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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지킴이 Jul 19. 2024

성 안토니우스의 가르침

제 1장 편지와 말씀

1. 일을 시작한 후 나약해지지 말고 수고하면서 낙심하지 말고 ‘우리는 이미 오랜 시간 동안 수행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매일 하루를 시작하면서 더욱 열심히 수행합시다. 모두에게 이런 마음 씀씀이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미래의 시간과 비교하면 인간의 삶 전체란 매우 짧은 것이며 우리의 모든 것은 영원한 삶 앞에서 아무것도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물건이 가치에 따라서 팔리고, 모든 것은 동등한 가치를 지닌 것과 교환되지만 영생의 약속은 훨씬 적은 것을 주고 사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저희의 햇수는 칠십 년 근력이 좋으면 팔십 년. 그 가운데 자랑거리라 해도 고생과 고통이며 어느새 지나쳐 버리니, 저희는 나는 듯 사라집니다.”(시편 90:10)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평생 80년 혹은 심지어 100년을 수행한다 해도 우리는 꼭 백 년만큼만 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게다가 지상에서 수행한 것에 대해 이 땅에서 하느님의 유산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천국의 언약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썩어질 육체를 벗고 나면 우리에게 썩지 않을 육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말고 마치 우리가 오랫동안 수행을 했다거나 혹은 위대한 일을 했다고 생각하지 맙시다.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로마 8:18)     

2. 또한, 세상을 바라보며 마치 우리가 무언가 대단한 것을 버린 것처럼 생각하지 맙시다. 왜냐하면, 이 땅 전체는 온전한 하늘 앞에서는 매우 작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온 땅의 주인이었다가 그것을 버렸다 해도 이것 역시 하느님 나라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하찮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황금 백 드라크마를 얻기 위해서 구리 일 드라크마를 버린 사람처럼 온 땅의 주인으로 있다가 그것을 버리는 사람도 많은 것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백배나 더 많이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온 땅이 하늘과 비교될 수 없는 것이라면, 네 다섯 데샤찌나의 땅을 버린 사람은 마치 아무것도 버리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만일 그 사람이 그 외에도 집과 많은 황금까지 버렸다 해도 자랑하거나 낙담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식으로 생각해 봅시다. 만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선행을 위해서 내어놓지 않더라도 나중에 죽을 때는 어떤 식으로든 그것을 놓고 떠나게 될 것입니다. 코헬렛서(코헬 4:8)서의 기록처럼 우리는 종종 우리가 원치 않는 이에게 자신의 소유를 남기고 가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느님 나라의 유산을 받기 위해 선행을 베풀지 않을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3. 이러한 이유로 우리 중 그 누구도 무엇인가를 얻으려는 욕구를 마음속에 품지 말아야 합니다. 가지고 갈 수도 없는 것을 얻는다고 우리에게 아무런 이득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분별, 공의, 순결, 용기, 배려, 사랑, 가난한 이웃 돌보기,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화내지 않기, 나그네 사랑하기 등과 같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을 더 얻기 위해 왜 노력하지 않습니까? 이런 선행을 쌓아간다면, 그러한 행동들이 우리보다 먼저 가서 온유한 이들의 땅에서 우리를 위한 안식처를 준비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4. 모든 사람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낙심하지 않도록 스스로 다짐합시다. 주님의 종임을 고백하며 주님을 위한 일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어떻게 종이 “어제 내가 일을 했으니 오늘은 일을 하지 않겠다.”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지나간 노동시간을 계산한다고 해도 종은 다음 날 일하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대로 그는 자기 주인을 즐겁게 하고 또 가난해지지 않기 위해서 매일 열심히 일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루를 나태하게 지내면 주님께서는 지난날 우리가 수고한 것 때문에 우리를 용서해 주지 않으시고 그날 태만했던 것에 대해 분노하신다는 것을 알고 매일 인내하며 노력합시다. 우리는 예언자 에제키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을 들었습니다. “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면, 그것 때문에 죽을 것이다. 자기가 저지른 불의 때문에 죽는 것이다.”(에제 18:26) 이렇듯 유다는 지난날 그가 애썼던 모든 것을 하룻밤에 망쳐버리고 말았습니다.     

