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알고 있듯 한국은 친일청산, 즉 반민족 행위자에 대한 처벌에 실패한 나라다. 사실 한국처럼 반민족 행위자에 대한 처벌에 실패한 나라는 그리 많지 않다. 프랑스의 경우 나치 정부에 복역했던 반민족 행위자들을 대부분 처형했고, 베트남은 반민족 행위자의 3대 후손까지 공직을 맡을 수 없도록 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공식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하면, 당연하게도 한국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최근에는 그 목소리마저 희미해졌지만(역사를 화끈하게 잊어가는 중이므로), 여전히 ‘친일청산’의 목소리는 간간이 들려온다. 그리고 친일청산 혹은 친일파 척결이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그것에 극렬히 저항하는 이른바 ‘보수단체’는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든다: “이제 친일파가 누구인지 정확히 특정할 수도 없는 마당에 굳이 긁어서 부스럼을 만드는 이유가 뭔가?” “친일파 청산은 국론을 분열시킬 뿐이다” “먹고 살기 바쁜 와중에 친일파 청산은 시간 낭비일 뿐이다’ ‘친일파 청산은 종북좌파의 책략이다’.
흥미로운 점은 헌법이 제정되던 1948년 당시에도 친일파 척결에 반대했던 이들의 주장이 위의 주장과 거의 똑같았다는 사실이다. 박혁이 쓴 <헌법의 순간>에 따르면 당시 반민족행위자 처벌에 반대했던 이들은 누가 친일파인지 정확히 지목하지 못하면 아무나 함부로 친일파의 누명을 쓰게 될 것이고, 따라서 반민족행위자 처벌법은 철회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인적 자원이 부족한 상황에서 친일파를 모두 처벌하면 나라를 운영할 사람이 없다는 논리도 있었고, 먹고 살기도 힘든 마당에 왜 한가하게 친일파 청산을 운운하느냐는 주장도 있었다(박혁 지음, <헌법의 순간>, 162). 정말이지 이른바 ‘우파’의 주장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다(그리고 이 ‘변함없음’은 그들의 게으름과 낮은 지적 수준을 보여준다).
당시에도 그리고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이어지는 ‘친일청산’에 대한 반대 논리는 일견 타당해 보이기도 한다. 그들 말대로 ‘내일을 알 수 없는 - 중국이 쫓아오고 미국이 흔들리는 - 이 바쁜 와중에 친일파 운운이라니!!’ 맞는 말이다. ‘친일청산은 종북좌파의 음모’라는 주장도 쉽게 반박할 수 없다. 만약 ‘정말로’ 그들의 주장대로 친일파 청산을 주장하는 이들이 북한의 지령이라도 받았다면 어쩔텐가!! 확인할 수 없는 위협만큼 두려운 것은 없다.
하지만 우리는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했다는(혹은 않았다는) 역사적 ‘사실’이 위에서 언급한 법리적 해석의 차원(‘누가 친일파인지 어떻게 가려낼 것인가’)과 효용성의 차원(‘바빠 죽겠는데 친일청산??’) 그리고 안보적 차원(‘친일파는 빨갱이들의 음모야!!’)을 넘어서는 모종의 ‘효과’를 만들어내고 있으며, 나아가 이 효과가 법리와 효용, 안보를 모두 압도해 이 사회를 해체시켜 버리는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앞서 프랑스와 베트남의 사례를 언급했는데, 그렇다면 왜 반민족 행위자를 처벌하는 것이 중요한 것일까? 당연한 말이지만 사회는 각각의 개인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사회는 수많은 개별적인 개인들로 구성되는 것이기에 다양하고도 이질적인 이해관계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수많은 개인들로 이루어진 사회 혹은 공동체는 때때로 각 개인들의 희생을 필요로 할 때가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외적의 침입, 즉 전쟁이다.
공동체의 존망을 결정짓는 위기의 순간이 다가왔을 때 공동체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희생이 필요하다. 만약 각각의 개인이 자신의 삶만을 도모하겠다고 결정한다면 그 공동체는 보존될 수 없다. 공동체가 보존되기 위해서는 공동체를 위해 개인을 희생해야 한다는 대의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다행히도 그 위협이 사라진 후라면 공동체를 위해 희생한 개인들에 대한 보상은 극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보상은 단순히 공동체에 대한 희생이라는, 과거의 행위에 대한 보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일종의 보험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공동체에 대한 희생을 기념하고 보상할 때에야만 비로소 차후에 있을지도 모를 공동체 존망의 순간, 다시 한 번 공동체에 대한 희생을 구성원들에게 요구하고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친일파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다는 역사적 사실 그리고 나아가 독립운동에 투신한 사람보다 친일행위에 투신한 사람이 더 나은 삶을 영위하고 있는 현실은 다음과 같은 내러티브를 만들어 낸다. “공동체에 대한 희생보다는 사적 이익을 챙겨라! 공동체에 대한 희생을 기억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공동체는 없다. 모두가 각자도생일 뿐이다!” 요컨대 반민족 행위자를 제대로 처벌하지 못한 역사는 공동체를 위한 희생이 무용하며 사적 이익을 취하는 것이 더 낫다는 모종의 ‘무의식’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러한 무의식이 만들어내는 효과와 비교하면 앞서 친일파 청산에 반대하는 이들이 제기한 법리적, 효용적, 이념적 폐해는 사실상 아무것도 아니다. 반민족행위자에 관한 문제가 제대로 정리/처리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끊임없이 방금 언급한 것과 같은 문화적 무의식을 재생산한다. 그리고 이 무의식은 끊임없이 “공동체를 위해 희생할 필요가 없다!”고 속삭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친일’이 과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재상산되는 미래인 이유다.
‘우파’라고 자처하는 이들이 말하는 대로 일제로부터 독립한 지 100년이 다 되어 가는 마당에 누군가를 ‘친일파’로 특정하는 것은 그저 특정 개인에 대한 ‘망신주기’에 그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들 말대로 ‘친일파 운운’은 정말 빨갱이들의 음모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군가에 대한 망신주기 그리고 빨갱이들의 음모가 만들어내는 폐해와 ‘공동체는 없다. 각자도생만 있을 뿐이다.’라는 무의식이 만들어내는 폐해 중 무엇이 더 치명적인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나와 있다.
일견 다소 논점을 벗어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최근 벌어지고 있는 의대생들의 작태를 보면 반민족 행위자 문제를 제대로 처리/처벌하지 못한 역사가 만들어내는 효과는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음을 절감하게 된다. 이웃의 생명 나아가 공동체의 생명보다 나의 직업적 미래가 더 중요하다는 인식은 친일파의 사례가 만들어낸 ’공동체는 없다. 오직 사적인 이익만 있으며, 심지어 공동체에 위해를 가하더라도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것이 남는 장사다’는 역사적 무의식과 과연 무관한 것일까?
2024년의 대한민국은 1948년 파종된 친일의 미래가 펼쳐지는 오늘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