고 있다는 것. 그 무대에서 아이는 이미 자신의 한계를 넘어 자신감을 발휘하고 있었다.
작년 공연에서의 노래도 여전히 들어주기 쉬운 수준은 아니었다. 귀빈들을 모시기엔 솔직히 민망한 실력이었지만, 나는 더 이상 노래 실력에 연연하지 않기로 했다. 아이가 노래를 사랑하고, 그 순간을 진심으로 즐긴다는 사실이 내게는 가장 큰 기쁨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이가 언제고 노래를 즐길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다고 생각했다. "엄마, 이 노래 알아? 나 학교에서 배웠는데 들어봐!" 아이는 자주 노래를 들려주었고, 그럴 때마다 나는 흐뭇하게 바라봤다. 여전히 친구들 앞에서 부르는 ‘가창시험’은 아주 먼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최소한 고학년 때쯤이나 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곧 깨지고 말았다. 올해 1학기에 드디어 ‘가창시험’이라는 큰 미션이 떨어진 것이다. '으악! 가창시험은 초 5학년 때나 보는 거 아니었나?' 싶었다. 초등 3학년, 그것도 1학기에 벌써 "어머님의 은혜"를 부르라고? 나는 가창시험이 생각보다 훨씬 일찍 찾아왔다는 사실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 노래는 음정이 높고 어렵기로 유명한데, 우리 아이가 그걸 과연 부를 수 있을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는 동안, 아이는 태연하게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어느 날부터 집에 와서는 무심하게 "어머님의 은혜"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음정이 갈수록 어디로 튀는지 알 수 없었다. '이게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거지…?' 속으로는 '큰일 났다' 싶었지만,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염소 같은 목소리로 고음이탈을 할 때마다 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아이는 여전히 자신만만했다.
"00아, 친구들 앞에서 노래 부를 수 있겠어?" 나는 나름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사실 속으로는 ‘이걸 어떻게 시험을 치르지?’ 하는 생각이 컸다. 그런데 아이는 내가 무슨 쓸데없는 질문을 하냐는 듯이, 오히려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엄마, 나 연습해야 돼." 그리고는 태연하게 아이패드를 켜고 노래를 찾아 연습을 시작했다. 노래 가사는 금방 외웠다. 그 점은 기특했다. 그런데 음정은 여전히 엉망이었다. 고음으로 갈수록 목소리가 꺾이고, 점점 더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속으로 살짝 속상했다. 아무리 연습해도 그 음은 어차피 맞지 않을 테니까. 아이는 그걸 모르고 있었지만, 나로서는 평생 와우 덕분에 아이가 음치를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괜스레 안쓰러웠다. 그런데 그 순간, 아이가 부르는 고음이탈을 듣고 나는 참을 수 없었다. "엄마, 왜 염소 목소리가 나지?" 아이가 진지하게 묻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배꼽이 빠질 만큼 웃음이 터졌다. "00아, 너만 그러는 게 아니야. 친구들도 다 고음은 어려워." 나는 그렇게 말하며 같이 웃었다. 우리는 그날 배를 움켜쥐고 한참 동안 웃어댔다. 염소처럼 떨리는 고음이 나오는 순간순간마다 더 크게 웃었고, 우리 집은 순식간에 웃음바다가 되었다. 사실 노래가 어긋나고 엉망이 된 게 슬픈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순간만큼은 아이도 나도 정말 즐거웠다. 아이는 자신이 음치인지도 모르고, 나는 그게 꼭 나쁜 건 아니라고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그날의 가창시험 걱정은 잊은 채, 소소한 음정 실수 하나로 배꼽이 빠질 정도로 웃었던 것이다. (가창시험 연습 영상: https://www.instagram.com/reel/C6xthrvJkVS/?igsh=dmJlemJvaGFjb293)
아이는 가창시험을 아주 거뜬하게 마치고 돌아왔다. "엄마, 가사를 하나도 안 까먹고, 나 좀 잘 부른 것 같아!"라며 자신만만하게 말하는데, 도대체 그 자신감의 기준은 어디서 나오는 건지... 불가능할 것 같았던 가창시험에서 악기 연주로 대체할 여러 시나리오까지 머릿속에 그려놨던 내가, 아이의 그 당당함 앞에서 약간 무력해졌다. "그래? 잘했어!"라고 웃으며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너 대체 그 담대함은 어디서 배운 거니? 그거 엄마한테도 좀 나눠줘라' 싶었다. 정말 부러울 정도로 당당한 아이를 보며 가끔은 생각한다. 그 자신감, 혹시 귀 대신 받은 출생 선물 같은 거였니? 나는 가끔 신경을 곤두세워가며 수십 번도 넘게 고민하는 일들을, 이 녀석은 척척 해낸다. 그리고 노래까지 즐긴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그렇게 아이는 자신만의 템포로, 즐거움으로 가득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더 이상 결과에 집착하지 않게 되었다. 음정이 좀 틀리면 어때? 염소 목소리가 나면 또 어때? 중요한 건, 아이가 노래를 부르며 정말로 즐거워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노래를 사랑하게 된 아이를 보면서 나 역시도 그 즐거움에 동참하게 되었다.
"엄마, 다음에 또 염소 목소리로 가창시험 보면 돼. 뭐 어때?"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웃음이 나와서 도저히 걱정할 틈이 없다. 아이와 함께 배꼽 잡고 웃는 시간이 늘어가니, 이제는 내 머릿속에서 '음이탈' 걱정은 꽤나 멀어진 느낌이다. 어쩌면 인생도 그렇게 한 곡조씩 즐기면서 살아가면 되는 게 아닐까 싶다. 오늘도 난청 녀석은 이 집의 최강 음치 가수로 열심히 노래를 부르며 살아간다. 삑사리 난 고음? 그게 뭐 대수인가. 오히려 고음에서 삑사리 내는 게 아이만의 시그니처가 되어 버렸다. 염소 소리 같은 고음이 나오면,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본다. "엄마, 나 또 염소 됐어!" 그럼 우리는 배를 잡고 함께 뒹군다. 결국 중요한 건 음정 따위가 아니라, 가족 모두가 아이의 노래를 듣고 함께 배꼽 빠지게 웃는 순간이다. 시험이든, 삑사리든, 그 모든 게 그냥 덤일 뿐. 노래 그까짓 것! 아이는 내일도 힘차게 "엄마, 또 염소야!"를 외치며 노래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