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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야 Jan 12. 2023

모성애와 죄책감 그 어디 사이에서

나도 엄마는 처음입니다.

내 딸 린아는 3.9kg의 아주 건강한 아이로 태어났는데 다른 신생아 보다 꽤나 컸기에 병원에서 퇴원하는 날 신생아실 앞 많은 사람들이 백일은 된 아기 같다고 칭찬 아닌 칭찬(?)을 하며 놀라워했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건강하게 태어났지만 린아는 퇴원하면서 황달이라는 진단을 받았는데 치료가 필요한 정도는 아니지만 조리원에 입소 후 연계 진료해 주시는 소아과 선생님이 잘 살펴봐주실 거라며, 곧 괜찮아질 거라고 간호사 선생님은 별일 아니라는 듯 린아를 내 품에 안겨줬다.


세상에 이렇게 우람한 아이가 황달이라니. '황달'이라는 그 단어를 듣자마자 내 두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흘러내렸고 알 수 없는 이상한 감정에 북받쳐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던 기억이 난다. 아마 내가 린아를 만난 지 5일째 되던 날 흘렸던 그 눈물이 내가 린아에게 느꼈던 모성애와 죄책감 그 어디 사이쯤에 해당하는 처음 가진 감정이었던 것 같은데 다행히 산후조리원에 있는 동안 린아의 황달은 자연스레 완치되었고 생각보다 많은 신생아가 황달을 경험한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조리원 퇴소 이후 온전히 내가 린아를 돌보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이런 감정을 때때로 느끼게 되는데 처음으로 손톱가위로 린아의 손톱을 잘라주던 날, 날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숨죽이며 손톱을 자르다 꿈틀 하는 아이 때문에 깨알보다 작은 피를 냈을 때 파상풍 예방 접종도 아직 안 했는데 어떡하냐며 통곡의 눈물을 쏟았던 적도 있었다. 얼마 전 배우 조정석님이 유퀴즈에서 나와 똑같은 이 에피소드를 얘기하는 영상을 우연히 보고 세상 모든 부모가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을 하며 그때 기억이 떠올랐다.


나도 엄마는 처음인지라 모성애라는 것이 어떤 감정일지는 책이나 드라마, 영화에서 간접적으로 경험했던 것들 그 이상일 수 없었고, 나의 엄마를 통해 느끼는 내리사랑으로는 내가 감히 짐작도 할 수 없는 어떤 미지의 우주를 대하는 신비로운 감정이라고 표현하면 설명이 될까? 이 모성애라는 뜨거운 감정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죄책감이라는 감정선과 어느 정도 맞닿아 있기도 한데, 아이가 잘못되었다고 느끼는 순간 나의 잘못이 1%도 없을지라도 내가 낳았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 되어버리는 이상한 감정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물론 모성애와 죄책감은 단어 그 차제만으로도 전혀 다른 감정이고 동일시할 필요도 없지만 아주 자연스레 생기는 이 두 감정이 엄마인 나를 행복하지 않다고 느끼게 하는 위험한 감정으로 둔갑하지만 않는다면 너무 자책하지 않으면서 편안하게 마주해 봐도 괜찮지 않을까 조심스레 얘기해 본다. 모성애는 결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서 우러나는 사랑이라고 생각하는데(꼭 자식을 낳지 않더라도 엄마나 아빠라는 자리에 있어보지 않고서는 생겨날 수가 없는 묘한 모양의 감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모든 부모가 모/부성애가 있냐 없냐를 당연하게 여겨서도 안되고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함부로 이야기할 수도 없는 성질의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특히 워킹맘들이 갖는 죄책감이 많이 이야기되곤 하는데 아이가 아플 때는 이 죄책감이 극에 달하기도 하고 아이뿐만 아니라 아이를 봐주시는 조부모나 어린이집 선생님, 심지어 직장 동료에게까지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대상이 없을 정도이다. 아이가 혼자서 자립적인 생활을 하기 어려운 10년 가까운 긴 시간 동안은 특히나 모성애와 죄책감 사이의 힘겨운 줄다리기를 하며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텨야 한다. 당장 오늘내일만 바라보고 죄책감에 빠져들어 엄마인 나 자신을 희생해서는 엄마가 아닌 '내'가 견뎌낼 수 없다. 단순하게 아이를 직접 양육하는 시간은 20년이고 나의 남은 인생은 50년이라고 하면 설명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터널에서도 결국 한 줄기 빛을 그 끝에서 발견하듯이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 어느덧 터널을 벗어난 나와 아이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3주간의 병원과 조리원 생활 후 돌아왔을 때 남편과 나 밖에 없던 세상 조용했던 집에 갑자기 아무것도 잘 모르겠는 낯선 한 존재와 더불어 앞으로의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이상한 기분을 견디게 해주는 것, 내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 산후 생활 중에도 낮이고 밤이고 새벽이고 벌떡 일어나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정성을 모두 쏟아붓게 만드는 것, 그리고 진심으로 나의 부모를 끝없이 생각하게 하고 한 없이 감사하고 죄송한 마음이 들게 만드는 이 감정을 내가 린아를 낳지 않았다면 감히 짐작이나 할 수 있었을까. 아마 남은 인생을 여전히 이 경이로운 모성애와 불편한 죄책감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며 보내겠지만 엄마로 살아가는 내 삶의 한 부분이 훗날 내 스스로에게 가장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울 수 있도록 잘 영글어나가게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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