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의 결혼
가족에 대한 책임감과 부담에서 벗어나 나 혼자만의 자유를 찾아 러시아로 왔건만 오히려 그것이 내게 고통이 되었다. 아버지와 동생들을 생각하면 미안함과 후회로 번민했다. 빨리 학업을 마치고 돌아가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마음이 급했다. 그동안 나름 희생했는데 이 정도는 괜찮다고 스스로 합리화하기도 했다. 집에 전화하면 동생들은 별일 없다고, 아버지도 잘 지낸다고 나를 안심시켰다.
러시아 음식만으로 지낼 수가 없어서 된장이니 고추장, 간장, 라면, 김, 미역 등 러시아에 없는 음식을 보내달라고 동생에게 편지를 썼다. 막내 남동생이 석 달에 한 번
꼴로 꼬박꼬박 소포를 부쳐주었다. 러시아에서는 집으로 편지나 소포를 배달해 주지 않았다. 편지나 소포가 우체국에 도착했다는 통지서만 우체통에 들어있었다. 통지서를 가지고 직접 우체국에 가서 편지나 소포를 찾아와야 했다. 처음에는 역 근처에 있는 우체국에서 소포를 찾아 그나마 수월했다. 집에 오는 길에 찾아 가까운 거리지만 약간의 돈을 주고 택시로 운반했다.
그러다가 가야 하는 우체국이 바뀌었다. 핀란드만 바로 앞 바닷가에 있는 아파트 건물이었다. 그곳까지 걸어가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편지를 받으면 돌아오는 길이 아무리 추워도, 손이 꽁꽁 얼어도 마음이 훈훈했다. 집에 갈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걸어가면서 편지를 읽었다. 그런데 문제는 소포를 받아 돌아올 때였다. 도저히 집까지 들고 갈 수가 없었다. 게다가 약간 외진 곳이어서 택시도 잘 다니지 않았다. 소포를 길에 놓아두고 차가 지나가기를 한참 기다렸다. 칼날 같은 바람이 옷 속으로 파고들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보내온 물건들과 함께 온 편지를 읽을 생각에 발을 동동 구르면서도 마음은 따뜻했다.
교회에서 가장 친한 언니가 있었다. 재희 언니. 친언니 이상으로 나를 아껴주고 내가 전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언니였다. 언니에게 자주 편지를 썼고 언니도 바로 답장을 보냈다. 아파트 사이의 넓은 공터를 가로질러 걸으며 언니의 편지를 읽을 때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언니의 편지에서 전해지는 마음은 이렇게 포근하고 가깝게 느껴지는데 우리를 갈라놓은 거리는 너무나 멀고 멀었다.
1997년 2월에 동생의 결혼식이 예정되어 있었다. 러시아에 간 지 6개월 만에 나는 동생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으로 잠시 돌아왔다. 그날을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는지. 내 일생에서 가장 긴 6개월이었다. 재희 언니가 공항에 마중 나왔다. 언니를 보자마자 나는 언니를 얼싸안고 펑펑 울었다. 언니도 함께 울었다. 언니의 첫마디는 “선화야, 다시 돌아오면 안 되니?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그 고생을 해? 돌아와서 사법고시 준비라도 하면 어때?”라는 말이었다. 언니의 그 말에 나는 완벽하게 이해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정말 언니 말대로 할까?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잠시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막내 남동생이 흰색 에스페로에 나를 태웠다. 그새 동생은 자동차 면허를 땄다. 대학을 졸업한 동생은 성악을 가르치며 돈을 번다고 했다. 우리 집에 차가 다 생기다니. 비쌀 텐데 제대로 할부를 갚기는 하나 싶으면서도 날렵한 차의 외관과 동생의 능숙한 운전 솜씨에 마음이 뿌듯해졌다. 막내도 이제 다 커서 독립했다는 게 실감 났다.
