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장애인 형제, 자매의 비애
첫째를 낳고 나서 둘째를 고민하기 시작할 때, 나는 이미 내 마음이 가득 찼다고 느꼈다. 그래서 둘째를 먼저 낳은 친구들을 만나면 꼭 물어봤다. "첫째가 이렇게 사랑스러운데, 둘째를 위한 마음의 공간이 있긴 해?" 정말 궁금했다. 첫째가 내 마음의 120%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둘째가 태어나도 첫째만큼 사랑할 수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우리 집에서도 첫째는 할머니, 할아버지, 엄마, 아빠, 이모까지 모두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둘째가 어떻게 더 사랑스러울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첫째에게 주었던 사랑을 둘째와 나눌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둘째가 태어났다. 둘째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잘 자고, 잘 먹었다. 첫째와는 180도 다른 순둥이가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상하게도, 내 마음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둘째와 첫째를 비교하기 시작했고, 첫째가 점점 얄미워지는 것을 느꼈다. 둘째의 장애로 인해 나는 온 신경을 그 아이에게 쏟고 있었고, 그럴수록 첫째에게는 더 많은 기대를 걸었다. 첫째가 조금이라도 부족하거나 완벽하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짜증이 나고 실망스러웠다. 그러면서 머릿속을 맴도는 생각은 늘 하나였다. '넌 몸도 멀쩡한데, 왜 더 잘하지 못할까?'
첫째는 겨우 6살, 7살이었다. 그 어린 나이에 나는 첫째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했다. 영어를 배우게 하고, 외우게 하고, 조금이라도 틀리면 바로 혼냈다.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첫째는 나에게 피아노를 배우며 너무 많이 혼나서 이제는 피아노를 쳐다보지도 않는다. 나는 첫째에게 여유를 주지 않았고, 사랑을 조건으로 바꿔 놓았다. 첫째가 완벽해야만 사랑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심어준 것이다. 참 잔인한 엄마였다.
내가 첫째에게 완벽함을 강요할수록, 첫째는 둘째를 점점 더 미워하게 되었다. 엄마의 사랑을 다 빼앗아간, 보기 싫은 동생. 하지만 나는 오히려 첫째가 이해되지 않았다. '어떻게 아픈 동생을 이해해주지 못할까?'라는 생각을 하며, 징징대는 첫째를 무심하게 바라봤다. 첫째는 나에게 자꾸 안아 달라고 했지만, 나는 외면하고 피했다. 그때의 나는 내가 얼마나 냉정하고 무심한 엄마였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엄마, 나도 여기 있어." 인기척을 내는데도, 나는 그 시그널을 느끼지 못했던 시절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는 남편의 한마디에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졌다. "너 그거 기억나지? 00이 6살 때 와우 찾으러 갔던 거." 남편이 말한 그 사건은 내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첫째의 마음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
둘째가 갓난아기였을 때, 매일매일 와우가 없어질까 봐 심장이 덜컹거렸다. 지금이야 와우 배터리도 갈고, 소리가 안 들리면 바로 이야기를 해주지만, 그때 우리 가족은 언제나 와우가 귀에 제대로 붙어있는지 확인하느라 바빴다. 그도 그럴 것이 와우는 한쪽에만 1000만 원씩 하는 고가의 기기였다. 잃어버리면, 그건 정말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나는 '와우가 귀에 잘 붙어 있나?' 하며 둘째 귀에 와우를 몇 번이나 확인했다. 나는 종종 '입이 두 개고, 차라리 귀가 하나였으면...'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첫째가 6살, 둘째가 2살이었을 때의 일이었다. 어느 날, 딸아이를 유치원에서 픽업하고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타는데, 둘째의 와우가 보이지 않았다.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와우가 없어졌어! 어떻게..." 당황한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때 첫째가 우리 걸어왔던 길을 되짚으며 뛰어가 와우를 찾기 시작했다. 내 시야에서 사라질 만큼 멀리 갔던 딸아이는 한참 후 헐레벌떡 돌아와서는 "엄마, 와우 찾았어!" 하며 와우를 내밀었다. 그 순간 가슴을 쓸어내리며 얼마나 안도했는지 모른다. 나는 첫째를 꼭 안으며 말했다. "00아, 네 덕분에 찾았어. 정말 고마워."
