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권위주의, 극우의 물결이 몰아치고 있는 가운데 한국만은 흡사 ‘신-자유주의의 섬’이 되어 있는 듯하다. 가까스로 좌파 연합이 극우 정당을 막아내긴 했지만, 자유, 평등, 박애의 나라인 프랑스에서마저 극우가 고개를 들고 있다. 미국 역시 마찬가지다. 트럼프의 재선이 확실시 되는 오늘날 미국은 더 이상 자유민주주의의 본산이 아니다. 오늘날 미국은 점차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으로 향해 가고 있다.
이러한 국제 정세 속에서도 한국의 정세는 잠잠한데, 한국에서 유럽과 같은 배타적 종족주의를 기반으로 한 극우 정당이 탄생할 리는 만무하거니와, 트럼프와 같은 포퓰리즘적 인물조차 나타나고 있지 않다. 한국 사회에서는 여전히 ‘자유’라는 가치가 최고의 지위를 누리고 있고, 자본을 향한 질주가 맹렬히 진행 중이다. 그렇다면 미국 혹은 유럽과 같은 '선진국'을 앙망해마지 않는 한국에서 왜 권위주의적 포퓰리즘과 극우 종족주의는 등장하지 않는 것일까?
아마 이 글을 읽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권위주의적 포퓰리즘과 극우 종족주의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한 부정적인 시각은 물론 타당하다. 권위주의적 포퓰리즘과 극우 종족주의는 병태적인 현상이며 결코 바람직하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권위주의적 포퓰리즘과 극우 종족주의가 등장하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간단하게 말해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이 등장하게 된 것은 자본주의, 좀 더 정확히 말해 신자유주의 때문이다. 익히 알려져 있듯(그리고 오늘날까지 한국이 가장 찐~~하게 경험하고 있듯) 신자유주의는 모든 것을 경제적 가치로 환원시키는 것을 정수로 삼는다. 인간, 친구, 가족, 결혼 등등 모든 인간적인 가치를 교환 관계, 즉 그것이 얼마의 자본을 창출하는가의 각도에서 파악하는 것이 신자유주의의 핵심이다.
한때 이 신자유주의는 잘 돌아갔다(한국 사회의 신자유주의도 잘 돌아갔다. 1990년대에서 2000년대 초반까지는). 모든 것을 자본으로 환원함으로써 사회의 효율은 증대되었고, 각자 능력에 따라 마음껏 물질적인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인이 세계에서 가장 화끈하게 경험하고 있듯 신자유주의는 사회를 황폐화시킨다.
모든 인간적인 가치를 자본에 의한 계산으로 환원한 결과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결혼, 연애, 출산 등 이 모든 것을 ‘이해타산’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결국 자신에게 마이너스인 것은 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오직 나에게 '물질적으로(혹은 금전적으로)' 플러스가 되는 것만 해야 하는데, 연애, 출산, 가족으로 이어지는 연쇄 작용은 어쩔 수 없이 모종의 희생을 수반할 수밖에 없는바, 장부상 마이너스가 되는 행동은 신자유주의적 관점에 따르면 ‘비이성적인’ 활동에 불과하다.
신자유주의가 잘 돌아갔던 이유는 당연하게도 자본주의가 ‘아주’ 잘 돌아갔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너무도 잘 돌아가서 극소수의 사람들이 모두 먹고 난 후에도 자본이 차고 넘쳐 극상위 계층에 포함되지 못한 사람들에게까지 흘러 넘칠 수 있었기 때문에 신자유주의는 그럭저럭 굴러 갔던 것이다. 하지만 ‘파티가’ 끝나자 더이상의 ‘낙수효과’는 없었다. 자본이 차고 넘치는 시대는 끝났고, 오직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신자유주의의 열매를 맛볼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이 되자 사람들(한국인을 제외한)은 신자유주의를 의심하게 되었고, 자본의 횡포를 통제해줄 수 있는 힘, 즉 권위주의를 찾기 시작했다. 권위주의는 강력한 공권력을 가지고 자본을 통제하겠다고 약속한다. 또한 종족주의에 기반을 둔 극우는 외국인을 몰아냄으로써 내국인의 몫을 확보해주겠다고 주장한다. 이게 바로 오늘날 극우주의와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이 등장하게 된 맥락이다.
그렇다면 왜 한국에서는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이나 극우 종족주의가 나타나지 않을까? 그리고 우리는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이나 극우 종족주의가 나타나지 않고 있는 한국의 상황을 마냥 좋다고만 할 수 있을까?