그런데 신림동 언덕의 집에 들어선 순간 주체할 수 없는 오열이 터지고 말았다. 나의 부재를 고스란히 드러내 준 집의 모습. 이런데도 내가 없어도 괜찮을 거라고 애써 자신을 다독였던가. “선화 왔냐?” 안방에서 나오는 아버지의 모습에 울음을 꾹 삼켰다. 나는 “잘 지내셨어요, 아버지?”라는 말 대신 “이게 꼴이 뭐야, 아버지”라고 말했다. 나는 짐을 풀기도 전에 집안을 치우기 시작했다. 연신 흐느낌을 진정시키지 못하는 내 모습에 재희 언니는 내 등을 두드리며 말없이 함께 정리를 거들었다. 동생은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이따 들어올게.”라며 밖으로 나갔다. “언니, 나 다시 돌아올 거야. 이건 정말 아니야.” 나는 울먹이며 언니에게 말했다.
그날 저녁 결혼할 동생이 집에 돌아왔을 때 그 말을 했다.
“나 다시 돌아와야겠어. 집 꼴이 이 모양인데 어떻게 러시아에 계속 있어?”
동생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누나, 유학 간 게 장난이야? 이러고 살면 좀 어때? 누나 공부나 신경 써. 돌아온다고 하면 내가 누나 안 받아줄 거야.”
동생의 말은 단호하고 강경했다. 동생도 사실 “그래, 누나가 돌아와 줬으면 좋겠어.”라고 말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 말을 참아내고 동생은 나를 앞으로 떠밀어냈다. 그 말이 준 힘이었을까. 시간이 지나면서 막상 돌아온다고 생각하니 공부를 포기하는 게 너무나 아쉬워졌다. 이런 마음으로는 포기할 수 없겠다는 걸 확인했다. 빨리 공부를 마치는 게 가장 좋은 길이었다. 누나를 자랑스러워하며 기꺼이 짐을 지고 있는 두 동생에게 실망을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의 자랑이었던 나는 이제 동생들의 자랑이 되어 있었다. 나 자신에게도 자랑스러운 내가 되어야 했다. 포기한다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았다.
한 달 한국에 머무는 동안 그리움과 외로움에 굶주렸던 마음이 다시 채워졌다. 나는 여전히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었다. 따뜻했고 행복했다. 이제는 전보다는 잘 지낼 수 있으리라, 그래야 한다는 마음으로 다시 러시아로 향했다. 이번에는 결혼한 동생과 올케가 함께 나를 배웅했다. “아버님 저희가 잘 보살필게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올케가 말했다. 혼자가 아니라 둘이 된 동생 부부를 보며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동생의 표정도 처음 내가 러시아에 갈 때와는 달랐다. 동생은 아버지와 가까운 곳에 신혼집을 얻었다. 막내 남동생이 아버지와 지내기로 했다. 나는 이제는 좀 안정되게 아버지와 동생들이 지낼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것이 누구의 희생을 전제로 한 것인지는 미처 생각지도 못하고 또다시 순진한 기대로 자신을 안심시켰다. 몇 년 후 그 기대는 엄청난 부메랑이 되어 내게 돌아왔다.
라도가
1998년에 나는 서른두 살이었다. 왜 하필 그해에 시작됐는지 모르겠지만 각종 신경증 증상이 연이은 파도처럼 이 년 동안 나를 덮쳤다. 그해 여름, 지인들과 함께 페테르부르크에서 세 시간 동안 자동차를 달려 라도가 호수라는 곳을 갔다. 러시아에는 큰 호수가 몇 개 있는데 바이칼, 라도가, 오네가 호수 등은 바다로 분류될 만큼 엄청난 크기를 자랑한다. 20여 명의 사람이 배를 타고 일박이일 여정으로 라도가 호수 안에 있는 섬에 가는 여행이었다. 평소 배 타기를 좋아했던 나는 설레고 흥분했다.
호숫가에 20명 정도 태울 크기의 고깃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인은 선배 부부와 나, 또 다른 여자 유학생, 그리고 선배의 지인인 남성이 전부였다. 그 외에는 모두 러시아인이었다. 배가 출발하기 전, 라도가 호수는 평온하고 잔잔해 보였다. 서늘한 전형적인 러시아의 여름 날씨였다. 나는 배에 올라 신이 나서 2층 갑판 앞쪽으로 갔다. 바람을 맞으며 배가 전진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었다. 섬까지 가는 데는 세 시간 정도가 소요된다고 했다. 그런데 배가 출발한 지 십여 분쯤 지났을까, 갑자기 배가 높게 솟구치더니 다시 푹 가라앉는 느낌이 찾아왔다. 이게 뭐지, 하고 주위를 둘러보는 순간 거칠어진 파도가 눈에 들어왔다. 순식간에 배는 양옆으로 사정없이 요동치고 갑판에 물이 들어오고 나가기를 반복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공포에 사로잡혔다.
