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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고북스 Oct 16. 2024

에필로그

기승전 감사!

며칠 전, 늦은 저녁 밤 10:30쯤 아이의 클라리넷 연습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 전날 제주도 여행에서 돌아와 하루종일 졸음과 싸웠다. 보통은 내가 클라리넷 연습실에 6시쯤 데려다주고 남편이 10시 넘어 픽업을 하는데, 그날은 남편이 외부 회의가 있어 내가 기다리다 데리고 왔다. 기다리면서도 조금씩 졸기도 했는데, 집에 거의 다 와서 그만 내가 졸았는지도 모르게 차사고가 났다. 나는 잠깐 정신을 놓고 말았다.


순식간에 들려온 굉음, 그리고 에어백이 터지며 온몸이 쏠리는 충격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가슴을 짓누르는 에어백을 밀쳐내며 숨을 가다듬었고, 차 안은 숨이 막힐 정도로 고요했다. 가장 먼저 뒤를 돌아 아이를 확인했다. 뒷좌석에 앉아 있던 아이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지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그제야 가슴속 깊이 안도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차에서 내리자마자 나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할 말을 잃었다. 내가 부딪힌 차는 다름 아닌 2억이 넘는 포르셰였다. 그 은빛의 고급스러운 차체가 내 눈앞에서 처참하게 부서져 있었다. 포르셰의 왼쪽 뒷부분은 마치 종잇장처럼 구겨져 있었고, 내 차 역시 오른쪽 측면이 심하게 찌그러져 있었다. 주차된 차를 받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잠시나마 차 안에 사람이 없었다는 안도감이 찾아왔지만, ‘왜 하필 포르셰일까’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며 어이가 없었다.


차 안에서 아이가 울먹이며 내뱉은 말에 정신을 차렸다. "엄마, 와우 한쪽이 없어졌어." 아이의 인공와우 한쪽이 사라진 것이다. 당황한 마음에 우리는 황급히 차문을 열고 사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밤이라 눈도 침침하고 차 안이 엉망이라 쉽지 않았지만, 겨우 와우를 찾아냈다. 그 와중에 아이는 "엄마, 괜찮아?"라며 나를 위로해주고 있었다. 놀란 마음을 다독이며 아이를 안아주고, 나는 그 순간 오히려 아이의 위로에 눈물이 나올 뻔했다.


차는 만신창이가 다 되었고, 포르셰는 비싼 수리비를 예고하는 듯 부서져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 떠오른 감사함은 커다란 위로가 되었다. 사람이 다치지 않은 것에 감사했고, 내 아이가 무사한 것에 감사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날 포르셰 안에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 정말 큰 축복이었다. 만약 그 안에 누군가가 타고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심각한 부상을 입었거나, 상상도 하기 싫은 더 큰 비극이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그 순간에도 머릿속은 온갖 ‘만약’으로 가득 찼다. ‘만약 내가 이 사고를 고속도로에서 냈다면? 속도를 내고 있는 상황에서였더라면?’ 고개를 저었다. 그때는 아이도 나도 이렇게 무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만약 아이가 안전벨트를 매지 않았다면?’ 그 생각에 식은땀이 흘렀다. 안전벨트 덕분에 아이가 뒷좌석에서 단단히 고정된 것이었고, 나는 또 한 번 감사함이 밀려왔다. 머릿속에 이런 생각들이 계속해서 스쳐 지나갔다. '하나님, 정말 감사합니다. 아멘.' 속으로 몇 번이고 기도하듯 외쳤다. 큰 사고 앞에서 내 마음에는 기승전 ‘감사’밖에 남지 않았다.


에어백이 터져 얼굴을 지켜준 것만 해도 기적 같았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에어백 주변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한동안 수리를 못하고 있었는데, 한 달 전에서야 간신히 수리했었다. 만약 그 에어백이 작동하지 않았다면? 그땐 내가 지금 얼굴에 심각한 부상을 입고 누워 있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에어백이 없었다면 내 얼굴이 그 차에 부딪히는 충격을 고스란히 받았을 것이다.


보험사 직원이 와서 차량 상태를 확인한 후, 포르셰는 물론이고 내 차도 수리비가 너무 많이 나와 폐차를 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분명히 이 사고로 보험료가 치솟을 것이고, 수리비도 엄청날 게 분명했다. '앞으로 감당할 일이 많겠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현실적인 걱정들 뒤에는 ‘몸이 다치지 않았다’는 사실이 나를 버티게 해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모든 게 감사했다. 차는 망가졌지만, 아이도 나도 무사하다는 것. 이것만으로 충분히 감사할 일이라는 생각이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결국, 포르셰든 내 차든 다 망가졌지만, 모든 것을 기승전 ‘감사’로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내 아이의 장애를 알게 되었을 때,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생각은 오직 하나였다. “왜 하필 내 아이일까?” 이 질문은 끝없이 이어졌고, 그 당시엔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온통 혼란과 불안 속에서 날이 지나갔다. 아이가 수술을 받은 후에도, 눈에 띄는 결과는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그 수많은 밤들... 아이가 앞으로 어떤 소리를 듣고, 어떤 세상과 만날지 알 수 없었던 그 불안한 밤들을 생각해 보면, 이제는 그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 버렸는지 믿기조차 어려울 때가 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깜깜했던 시간들을 우리 가족이 어떻게 버텨냈을까 싶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을 우리 가족만의 힘으로 이겨낸 것은 결코 아니었다. 주변의 수많은 고마운 사람들이 우리 곁에 있었다.


