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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은있다 Nov 22. 2023

나는 왜 항상 휘둘릴까?

식이장애이야기





얼굴은 웃고 있지만 흔들리는 눈동자와 부산스러운 손짓, 과장된 웃음 속에서 그녀의 불안함이 내게 고스란히 전해진다. 한참만에 연락을 해온 정현씨는 늘 그랬듯 내 안부를 먼저 물으며, 나에 대한 칭찬과 자신이 나를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소란스럽게 늘어놓는다. 한동안 그녀의 이야기들을 가만히 들어주며 가볍게 웃으며 감사도 전해본다.      


그녀가 나를 비롯한 누군가를 만날 때 보이게 되는 패턴이다. 아주 밝고 상냥한 태도로 모 뮤지컬 배우처럼 에너지를 최대한 끌어올려서 상대를 대하고, 그 모습 뒤에 자신의 진짜 감정을 최대한 숨긴다. 때로는 자기 암시 같기도 하다. 한껏 올린 텐션으로 상대를 대하다 보면 정말 자신이 행복하고 즐거운 상태라고 느끼고, 자신의 어려움은 순간 사라져 버리기도 하니까. 그러다 보니 정현씨의 진짜 마음은 꽁꽁 숨겨져 있거나 거의 헤어질 때가 되어서 아주 잠깐씩 드러난다. 이런 패턴은 상담 때도 어김없이 적용되어 상담 초기에는 그날의 상담을 마무리할 때 아무 일도 아닌 듯 큰 이슈를 던져놓기도 했었다.     



전 왜 이렇게 휘둘리죠? 

제 자신이 너무 바보 같아요.

특별한 능력이 없으니 매 순간 성실히 하려고 노력했어요.

그런데 매번 내 의사와는 무관하게 제 삶이 타인에 의해 휘둘리고 있어요.

제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어요. 

너무 힘들어서 성당도 열심히 다녔지만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요.

이런 내가 너무 한심스럽고 신이 원망스러워요.      





정현씨는 아주 성실하고 매사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다. 부당함도 감수하며 온몸이 부서져라 일하다 보니, 직장에서는 이리저리 백업 멤버로 가장 많이 불려 다니는 사람이다. 처음에는 인정받는 느낌이 들고 조직에서 자신이 필요한 존재 같아서 기꺼한 마음으로 시작하고, 그러다 보면 누구의 부탁은 들어주고 누구는 거절할 수 있는 상황에 처하다 보니 결국 거절하지 못해 다 떠안기 일쑤였다. 일머리도 있어서 성과를 냈지만, 그 공은 전부 다른 사람에게 돌아갔다. 딱 서브로 부려먹기 좋은 사람이 되어버린 그녀는 일을 하면 할수록 부서에 정착해서 자신의 커리어를 쌓기보다 이 부서 저 부서로 이동하느라 승진은 못하고 마땅히 내세울 커리어도 없는 상황에 놓였다.      



매일 야근에, 주말에도 불려 나가기 일쑤였고, 그런 날들의 연속이다 보니 하혈을 하고, 공황증상도 오고, 없던 알레르기 쇼크로 응급실에 실려가는 날이 많아졌다. 그나마 쉬는 날을 하루종일 폭식과 구토를 하고 넉다운이 되어 잠들었다가 다시 일어나서 먹고 토하기를 반복했다. 편찮으신 엄마를 부양해야 했기 때문에 일을 그만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의 엄마는, 그녀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건강이 좋지 않아서 병원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아빠는 사랑이 많은 분이었지만  그녀는 혼자 있어야 하는 시간이 많았다. '아빠마저 떠나면 어떡하지? 그럼 나는 완전히 혼자인데'라는 두려움이 그녀 내면에 가득 자리 잡았다. 그런 두려움을 견뎌보려고 항상 최선을 다하고 사람들과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항상 웃고, 맞추고, 갈등이 생기지 않게 하는데 모든 에너지를 쏟는 것이 그녀가 터득한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생존전략이었다.      



그녀의 생존전략은 긍정적인 결과를 낳았다. 확실히 그녀는 모두에게 좋은 사람으로 평가받았고, 환영받았으니까. 그러나 문제는 자신의 안전과 생존을 위한 그 최고의 전략이 이제는 도리어 그녀에게 독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 아픈 엄마와 바쁜 아빠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택한 그 방식은, 성인으로서 그녀에게는 이제 효과적이지 않은 것이다. 아기가 배고플 때, 심심할 때, 아플 때, 불안할 때 울음으로 표현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그 방법을 청소년이나 성인이 되어서까지 사용할 때는 원하는 것을 얻기보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어리다, 철없다, 지친다는 반응을 얻으며 결국에는 혼자 남겨지게 될 텐데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혼자 남겨질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맞추고 그녀는 누구에게도 속마음을 털어놓을 곳이 없다. 쉬는 날도 없이 일하는 그녀에게 남자친구들은 지쳐서 떠나갔고, 모임에 나오지 않는 바쁜 그녀는 친구들과 어색하고 먼 사이가 되어버렸다. 부모님이 건강이 안 좋거나 순간 나이 든 부모를 느낄 때마다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는 '혼자 남겨질 것에 대한 두려움'은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그녀를 삼켜버렸다.      





정현씨가 휘둘리지 않으려면, 삶의 주도권을 제대로 가져오려면 방법은 하나다. 어떤 결정을 해야 할 때, 지금까지처럼 타인 중심이기보다 '나'를 먼저 우선에 두어야 한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이 상황 속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그 선택을 했을 때 장단점을 살펴봐야 한다. 내게 맞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선택을 해야 한다. 그래야 그 선택으로 맞이할 어려움들을 내가 예측하고 준비할 수 있고, 감당도 할 수 있게 된다. 그 과정 속에 어려움이 있더라도 내가 그 상황에 대한 선택권, 주도권, 결정권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물론 주도권을 가져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때론 ‘좋은’ 사람의 모습을 버려야 할 때도 있고, 다른 사람과는 다른 의견을 말해야 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나를 드러내려면 상대와 생각이나 감정이 다르다는 것을 알려야 할 때가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때론 미움받을 수도 있고, 지금과는 다른 눈초리를 받을 수도 있다. 내가 원하지 않는 불편한 시선을 받아들이는 것이 주도권을 가져오는 데는 필수항목이다. 휘둘리지 않는다는 것은 익숙함을 벗어나 불편함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 의한, 다른 사람을 위한 나를 내려놓고, 그저 ‘나’를 우선하는 상태를 말한다.


타인의 시선에 재단한 ‘나’로 살아왔다면, 처음에는 상당히 힘들 것이다. 하지만 불가마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면, 그 뜨거움과 숨 막히는 느낌을 각오해야 한다. 그 뜨거움에 내 몸을 던지고 몇 초, 몇 분을 견딜지, 더 머물지, 예정보다 빨리 나올지도 내가 결정할 것이다. 그런 고통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좀 더 자유로운 나로 살 수 있다. 언젠가는 나로 살아가는 불편함이 편해지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내 삶의 주도권이 내게 있다는 느낌은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운 순간을 좀 더 명료하게 단단하게 맞이할 수 있는 버팀목이 되어줄 것이다.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

포기해도 괜찮다.

실패해도 괞찮다.

온전히 나의 것이다.

라는 느낌을 가질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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