지금 돌이켜보면, 딸아이는 그때 겨우 6살짜리 아이였다. 그런데도 동생의 와우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고 있었다니. 무심한 듯 보였지만, 속으로는 얼마나 걱정하고 있었을까. 그 장면을 떠올리면 지금도 눈물이 난다. 장애를 가진 동생을 둔 첫째로서 감내했던 보이지 않는 희생, 그 속에서 자라던 첫째의 마음을 왜 그때는 몰랐을까?
둘째와 언어치료를 할 때, 나는 오직 둘째와의 눈 맞춤과 소리에만 집중했다. 그 순간에도 뒤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을 딸아이의 마음은 보지 못했다. 지금 와서 그때를 떠올리면, 나는 자꾸 그 뒷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장애를 가진 형제자매들은 그렇게 보이지 않는 희생을 하며 자란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들은 자연스레 장애에 대해 반 전문가가 되어간다.
내 딸도 그랬다. "엄마, 와우 깜빡거려. 배터리 갈아줘.", "엄마, 00이 와우 빼서 지금 안 들려." 딸아이는 동생의 상태를 살피며 늘 나에게 정보를 주고, 때로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누나표 언어치료'도 해주곤 했다. 그때는 그저 어린 딸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 아이의 보이지 않는 헌신과 사랑이 우리 가족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 일이 문득 떠오를 때마다, 머릿속에는 영화처럼 장면들이 스쳐 지나간다. 몇 년 동안 나를 향해 와락 안기던 첫째, 그리고 동생이 태어난 후로는 온전히 동생에게만 집중하며 언어치료에 매달리던 내 뒷모습. 그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던 딸아이의 모습이 뚜렷이 떠오른다. 여리디 여린 6살짜리 아이에게는 엄마의 외면과 그 갑작스러운 변화가 마치 남편이 다른 여자를 데리고 집에 들어오는 것처럼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 깨달음이 나를 덮친 건 딸아이가 초등학교 3~4학년이 되던 무렵이었다. 그때부터 아이는 나와 말도 하지 않으려 했고, 친구들과도 점점 날카로운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그 모든 원인이 나에게 있었다는 것을.
딸아이의 슬픔을 깨달은 그날, 나는 아이와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사과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어느 날 밤, 아이와 나란히 누워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사실 그동안 둘째의 청각장애 진단을 받았을 때의 충격을 첫째에게 세세하게 설명해 준 적이 없었다. 왜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지, 나 자신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 같다.
“00가 태어나고 4일 후, 퇴원하던 날이었어. 신생아실 간호사 선생님께서 ‘어머니, 아이가 청각 반응이 없어요. 큰 병원에 가보세요’라고 하셨어. 솔직히 그때는 그게 무슨 뜻인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어. 대학병원에 갔는데, ‘비행기가 지나가도 들리지 않을 겁니다’라는 말을 들었고, 그때 청각장애 진단을 받았지.”
아이의 눈빛이 나를 향했다. "엄마, 그때 어떤 생각이 들었어? 많이 슬펐어?"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그 감정은 단순히 슬프다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니었어. 그건 마치, 교통사고로 다리를 잃고 처음으로 절단된 다리를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어. 말로는 설명이 안 되는 감정이었지." 아이의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잠시 후, 딸은 "엄마, 사실 가끔 나도 그런 생각을 했어. 만약 내가 장애인이었으면 엄마가 나를 더 애틋하게 안아주었을까? 그런 상상을 하곤 했거든." 그 말을 듣고, 우리는 함께 펑펑 울었다. 그 대화는 우리 관계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그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나는 첫째에게 정식으로 사과했다. "00아, 엄마가 동생 언어치료 하느라 너를 한동안 제대로 보지 못한 것 같아. 엄마는 그때 제정신이 아니었어. 너까지는 챙기지 못했어. 정말 미안해." 내 진심을 담아 사과하자, 훌쩍 큰 아이는 그 사과를 조용히 받아주었다. 그때부터 아이의 마음의 상처가 서서히 회복되기 시작했다. 방 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던 아이는 나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고, 고민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건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으로 꺼냈다는 것이다. 친구 문제는 절대 말하지 않던 아이가 그 이야기를 한다는 건, 마음의 문이 다시 조금씩 열리고 있다는 신호였다. 그게 얼마나 감사하고, 동시에 미안한지.