우선 이른바 ‘보수’라고 자칭하는 이들의 면면을 보자. 한국 보수 세력의 근본 조합은 다음과 같다: ‘매판(친일)+반공+친자본(친재벌)’. 매판(친일)은 이제 시간이 너무나 흘러 그 흔적을 쉽게 찾아볼 수 없지만 - 물론 작금의 정부는 그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긴 하다 - 반공과 친자본은 오늘날에도 '살아 있는 힘'으로 작동한다. 홍범도 장군 흉상 논란을 통해서도 드러나듯 ‘반공’은 여전히 한국 보수를 떠받치는 핵심 가치다. 반공은 자연스럽게 친자본(친재벌)로 이어진다. 공산주의에 대한 반대가 국시이기에, 공산주의의 반대말, 즉 자본주의 역시 국시가 될 수밖에 없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한국의 ‘보수’ 세력이 민족 문제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오히려 쿨하다는 사실이다. 이자스민의 사례를 통해서도 확인되듯, 한국 보수 세력은 오히려 다문화에 대해 관대한 편이다. 한데 그 이유가 한국 보수 세력이 착하기 때문은 아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또 다른 종류의 종족주의가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좌파척결’이라는 이름의 종족주의다. 보수 세력은 주장한다. ‘빨갱이를 몰아내면 나라가 잘 돌아간다.’ 실상 이것은 ‘멕시코인을 몰아내서 백인 노동자의 몫을 되찾겠다’는 극우 종족주의의 내향적 버전이다. 유럽과 미국의 극우 종족주의는 이민족을 ‘침입자’로 설정하고 그들을 쫓아냄으로써 사회를 정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데 한국의 보수세력은 이제 그 누구라고 특정하기도 힘든 ‘빨갱이’를 몰아냄으로써 나라를 정화시키겠다고 주장한다. 오죽 급했으면 분단이 되기도 전에 활동했던 홍범도 장군을 호출했을까.
다시 자본주의의 문제로 돌아가자. 한국 보수에게 반공은 국시이기에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역시 국시다. 그 결과 한국 보수 세력은 자본을 통제할 수 없다. 자본주의는 그들에게 있어 종교다.
그렇다면 비-보수세력(민주당을 비롯한 여타 야당을 통상 ‘진보’라고 말하지만, 실상 이것은 국민의 힘을 ‘보수’라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적절치 않은 것이다)은? 한국의 비-보수 세력은 자신을 ‘민주주의의 적자’라고 인식한다. 또한 자신이 민주주의의 적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군부 독재’, 즉 권위주의 세력을 타파한 것이기에, ‘반(反) 독재’, ‘반권위주의’야말로 이들의 국시다. 이 때문에 한국의 비-보수세력 역시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을 만들어낼 수 없다.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해 자본을 견제해야 한다는 대의에 어느 정도 동의할 수도 있지만 - 실상 이 점 역시 분명하지 않다 - 그것을 권위주의적 수단에 의해 수행하는 것은 금기다.
결국 한국의 양당 구조를 구축하고 있는 두 세력, 즉 보수 세력과 비-보수 세력은 각자의 이유에 의해 권위주의적 포퓰리스트가 되지 못한다. 전자는 반공+친자본이라는 태생적 이유로 인해 자본주의를 견제할 수 없고, 후자는 반권위주의적이어야 하기 때문에 자본을 통제할 힘을 발휘할 수 없다.
이렇게 보수 세력과 비-보수 세력이 각자의 이유로 자본을 통제하지 못하는 사이, 나라 밖에서는 권위주의적 포퓰리즘과 극우 종족주의가 굴기하고 있다. 더군다나 이러한 현상이 중국이나 북한과 같이 ‘원래 그러했던’ 나라들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선진국이라 철썩같이 믿었던 유럽과 미국에서 나타나고 있다.
한국인은 안도할지도 모르겠다. ‘휴 다행이야 우리나라는 민주주의 국가라서 권위주의도 막고, 극우 종족주의 같은 건 나타날 기미도 없어.’ 한데 권위주의를 막아낸 사이, 자본을 견제할 공권력은 이제 어디에도 없게 되었다. 또한 신자유주의가 인문사회과학담론을 모두 초토화시켜버린 탓에 이제 우리는 빨갱이 타령이 극우 종족주의의 또 다른 버전이라는 것을 알아챌 수도, 논의할 수도 없게 되었다.
그 사이 한국은 ‘순도 99.9%의 자본주의 사회’가 되었다.
그리고 2024년 현재 한국의 출산율은 0.7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