먼저, 잔존청력을 보존하기 위해 한쪽만 수술을 권해주셨던 교수님이 떠오른다. 그때는 교수님의 판단이 맞는지 긴가민가했지만, 돌아보면 그 조언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그리고 적절한 시기에 다른 한쪽 수술을 맡아주신 대학병원 교수님, 그 결정은 우리에게 또 한 번의 희망을 안겨주었다.


수술 후, 언어 치료를 시작할 때 만났던 첫 언어치료 선생님도 잊을 수 없다. 낯선 환경에서 손을 잡아준 그분 덕분에, 아이는 소리를 하나씩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학령기에 만난 또 다른 언어치료 선생님은 아이의 발달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발음이 잘되지 않아 벽에 부딪혔을 때, 우연히 만나게 된 조음 선생님 역시 마찬가지다. 그때는 정말 눈앞이 깜깜했지만, 선생님과의 만남이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아이의 마음을 다독여준 상담 선생님. 아이에게 장애에 대해 올바르게 알려주라는 그 선생님의 말씀은, 우리 가족에게 큰 전환점이 되었다. 아이가 자신의 장애를 받아들이는 시간이 힘들어 보일 때, 그분의 조언이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른다.


무엇보다, 같은 난청 아이를 키우며 함께 걸어온 부모님들, 그들의 존재는 나에게 버팀목이자 동지였다. 서로 의지하고, 조언을 나누며 그 모든 과정을 견뎌왔다. 외로움에 지치던 순간마다 그분들과의 만남이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또 아이의 친구들, 그리고 그 친구들의 부모님들 역시 고맙기 그지없다. 특히, 편견 없이 둘째를 대해준 친구들의 부모님들은 우리 가족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주변에서 둘째를 따뜻한 시선으로 대해주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커다란 용기와 안심이 되었다.


이렇게 나를 지탱해 준 소중한 인연들 덕분에, 나는 이 모든 과정을 견딜 수 있었다. 외롭고 힘들 때마다 적절한 순간에 만난 이 고마운 사람들 덕분에, 우리 가족은 그 깜깜한 터널을 지나올 수 있었다.


돌이켜보니, 이제 나도 누군가에게 고마운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가족이 받은 사랑과 도움을 나 역시 돌려주고 싶다는 마음이 차오른다. 결국, 교통사고도, 내 아이의 장애도, 그 모든 고비 끝에 남는 것은 ‘감사’뿐이다. 삶의 많은 순간들이 불확실하고 두렵지만, 그 과정에서 만난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했기에 이 모든 여정이 가능했음을 깨닫는다.


장애를 가진 아이를 둔 부모가 등장하는 TV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그때 화면 속 부모는 웃으며 말했다. "장애는 우리 가족에게 축복입니다." 그 말이 나에게는 너무나 위선적으로 느껴졌다. "어떻게 아픈 아이가 가족에게 축복일 수 있을까? 말도 안 돼." 당시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들이 아이에게 "00야, 다음 생에도 엄마 아들(딸)로 태어나줘. 너를 만나서 엄마는 정말 감사해."라고 말하는 장면은 더욱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나는 전혀 공감할 수 없었다. 장애는 나에게 너무도 먼 이야기였고, 그들의 현실은 내게 딴 세상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어느 날 나의 세상에 갑자기 장애라는 현실이 찾아왔다. 대상조차 없는 원망을 몇 년 동안 반복했고, 그 시간 동안 나는 그저 길을 잃은 듯 헤맸다. 장애를 받아들이는 과정은 길고 힘겨웠다. 마치 어두운 터널을 걷는 것처럼 더디게 흘러갔다. 하지만 지금, 우리 가족은 아이의 장애와 함께 그 어둠을 뚫고 나와 잘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이제는 그때와는 달리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장애는 우리 가족에게 진짜 축복이다."


이제는 무엇보다 내 둘째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00야, 엄마는 너를 만나서 정말 행복해. 매일매일이 너무 감사해. 만약 다시 태어나기 전에 아이를 고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귀가 안 들린다 해도 엄마는 반드시 너를 선택할 거야. 너와 함께 하는 시간이 너무나 소중하고, 너는 우리 가족에게 주어진 보물이야. 우리 가족의 진짜 축복이란 바로 너야."


이제부터가 우리의 진짜 비범한 여정의 시작이다. 둘째는 초등학교 입학을 성공적으로 마쳤고, 이제 앞으로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쳐야 한다. 그 과정에서 비장애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입시를 치르고, 대학생활을 할 것이며, 결국엔 사회에 나아갈 것이다. 그 모든 길을 걷는 동안 나는 분명 수많은 걱정으로 가슴 졸일 것이다. 하지만 며칠 전, 교통사고가 나서 떨고 있는 나를 향해 둘째가 "엄마, 괜찮아?"라고 물으며 나의 손을 꼭 잡아 주던 그 순간이 자꾸 떠오른다. 그 작은 손에서 느낀 따뜻한 위로와 든든함은 나보다 먼저 한 걸음 앞서 스스로 자신도 지키고  가족도 지켜갈 것이라는 믿음을 심어주었다.


나는 이제 점점 아이의 길을 뒤에서 따라가는 부모가 될 것이다. 지금까지는 앞서가며 보호하려 했지만, 이제는 둘째가 스스로 앞서 나갈 것이다. 그 길에서 나는 뒤에서 아이를 응원하고 지켜볼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둘째가 혼자 비범한 여정을 떠나는 순간이 오겠지. 그날을 기대하며 나는 간절히 바라본다. 둘째의 장애가 그의 인생에서 걸림돌이 아닌, 더욱 높이 도약할 수 있는 디딤돌이 되기를. 그 디딤돌을 밟고 멋지게 세상을 향해 나아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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