장애아이를 돌보느라 우리는 비장애 형제, 자매를 놓치기 쉽다. 그 아이들은 온전한 몸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우선순위에서 밀리곤 한다. 언어치료에 더 신경을 써야 하는 동생이 급해 보이니까. 마음속으로 ‘너는 아픈데 없잖아. 넌 다 말짱하잖아.’라는 생각이 스며든다. 그렇게 비장애 형제자매들은 외로움을 겪는다. 전에는 온 가족이 자신을 바라봐 주었지만, 어느 날부터 모든 관심이 동생에게로 향한다. 아이는 달라진 게 하나도 없는데, 주위 사람들은 모두 등을 돌린 것처럼 느껴진다. 그 좌절과 실망감을 안고 아이가 마음의 문을 닫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지 모른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나는 첫째에게 등을 돌리지 않았을 것이다. 둘째의 재활과 치료에 첫째도 자연스럽게 동참시켰을 것이고, 첫째를 배제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아이에게도 충분한 시간을 주고, 완벽함을 강요하지 않으려 노력했을 것이다. 이런 후회가 남지만, 지금 이 순간 내 앞에서 웃어주는 첫째를 보면, 그저 감사할 뿐이다.
우리는 장애아만큼이나 비장애 형제의 마음도 돌봐야 한다. “엄마, 나도 여기 있어.”의 인기척을 놓치지 말자. 내 등 뒤에서 울고 있는 그 아이, 그래서 더더욱 혼자가 되어가는 그 아이를. 몸이 멀쩡하다는 이유로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는 그 아이의 마음을 우리는 들여다봐야 한다. 어쩌면 겉으로 보이는 신체적 장애보다 그 아이들의 마음이 더 크게 상처 입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마음을 함께 품어주고, 단둘이 시간을 보내주고, 절대 내 뒷모습만을 보지 않게 해야 한다. 장애의 치료보다 그 아이들의 마음이 회복되는 시간이 더 오래 걸릴지도 모른다. 그러니 장애아, 비장애아 할 것 없이 우리는 자녀 모두를 품어야 한다. 아픈 아이나 안 아픈 아이나 아이들에게 엄마는 언제나 가장 먼저 찾아갈 따뜻한 집이 되어야 하니까.
추석 전날에는 일찌감치 전을 다 부쳐놓고, 남편, 나, 첫째, 둘째가 5시쯤 명동에서 청계천을 지나 광화문까지 다녀왔다. 길을 걸으며 첫째와 서로 좋아하는 음악을 공유했다. "엄마, 그때 이 노래 들려줬던 거 기억나지? 이 부분 들어봐." 딸아이의 패이보릿 가수 빅나티 노래를 들으며, "가사가 정말 예술이구나." 우리는 감탄하며 함께 음악에 빠져들었다. 마지막으로 맥주집에 들어갔는데 "엄마, 더 먹을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들어가네?"라고 말하는 게 아니겠는가?! 그 순간, 내 옆에 있는 아이가 더 이상 14살 중학생이 아니라, 마치 나와 동갑내기 친구처럼 느껴졌다. '언제 이렇게 컸지?' 몇 시간을 걸으면서도 투덜대지 않는 모습에 문득, 정말 다 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에는 친구 문제로 고민을 털어놓고, 어떻게 해결할지 나와 함께 의논하기도 했다. 몇 년 만인가?! 이렇게 되기까지.. 그 몇 년 동안 엄마의 부재로 엄마가 그립기도 하고 또 상처받았을 텐데, 이해해 주고 극복해 줘서 정말 고맙다. 그 긴 시간 동안 나는 아이를 놓치고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아이는 나를 떠나지 않고 곁에서 묵묵히 자라준 것이다. 나와 아이는 그 상처를 서로 조금씩 아물려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