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대한민국은 ‘단일민족’이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해 스스로를 그렇게 규정하고 있었다. 한데 오늘날에 이르러 이 ‘단일민족’이라는 개념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늘 그렇듯 특별한 선언도, 명확한 선포도 토론도 없이 그냥 그렇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조선 민족은 적응의 천재다. 특별한 선언도 토론도 없이 자연스럽게 시대적 변화에 적응한다. 하지만 자신이 어떻게 그리고 왜 적응해야 하는지에 관심이 없기에 그러한 부지불식간의 적응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인식하지 못한다.
익히 알려져 있듯 지방에는 외국인 근로자들이 많이 살고 있다. 지방 정부는 인구 감소 문제를 해결한다는 명목 하에 외국인 노동자들을 적극 ‘유치’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유치 활동이 일정 시간 지속되는 동안 그들은 2세를 낳았다. 그리고 피부 색깔이 다른 외국인 노동자들의 자녀들이 대학에 진학하기 시작했다. 어떤 학생은 부모 모두, 어떤 학생은 한 쪽 부모만 외국인이다. 부모의 국적이 무엇인지에 따라 다르지만(조선족 혹은 중국인 출신인 경우 사실상 외견상의 구별은 불가능하다) 부모가 모두 외국인인 경우는 물론, 부모 중 어느 한 쪽만 외국인이어도 외견상 확연한 차이가 난다. 하지만 대화를 나눠보면 영락 없는 한국인이다. 아니 그들에게 ‘한국인’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실례일 정도로 그들은 한국인이다.
이러한 추세 속에서 많은 공무원, 학자들이 ‘다문화’를 이야기한다. ‘다문화 시대의 **’ 이러한 개념들이 마치 유행어처럼 논문과 공문서 속에 넘쳐 흐른다. 좋은 일이다. 오랜 세월 동안 ‘단일 민족’으로 자처했던 민족이 이토록 열성적으로 다문화라는 추세에 적응하고 있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다만 나는 이 대목에서 과연 ‘한국화’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게 된다.
사실 한국 사회는 ‘다문화’를 습관처럼 언급하지만 이 ‘다문화’라는 개념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한다. 다문화’라는 개념이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다양한 문화를 한국 문화 속으로 용해시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인지가 분명하지 않은 것이다. 한데 내가 최근 경험한 대학 속의 다문화 풍경은 전자보다는 후자에 가깝다. 한국 사회는 ‘다문화’라는 개념을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형태로 이해하지 않는다. 한국인이 이해하는 ‘다문화’는 ‘다양한 국적 출신의 사람(좀 더 정확히 말해 하층민 출신 혹은 그러한 계층에 속하게 된 외국인)이 한국 문화에 눈치껏 적응하는 것’을 가리킨다.
내가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 계기는 M.T(이하 엠티)였다. 엠티는 대학생 생활의 꽃이다. 엠티는 대학생이 된 새내기가 대학 문화를 경험하고 선후배 관계를 정립하는 가장 직접적이면서도 강렬한 계기인 셈이다. 당연하게도 다문화 가정 출신 학생들도 엠티에 참여한다. 확연히 구분되는 외견 상의 차이는 결코 언급되지 않는다. 모두가 ‘다문화’라는 개념을 장착한 덕분이다. 다문화라는 개념을 장착했기에 누구도 그 학생에게 부모의 출신이 어디인지, 부모 모두가 외국인인 것인지 등등을 결코 묻지 않는다. 또한 그 '출신'을 물을 수 없기에 그가 가지고 있는 문화적 정체성 역시 화제가 될 수 없다. 침묵의 에티켓이 작동하는 것이다.
이제부터 ‘한국화’ 과정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한국화의 작동 과정은 대략 다음과 같다. 어색한 인사를 마치고 삼겹살을 굽기 시작한다. 소맥이 제조된다. 삼겹살과 소맥을 들이킨 후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서로의 경계를 허물게 된다. 술의 힘을 빌려 서로의 경계를 허물고 난 뒤, 친구를 사귀고 선후배 관계가 정립된다. 이제 우리는 모두 ‘한국인’이 된 것이다(그리고 이러한 과정에 적응하지 못하는 '다문화 출신'은 잘해야 보호의 대상이 되거나 대부분 무관심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과정을 지켜보면서 나는 10년 전쯤 인터넷에서 읽었던 에피소드 하나가 불현듯 생각났다. 글을 쓴 이는 외국인 노동자의 아내였는데(이 글쓴이가 한국인인지 외국인인지는 알 수 없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이 한국 문화에 적응하는 과정을 담담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녀의 기술에 따르면, 남편은 일주일에 한두 번 ‘삼소(삼겹살+소주)데이’를 갖는다(좀 더 정확히 말해 가져야 한다). 삼소데이의 핵심은 소주를 때려 마시고 노래방에 가서 목청껏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 속에서 외국인 남편은 한국 사회의 위계 문화를 습득하고 눈치껏 행동하는 방법을 익히게 된다.
