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여행 포토에세이 #41 _ Milan, Italy
25 국가 107일의 여행 기록:
아침 일찍 스위스 취리히를 출발해 밀라노로 가는 일정이다. 중간에 잠시 루가노를 경유하여 소소하고 작은 여행을 마치고 저녁이 돼서야 드디어 밀라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알프스 산 사이를 지나 국경을 넘어 이탈리아 롬바르디아 중심에 있을 때 펼쳐진 드넓은 평원은 내 시야를 저 멀리 닿게 해 주었고, 다시 한번 세상은 넓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해 주었다.
나의 이탈리아 첫인상은 밀라노의 중앙역이었다. 마치 신화 속에서만 존재할 것 같은 그리스식 신전을 현실화해 놓은 느낌이었다. 외벽과 천장, 기둥 등 시선이 닿는 모든 곳은 아름다운 조각으로 장식되었고, 얼마나 이탈리아 사람들이 미적인 부분에서 신경을 많이 쓰는지 단번에 알 수 있는 장소였다. 지금까지 많은 기차역을 방문해 보았지만, 뉴욕 중앙역과 앤트워프 중앙역, 그리고 밀라노의 중앙역은 살면서 꼭 둘러볼 가치가 있는 가장 아름다운 기차역들이다.
나는 층고가 높은 장소를 좋아한다. 층고가 높은 공간이 주는 웅장함에 압도되는 느낌이 너무 좋다. 그래서 그런 공간에 있을 때마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공간이 주는 시원한 느낌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천천히 순간을 즐긴다.
내가 가진 인생의 많은 꿈들 중 하나는 '나만의 집'을 짓는 것이다. 한국에 존재하는 아파트들처럼 획일화되고 정형화된 공간들 보다는 내 취향에 맞는 공간을 스스로 만들고 싶은 것이다. 집을 설계하는 단계에 있어 나에게 가장 중요한 부분은 단연코 높은 층고와 넓은 통유리창일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공간감을 형성하여 나만의 아지트를 만들고 싶다.
건물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작품 같은 밀라노 중앙역을 여유롭게 감상한 뒤, 드디어 유럽여행 네 번째 국가인 이탈리아에 첫 발을 내디뎠다.
혼자 유럽여행을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나자 여행에 지쳐가는 스스로를 발견하였다. 더위와 인파, 이동에 질려 점점 여행 매너리즘에 빠지고 있었다. 초반에는 혼자 여행하며 영감을 얻고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이 많았다면, 시간이 흐를수록 계획에 의한 수동적인 여행이 되어간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유명한 관광지에 가도 큰 감흥을 느끼지 않게 되었으며, 사진도 의무적으로 찍는듯한 느낌이었다. 유난히 이탈리아에서 제일 심했다.
사실 여행 계획을 세울 때부터 밀라노에 대한 큰 기대감은 없었다. 여러 여행 후기들을 참고했을 때, 생각보다 도시에 볼 게 많이 없었다는 평이 많았기 때문이다. 밀라노를 일정에 넣을지 말지 많은 고민이 뒤따랐다. 그러나 마침 밀라노는 스위스에서 로마로 향하는 동선 상에 위치하고 있었고, 그냥 지나치기에 큰 아쉬움이 생겼다. 또한 꼭 직접 방문하고 싶었던 장소인 밀라노 두오모 대성당도 존재하기에 짧은 일정으로 여행계획에 밀라노를 추가하였다.
계획했던 여행 시간이 짧기 때문에 얼른 숙소에 짐을 던져놓고 밀라노를 산책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발걸음이 향한 곳은 당연히 두오모 대성당이었다. 매일 사진 속에서만 보던 이곳을 직접 방문하니 생각보다 그 규모가 훨씬 커 놀랐다. 성당 외벽의 조각과 고딕양식의 지붕을 보니 어떻게 이 건물을 지었을까 하는 건축가에 대한 경외부터 지금까지 그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는 것에 대한 감사하는 감정이 들었다.