“배를 돌려야 하지 않을까요?” 나는 여행을 주선한 선배에게 다급하게 말했다. 선배도 긴장한 표정으로 선장에게 가서 의견을 물었다. 러시아 선장은 손을 내저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항해를 계속했다. 노련한 선장의 판단이니 믿음이 갔을까. 처음에 놀랐던 다른 사람들은 이내 안정을 찾았다. 십 대 남자아이들은 심지어 재미있어하며 배 앞머리에서 넘실대는 파도를 즐겼다. 나이 든 사람들은 어지러움을 느껴 선실 안으로 들어갔다. 나 혼자만 극도의 패닉 상태에 빠졌다. 몸을 가눌 수 없어 간신히 기어서 선실로 들어왔다. 조그만 창밖을 살펴보니 주변에 다른 배들은 보이지 않았고 온통 넘실대는 물뿐이었다. 아무리 멀리 보아도 육지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배를 삼킬 듯이 하얀 이빨을 드러내는 파도를 보며 동생들 얼굴이 떠올랐다. 내가 여기서 물에 빠져 죽는 건 아닐까. 동생들을 다시는 못 보게 되는 건 아닐까. ‘타국에 와서 호수 한가운데서 이렇게 죽기는 싫어, 하나님, 살려주세요.’ 그 기도만 반복했다. 다른 사람들은 나를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별 호들갑을 다 떤다고 생각할 것 같아 공포심을 숨기고 가는 내내 두려워 떨었다. 그런 상태로 끔찍한 세 시간을 보냈다.
다행히 섬에 무사히 도착했지만 내 얼굴은 완전 사색이 되어 있었다. ‘내일은 어떻게 하지?’ 그 걱정에 여행을 즐길 수가 없었다. 그래도 조금 시간이 지나자 마음이 진정되었다. 작은 섬 주변의 물은 언제 파도가 쳤냐는 듯 잔잔하기 그지없었다. 러시아 사람들 뒤를 따라 숲으로 가 버섯을 땄다. 자연에서 건강하고 싱싱한 먹거리를 직접 채취하는 것이다. 몇 시간 동안 서늘한 숲에서 거닐며 버섯을 따다 보니 조금 즐거운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그 사이 몇 명의 남자들은 호숫가에서 물고기를 낚았다. 저녁에는 러시아식 꼬치구이인 샤슬릭을 숯불에 구워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백야였다. 페테르부르크보다 더 북쪽이어서 그런지 한밤중에도 하늘에 파란색 물감이 엷게 칠해져 있었다. 이야기와 노래가 이어지며 러시아의 여름밤이 무르익어갔다. 내일이 걱정되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진짜 러시아의 삶에 녹아든 기분이 들었다.
다음날 직접 딴 버섯과 잡은 생선으로 수프를 끓여 먹었다. 식사하는 도중 한 여자가 선장에게 “어제 긴장되지 않았나요?”라고 물었다. 선장은 솔직히 긴장했다며 출발
전에 출항을 자제하라는 연락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나는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정말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오늘은 괜찮나요?”라고 내가 물었다. 선장은 미소를 띠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떠날 시간이 다가올수록 가슴이 방망이질했다. 나는 파도가 세지 않은지 호수의 먼 곳을 바라보았다. 파도가 보이긴 했지만, 배들이 다니는 걸로 봐서 어제보다는 파도가 덜한 모양이었다. 나는 돌아가는 세 시간 내내 배 앞쪽에 앉아있었다. 전날보다 약한 파도가 쳐서 배가 흔들렸다. 앞쪽에 앉으면 배의 흔들림이 덜 느껴졌다.
그 후로 나는 지금까지 절대 배를 타지 않는다. 강에서 잠시 유람선을 탈 때조차 긴장한다. 먼바다에 배를 타고 나가는 건 상상할 수조차 없다. 그때 나는 내가 좀 비정상이라는 생각을 했다. 배에 있던 사람 중에서 왜 나만 그렇게 극심한 공포를 느꼈을까. 그 이유가 뭔지 알 수 없었다. 그 이후로도 나는 공포증이라는 정체 모를 괴물과 계속 마주쳐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