내가 인터넷에서 읽었던 글과 엠티에서 목격했던 장면은 놀라울 정도로 유사했다. 삼겹살, 소주, 맥주가 어우러지고 노래를 부르면서 한국인이 되는 과정, 이것이야말로 ‘한국화’의 정수인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 ‘찐’ 한국인들의 문화적 정체성은 ‘삼겹살+소주+위계문화’인 걸까? 사실 안타깝게도 이제 그러한 문화마저 사라져 가고 있다. 직장의 회식 문화도 사라져 가고 있고, 대학생들의 술자리 문화도 사라져 가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TV 프로그램 속에는 여전히 위에서 언급한 ‘한국화 과정’이 화석처럼 보존되어 있다.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 같은 프로그램이 보여주고 있듯, 우리는 외국인들이 한국 문화, 즉 한국 음식을 먹고 초록색 소주병을 신기하게 쳐다보는 것을 구경하면서 한국 문화의 우수성을 흐뭇하게 관람한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그러한 문화를 체험하지 못한다. 비상식적으로 상승한 물가 탓에 한국인에게 ‘삼겹살에 소주 한 잔’이라는 유일하게 남아 있던 문화적 정체성마저 그림의 떡이 된 탓이다.
결국 오늘날 다문화는 단일 민족과 마찬가지로 공허한 개념이 되었다. 마치 다양한 문화가 공존해야 한다는 ‘다문화’의 정신을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다문화'를 습관처럼 입에 올리지만, 실상 한국인이 실천하고 있는 ‘다문화’는 ‘탈색 과정’에 가깝다. ‘그들’ 혹은 ‘너희들’의 문화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으니, 이제 우리의 문화(삼겹살, 소맥, 노래방 그리고 위계문화로 조합된)를 받아들이고 너희의 고유한 문화는 내 관심사가 아니라는 것(그들의 문화를 한국 사회 내에 보존할 것인지 아니면 없애 버릴 것인지조차 관심 사안이 아니다)이 ‘한국 다문화’의 본모습이 아닐까?
한데 문제는 그들/너희들의 문화를 버리고 적응해야 할 ‘한국 문화’마저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을 인식했을 때 비로소 ‘내’가 인식된다. 자기 정체성은 본래적으로 항상 타자성을 수반해 형성되는 것이다. 한국인은 부지불식 간에 타자성을 확인하게 되었다. 한국인들은 인구가 급감하면서 자신의 필요에 의해 타자를 불러 들인 후, 그들을 탈색했다. 한데 그 탈색의 과정이 대를 이어 진행되는 와중, 정작 한국인은 자신의 정체성이 얼마나 공허하고 취약한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실상 오늘날 우리가 외국인들에게 자랑스럽게 내세우고 있는 이른바 ‘K-culture’, ‘K-food’가 정말 우리의 정체성일까? 질문의 방식을 조금 바꿔, 설사 ‘K-culture’와 ‘K-food’가 우리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중요한 문화 자원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 사회의 유대감을 형성시켜주고 있는가? 혹 삼겹살에 소주 그리고 노래방이라는 ‘한국화 과정’이 끝난 후에 남는 숙취와 공허함처럼 그 위대하다는 ‘K’는 결국 그저 소비재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하기에 다문화는 매우 당황스러운 개념이 되고 말았다. 한국 사회가 이슬람, 힌두교와 같은 ‘다문화’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곳은 분명 아니다(대구의 이슬람 사원 논란. 한국인들은 이슬람 사원 신축에 반대하면서 이슬람 사람들이 금기시 하는 돼지고기(삼겹살)를 구워 먹었다). 그들이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은 ‘한국화 과정’을 수용하고, 자신의 고유 문화를 매우 사적인 공간 속에 은밀하게 숨겨 놓는 것이었다. 한데 자신의 문화를 속소에 숨겨 놓은 후 ‘다문화 출신 한국인’이 적응해야 했던 한국 문화마저 말라가고 있다.
이제 찐 한국인들은 자신마저 즐기지 못하게 된 한국적 정체성을 화면 속에 고이 모셔 놓고 혼자 방에 틀어 박혀 ‘외국인(그것도 주로 백인)이 즐기는 한국 문화’를 감상한다. ‘다문화 출신 한국인’은 당황스럽다. 거리를 가득 메웠던 한국인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나는 이제 무엇에 적응해야 하는가? 내 숙소 어느 한 켠에 숨겨 놓았던 코란을 다시 꺼내야 하는 것일까? ‘한국적 정체성’은 어디로 간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