5. 이처럼 수행의 삶을 시작하였으면 낙심하지 맙시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8)는 말씀과 같이 하느님만을 바라보고 따르는 삶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의 협력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서, 즉 우리가 소심해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도 성 바오로의 말씀, 즉 “나는 날마다 죽음을 마주하고 있습니다.”(1코린 15:31)라는 의미심장한 말씀을 마음속에 지녀야 합니다. 왜냐하면, 매일 죽는 사람처럼 우리가 살아간다면 우리는 죄를 짓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매일 일어나면서 우리가 저녁까지 살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또 잠자리에 들려고 할 때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본질상 우리는 삶의 경계가 어디까지인지 알 수가 없고 하느님의 섭리가 우리의 삶을 매일 어느 분량만큼 정해줄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매일 그렇게 살아간다면 우리는 죄를 짓지도, 무엇에 대한 정욕에 사로잡히지도, 타인에 대한 분노로 불타오르지도 않고 이 땅에 자신의 보물을 쌓아두려고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매일 죽음을 예상하고 있는 사람처럼 우리는 욕심을 부리지 않게 되고 모든 이의 모든 허물을 용서하게 될 것입니다. 여자에 대한 정욕이나 혹은 다른 어떤 더러운 만족에 한순간도 사로잡히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심판의 날을 바라보면서 임종 직전에 사투를 벌이는 사람처럼 어떠한 쾌락도 한순간에 지나가 버릴 것으로 즉시 외면하게 될 것입니다. 지옥의 고통에 대한 큰 두려움과 근심이 쾌락의 즐거움을 없애버리면서 파멸로 기울어가는 영혼을 회복시켜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6. 이처럼 구원의 일을 시작하고 또 선행의 길로 이미 들어선 우리는 앞에 있는 것을 얻기 위하여 더욱 달려갑시다. (필리 3:14) 그리고 마치 롯의 아내처럼 뒤를 돌아보지 말고 더욱 앞으로 달려 나갑시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강조하며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2). 뒤를 돌아본다는 것은 다름 아닌 세상을 떠나온 것을 후회한다는 것이며, 다시 세상의 것을 지혜로운 것이라고 여기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7. 선행에 대해 듣고 두려워하지 말고 그 명칭에 놀라지도 맙시다. 왜냐하면, 그러한 일은 우리에게서 멀리 있거나 우리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원하기만 한다면 그 일은 우리에게 감당할만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인들은 학문을 배우기 위해서 다른 나라로 가고 바다를 건너 항해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나라를 찾으려고 다른 나라로 갈 필요도 없고 선행을 하기 위해서 바다를 건너 항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 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가 세상을 돌아다니지 않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행을 하기 위해서는 단지 우리의 결심만이 필요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우리 마음속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지혜로운 영이 정상적인 곳에 있으면 그 즉시 우리 내부에 선행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은 창조된 상태, 즉 선과 정의로 창조된 상태로 존재하면 정상적인 곳에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계명을 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러면 이제 너희 가운데에 있는 낯선 신들을 치워 버리고,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 마음을 기울여라.”(여호 24:23) 그리고 세례자 요한도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마태 3:3) 고 말했습니다. 영의 분별력이 자연스러운 상태에 있으면 영혼은 올바르게 됩니다. 영혼이 다른 길로 빗나가고 본성이 요구하는 질서를 왜곡할 때, 그것을 영혼 속에 있는 악이라고 부릅니다. 이처럼 선행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창조된 상태로 있으면 우리는 선행을 하는 상태에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악한 일을 계획하면 우리는 악인이라고 불리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선행을 하는 것이 외부에서 무엇인가를 빌려와서 하는 일이라면 물론 그것은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우리 내부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저 악한 생각에서 자신을 지키고 자신의 영혼을 주님께로 받은 것으로 여기며 주님을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주님은 우리의 영혼이 주님께서 창조하신 상태 그대로 있는 것을 보시고, 우리 영혼을 자기 피조물로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8. 분노가 우리를 괴롭히고 음욕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자기 자신과 싸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분노는 하느님의 의로움을 실현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욕망은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다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야고 1:20, 15) 라고 성경에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네 마음을 지켜라. 거기에서 생명의 샘이 흘러나온다.”(잠언 4:23) 라고 기록된 말씀처럼 그런 삶을 살면서 굳건하게 깨어 있도록 합시다. 왜냐하면, 우리는 무섭고 매우 사악한 원수와 악한 귀신들을 상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9. 사도 성 바오로가 “우리의 전투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권력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령들입니다.”(에페 6:12) 라고 말했듯이 우리에게는 악한 영들과의 싸움이 존재합니다. 공중에 존재하면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들은 거대한 무리입니다. 게다가 이들은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습니다. 그들 사이에도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그들의 본질과 차이에 대해서 말하자면 매우 길어질 것이므로 이에 관해서는 우리보다 높은 분이 말해주는 것이 더 적절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를 적대하는 그들의 간계가 무엇인지를 지체하지 않고 알아낼 필요가 있습니다.     

