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갖는 이데올로기는 ‘먹고 사니즘’이다. 이 ‘먹고 사니즘’이라는 말의 대략적인 의미를 풀어보면 결국 ‘물질적인 차원에서 먹고 사는 것 이외에는 아무 쓸모가 없다’ 정도가 될 것이다. 당연하게도 한국에서 ‘먹고 사니즘’이 강력한 위상을 갖게 된 역사적 맥락이 있다. 식민 경험, 전쟁, 급속한 현대화, 군사 독재 등등. 이른바 ‘압축적 근대화’를 관통하면서 한국 사회는 ‘인간다움’을 고민할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그런데 선진국 대열에 진입한 오늘날에도 우리는 여전히 ‘시간이 없다.’
‘압축적 근대화를 겪었기에 우리는 시간이 없었다’는 인식 자체가 얼마나 위선적이며 허울 좋은 핑계였는지는 차후 다시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우선 여기서 살펴보야야 하는 것은 인문학의 쓸모라는 문제다. 한국 사회는 항상 시간이 없기에(혹은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무언가의 ‘실용성’을 집요하게 캐묻는 버릇이 있다. ‘그게 도대체 무슨 쓸모가 있냐’는 말로 모든 문제를 판단하는 습성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극단적으로 조급한 실용주의적인 질문 앞에서 인문학의 쓸모라는 문제는 순식간에 증발되어 버리고 만다. 한데 정말로 인문학은 쓸모 없는 것일까? 우리는 이 문제를 좀 더 정밀하면서도 근본적으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모든 것이 그렇듯 인문학 역시 어느날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것이 생겨난 역사적, 사상적, 문화적 맥락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인문학이 탄생하는 데 있어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신 중심적 세계관의 붕괴이다. 다시 말해 인문학은 신학의 붕괴로부터 탄생한 것이다.
천동설(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는 우주관)의 사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 전근대 사회는 신학적 원리가 세상을 지배했다. 신이 설계한 위계적인 질서 속에서 세상의 원리가 규정, 설계되었고 모든 것은 성경의 권위에 의해 설명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인간은 이와 같은 신학적 세계관의 틀 속에 머물기를 거부했다. 인문학은 바로 이렇게 인간이 신학적 질서로부터 탈출하는 순간에 탄생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신학적 질서로부터 탈출한 인간은 완전한 행복을 얻을 수 있었을까? 신학적 질서로부터 탈출한 이후 인간은 더욱 근원적인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이전까지 신에 의해 유지되었던 질서가 붕괴한 이후 인간은 자기 스스로의 힘을 통해 새로운 질서를 수립해야 했다. 모든 위계가 사라지고, 모든 존재가 평등한 세상 속에서 어떻게 질서를 수립하고 유지할 수 있을까? 이것이 바로 인문학이 신학을 붕괴시키면서 스스로 제기한 문제이자 자신이 짊어져야 할 사상적 숙명이었던 것이다.
인간 스스로 새로운 질서를 수립해야 한다는 이 난제는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았다. 어쩌면 이 문제는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다만 우리는 신학의 붕괴와 인문학의 탄생이라는 맥락에서 인문학이 짊어져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 엿볼 수 있다. 인문학은 신이 없어진 세상 속에서 어떻게 세상을 유지할 것인가라는 영원히 풀릴 수 없는 난제를 고민해야 한다는 책무를 짊어진 것이다.
21세기에 이른 지금의 시점에서 신 없는 세계 속의 질서 수립이라는 난제에 관해 인간이 내놓은 최상의 답은 ‘이성’이다. 16세기를 전후로 일련의 사상가들은 이성이라는 개념을 수립함으로써 인간이 자신의 힘을 통해 세계를 창출하고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영위하고 있는 근대적 정치 체제는 바로 이 ‘이성적 인간’을 근간으로 수립·운영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인문학의 쓸모라는 문제에 대한 해답은 명확하다. 인문학은 결국 ‘근대적인 인간’, 또는 ‘이성적인 인간’을 만들어내는/만들어내야한다는 역할/책무를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문학을 사실상 절멸시켜 가고 있는 한국 사회는 결국 이성적 인간의 배양이라는 근대 사회의 핵심적인 책무이자 매커니즘을 폐기해 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도 한국인은 정치 때문에 괴롭다. 그리고 사회면에는 온갖 패륜적인 일들이 연일 보도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인문학이 무슨 쓸모가 있는가’라고 물을 수 있을까? 인문학은 사람을 만드는 학문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사람을 만드는 학문을 폐기하면서 왜 사람다운 사람이 없냐고 묻는 바보짓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