밀라노의 아침은 분주했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산업적으로 번영한 도시여서 그럴까 유럽의 여타 도시와 달리 아침 6시부터 출근하는 인파를 볼 수 있었다. 특히, 밀라노 대성당 뒤로 햇빛이 새어 나올 때쯤, 대성당 앞 광장에는 자동차, 자전거, 사람들이 서로의 좁은 공간 사이사이로 빈틈없이 지나가는 광경을 보았다. 어떤 국가든, 어느 지역이든 부가 몰리는 곳에서는 열심히 치열하게 살아가는 삶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특히, 패션의 대표도시 중 한 곳인 만큼 알록달록한 컬러와 특이한 디자인의 옷을 걸친 멋진 사람들이 밀라노의 길거리를 채워가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무채색, 톤다운컬러, 튀지 않는 편안한 색감을 선호하는 나는 밀라노 사람들의 오색빛깔 찬란한 느낌과는 다소 결이 다른 느낌이었다. 개인적으로 눈에 확 띄는 강렬한 색감을 부담스러워하기에 밀라노 사람들의 당당한 자신감과 스타일에 대한 자부심이 생소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또 하나의 배울 점이었다. 자신을 적당히 드러낼 줄 아는 것, 자신과 맞는 옷을 입는 것, 다양함을 시도해 보는 것, 이 모든 것을 아우를 수 있는 문화와 분위기를 형성하는 게 밀라노 도시의 매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밀라노의 화려함 속에서 벗어나 보편적이지 않은 나만의 색감을 찾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분명히 이곳에 나와 결이 맞는, 색감이 맞는 또 다른 장소들이 많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밀라노에서 두오모 성당을 보는 것 외에 큰 계획이 없었기에 그 이후로는 즉흥적으로 산책했다. 흥미로운 장소를 마주하는 대로 그곳에 머물러 시간을 보내고, 우연히 발견한 밀라노 곳곳의 작은 성당들에서 휴식을 취했다.
나는 유럽의 오래된 작은 성당들을 좋아한다. 내가 진정으로 편안함을 느끼는 몇 안 되는 장소들이다. 어두움 속 꼭 필요한 최소한의 빛만 허락해 창문으로 들어오는 채광 그리고 재단에 촘촘히 쌓인 촛불로만 실내를 은은하게 밝힌다. 신 앞에서 인간의 불완전한 모습을 어둠으로 덮고, 스스로의 부족한 내면을 찬찬히 성찰해 보게끔 경건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또한 성당 내부의 습기를 머금은 듯한 공기는 왠지 모르게 늘 차분하고 평온한 마음으로 나를 이끌어준다.
밀라노는 이탈리아 경제의 중심지이자 가장 발전한 도시이다. 밀라노 주변은 금융, 패션 등 이탈리아 경제 발전의 근간이 되는 많은 기업과 제조업 산업들이 포진되어 있으며, 그렇게 이탈리아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가 되었다.
이탈리아의 경제 구조는 조금 특이하다. 우리나라의 대기업 위주 경제 모델과는 달리, 이탈리아는 가족, 지역 단위의 작은 산업 클러스터를 형성해 다양한 제품들을 생산하며, 중소기업들이 높은 비율로 이탈리아 경제를 받치고 있다. 예를 들어 피렌체를 중심으로 가죽제품 관련 산업이, 볼로냐 지역에는 자동차 생산 중심의 산업이, 베로나에는 정밀기계 산업이, 브리안자 지역에는 가구 산업이 발달하였다. 그리고 이런 산업들은 여러 협회 및 지역은행과 연계하여 사업 발전을 다 같이 도모하고 있다.
이렇게 지역별로 형성된 산업 클러스터는 경제적으로 이탈리아를 성장시켰지만, 정치적으로 이탈리아에 큰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이탈리아의 골이 깊은 지역감정에 많은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로마시대 이후 과거부터 이탈리아는 주요 귀족가문과 지역 중심으로 도시국가처럼 나뉘어 분열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이탈리아 사람'이라기보다 '밀라노 사람, 피렌체 사람, 베네치아 사람, 로마 사람' 등 도시들 중심으로 정체성이 형성되어 있었다. 특히 북이탈리아와 남이탈리아는 더욱이 오랫동안 분열돼 있었기 때문에 그 정체성을 많이 달리하여 19세기 이탈리아가 통일되기 전까지 '하나의 민족'이라는 인식이 옅었다.