10. 첫째, 우리는 악마들이 악한 상태로 창조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악한 것은 하나도 창조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선한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늘의 지혜를 버리고 내려와서 이 땅의 주변을 맴돌면서 환영(幻影)으로 헬라인들을 미혹시켰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질투하면서 자신들이 내려온 그곳으로 우리가 들어가지 못하게 하려고, 우리가 하늘에 올라가는 것을 방해하기를 원하면서 모든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영들을 식별하는 은사”(1코린 12:10)를 성령으로부터 받고 나서 악령들에 대해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 중에 어떤 것이 덜 악하고 어떤 것이 더 악한지, 그들 중에 어떤 악마가 어떤 일에 관심이 있는지, 그리고 그들 중에 어떤 악마의 지위를 박탈시켜서 쫓아낼 수 있는지를 분별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악마들의 간계는 기묘하고 중상하는 술책도 교활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사탄에게 속아 넘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의도를 잘 알고 있습니다.”(2코린 2:11) 라고 말씀하신 사도 성 바오로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이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악마에 의해 어떤 유혹을 받고 있는지 서로 경고해주어야 합니다. 저도 부분적으로 악마들의 간계에 시험을 당했기 때문에 마치 자녀들을 가르치듯이 여러분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1. 악마들은 모든 그리스도인, 그중에 특히 꾸준히 수행하고 영적으로 성장하는 수도사를 발견하면, 무엇보다 먼저 계략을 꾸며서 그들을 유혹의 길로 가도록 합니다. 이들의 유혹은 악한 계교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불어넣는 생각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기도와 금식과 주님에 대한 믿음으로 즉시 악마들을 쫓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쫓겨나서 불안해진 악마들은 다시 중상과 간교한 일에 즉시 착수합니다. 더러운 열망으로 우리 마음을 유혹하지 못하면 그들은 다른 방식으로 다시 공격합니다. 여러 가지 환영(幻影)을 만들어내어 겁을 주거나, 여인이나 기어 다니는 짐승, 거인, 수많은 군대의 모습으로 변형하여 나타나는 등 다양한 방식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그런 환영을 보고 겁을 먹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즉시 믿음과 성호로 자신을 보호하기만 하면 그들은 곧바로 사라져 버리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악마들은 뻔뻔하고 매우 염치가 없습니다. 만일 이 일에 실패하면 다른 방식으로 다시 공격합니다. 그들은 예언자의 모습으로 변장한 채 며칠 후의 일을 예언하기도 하고, 생각으로 미혹시킬 수 없는 사람을 만나면 환영으로라도 붙잡기 위해서 존귀한 자의 모습으로 그의 앞에 나타납니다. 우리는 낯선 악마의 말을 듣지 맙시다. 기도하는 중에 악마들이 우리를 충동질하고 심지어 금식하는 중에 우리에게 말을 건다고 해도 듣지 맙시다. 모든 일을 교활하게 처리하는 악마들에게 속아 넘어가지 맙시다. 그들이 우리를 공격하며 죽이겠다고 위협해도 두려워하지 맙시다. 그들은 협박하는 것 외에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12. 육신의 달콤함에 영혼이 미혹되지 않고 육신을 영혼에 가까이 따르게 하기 위해서 육신보다 영혼에 더 마음을 써야 합니다. 육체를 배려하는 데 짧은 시간을 사용하고 다른 모든 시간은 영혼을 배려하는 데 사용해서 반드시 영혼의 유익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고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마태 6:25) 그리고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고 찾지 마라. 염려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이 세상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너희의 아버지께서는 이것들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오히려 너희는 그분의 나라를 찾아라. 그러면 이것들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루카 12:29-31) 라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전하신 말씀의 뜻이 바로 이것입니다.     