지역에 대한 선입견이 생겨 서로를 못마땅해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다양한 산업으로 발전한 북쪽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개발 된 남이탈리아와 소득격차가 벌어지는 만큼, 이탈리아 남북 심리적 거리도 함께 멀어지게 되었다. 남이탈리아는 북이탈리아 중심으로 펼쳐지는 정치적 상황과 경제개발에 불만이 늘 가득하고, 북이탈리아는 그들이 내는 세금혜택이 늘 남이탈리아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독립에 대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렇게 이탈리아는 쉽게 끊어낼 수 없는 지역감정의 골이 시간이 지날수록 깊어지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지역감정과 지역갈등은 꽤 흔히 나타나는 현상 중 하나다. 크게는 민족, 언어, 문화적 특성에 의해 나눠지기도 하지만, 최근 들어 하나의 정치공동체 내에서 발생하는 갈등은 종종 지역 간 경제적 차이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부와 자원의 분배에 대한 불만, 혹은 특정지역에만 편향된 개발이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주로 양쪽의 입장과 주장이 모두 이해가 되기에 이런 복잡한 상황 속 서로의 합의점을 찾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지역갈등의 가장 큰 문제는 '부정적인 선입견'이 생긴다는 것이다. 지속적인 갈등으로 인해 상대측 지역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한 겹 한 겹 쌓이다 보면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해당 지역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씌워진다. 그리고 그런 선입견이 악순환이 되어 갈등을 더욱 심화시키는 촉매제가 된다. 그 끝에는 정작 문제에 대한 고민은 사라진 채 본질에서 벗어난 그저 검증되지도 않은 부정적인 선입견에 따른 원색적인 비난과 혐오만 남겨지게 된다.
어느 국가나 마찬가지겠지만, 우리나라도 지역갈등에 대한 문제를 가진 국가다. 서로에 대한 불평과 불만, 더 나아가서는 출신지역에 따른 차별이나 편견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런 지역갈등은 당연하게도 정치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혹자는 어느 정치인의 인품, 공약, 방향 등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그저 그 사람의 고향, 정당만을 고려한 채 투표하기도 한다. 그런 풍습이 남아 정치인들도 이런 부분을 이용해 지지율을 올리는 편익을 취한다.
우리나라는 모든 국민들이 투표 혹은 발안을 통해 정치에 참여하는 '직접민주주의'와 대표자를 세워 정치를 운영하는 '간접민주주의'를 혼합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많은 선진화된 국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가장 현대적인 방식이며, 과거에 비해 교육 수준 평균이 높아진 만큼 토론과 참여를 통해 최대한 많은 구성원들을 만족시키는 합리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요즘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근래 전 세계적으로 포퓰리즘의 바람이 불었었다. 극단적인 성향을 가진 정치인과 정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며, 그 지지하는 이유 속에는 차별과 혐오, 이기심의 감정이 들어가 있는 경우가 많았다. 특정 지역 및 사람들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의도적으로 이끌어내 화합과 이해가 아닌 분열과 오해를 만들었다. 이성적인 판단이 아닌 감정에만 의존한 해결책은 결국 그 감정을 과열시켜 과오를 범해 부러지기 전까지 절대 합의점에 도달할 수 없게 만든다.
우리는 배운 어른들이다. 민주화된 사람으로서 어릴 때부터 원만하게 갈등을 해결하고, 평화적으로 문제를 대하게끔 교육받고 자랐다. 공동체 속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살기 위해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자세가 기본적으로 필요하다. 하지만, 요즘 보면 이런 기본적인 자세조차 안 되어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현실 속 많은 어른들은 본인이 늘 합리적이다는 착각 속에 편견과 이기심에 대한 윤리적, 도덕적 해이를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럴 때는 항상 어른들이 아이들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방향으로 합의점에 도달하려는 가치를 중요히 여겨야 한다. 많은 이의 다양한 입장이 있기에 현실적으로 쉽게 최고의 결과물에 도달하기 어렵겠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끝까지 많은 대화를 하려는 자세와 노력이 필요하다.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며 경험치가 쌓일수록, 상대방의 의견을 들으려 할수록, 자신의 것을 양보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질수록, 서로를 끌어내리는 것이 아닌 서로 치켜세워 줄수록, 대립보다는 상생을 이뤄낼 수 있지 않을까. 마치 전혀 다른 소라게와 말미잘이 공생하는 자연의 법칙처럼.
행복노트 #38
사람들이 함께 더불어 사는 세상에 역지사지의 자세는 기본이다.
지역갈등에 대한 생각과 함께 밀라노를 천천히 산책하며 또 한 번 생각이 많아지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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