13. 주님을 믿고 그분을 사랑하십시오. “배부르게 먹는 유혹에 지지 말라.”(잠언 24:15) 는 말씀처럼 육체의 만족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또 더러운 생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십시오. 허영심을 버리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성경 속의 계명을 공부하고 취침 전과 후 시편을 노래하십시오. 그리고 성인들이 보여주었던 하느님에 대한 열정과 사랑으로 여러분의 영혼을 위한 모범이 되는 성인들의 행적을 늘 마음에 기억하십시오. 특히 “화가 나더라도 죄는 짓지 마십시오. 해가 질 때까지 노여움을 품고 있지 마십시오.”(에페 4:26) 라고 하신 사도 성 바오로의 가르침을 기억하도록 노력하십시오. 그리고 해 질 때까지 분노뿐만 아니라 다른 죄도 해결해야 한다는 점에서 이 말씀을 모든 계명과 관련된 말씀으로 여기십시오. 낮에 행한 우리의 잘못을 해가 비난할 일이 없고 밤에 행한 죄악과 악한 생각마저도 달이 비난할 일이 없는 것은 좋은 것이며 마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14. 이런 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기가 믿음 안에 살고 있는지 여러분 스스로 따져 보십시오.”(2코린 13:5) 라고 하신 사도 성 바오로의 말씀을 듣고 마음속에 새기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므로 각 사람이 매일 낮과 밤의 자신의 행적에 대해 점수를 매겨보도록 해보십시오. 그리고 만일 죄를 지었으면 죄짓는 일을 멈추고 죄를 짓지 않았으면 그것을 자랑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선을 행하고 태만에 몸을 맡기지 마십시오. 은밀한 것을 주의 깊게 보시는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1코린 4:5) 이웃을 판단하지 말고 자신을 의인이라 여기지 마십시오. 우리가 행하는 일을 우리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한다고 해도 주님은 모든 것을 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판단을 맡긴다면 우리는 서로를 불쌍히 여기게 되고 또 “서로 남의 짐을 져”(갈라 6:2) 주게 되며, 자기 자신을 엄하게 꾸짖으면서 부족한 부분을 채우려고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15. 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이 행하도록 합시다. 각 사람이 자기 행동과 영적 감동들에 관해서 마치 서로에게 알리려는 의도를 가진 것처럼 의견을 말하고 기록해 보십시오. 알려지는 것이 부끄러워서라도 죄를 짓는 것과 생각으로라도 무언가 나쁜 것을 품는 것을 중단합시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 다른 사람들이 보는 것을 원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죄를 짓고 나서 그것을 숨기기 위해서 차라리 거짓말이라도 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서로를 관찰할 때는 음란하게 행하지 않듯이, 만일 서로에게 알리려는 의도를 가지고 자기 생각을 기록하게 된다면, 알려지는 것이 부끄러워서라도 더러운 생각에서 벗어나도록 자신을 살피는 게 더 쉬울 것입니다. 결국, 이런 기록은 우리 동료 수행자들의 시선을 대신하게 될 것입니다. 기록하면서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볼 때 갖게 되는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으므로 우리는 생각으로라도 악한 것을 품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런 방식으로 자기를 깨끗이 한다면 자신의 육신을 복종시키고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원수의 올무를 짓밟아 버릴 수 있는 상태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16. 온전히 하느님만을 따르기로 마음먹고 수행 초기부터 굳게 서서 싸움에서 이길 때까지 절대로 원수에게 자리를 내어 주지 않겠다고 마음을 정한 사람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성령의 은혜를 더 빨리 충만하게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수행자들을 부르신 성령은 처음에는 그들이 참회의 수행에 들어가는 것을 위로하시기 위해서 모든 상황을 편하게 해 주시지만, 나중에는 모든 진리 가운데 노력을 다해야 하는 수행의 어려운 길을 그들에게 보여주십니다. 모든 일에서 그들을 도와주시면서 성령께서는 그들이 어떤 참회의 수행을 해야 하는지를 마음에 새겨주십니다. 그리고 자신의 창조주인 하느님께 온전히 향할 때까지 육체와 마찬가지로 영혼에도 이루어야 할 한도와 모습을 결정해주십니다. 그들의 몸과 영혼이 똑같이 거룩해진 후에 영원한 생명의 기업을 받을 만한 자격을 갖출 수 있도록 성령은 수행자들에게 몸과 영혼의 수고를 끊임없이 촉구합니다. 몸의 수고는 지속적인 금식과 노동 그리고 꾸준히 밤샘 기도를 하는 것이며, 영혼의 수고는 몸으로 하는 모든 봉사와 노동에 수반되는 영적인 훈련에 매진하는 것입니다. 이 일에 열매 맺기를 원한다면, 몸으로 행하는 모든 일을 수행할 때 어떤 일에도 태만하지 않고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성실히 노력해야 합니다.      

17. 참회자를 수행으로 부르신 성령은 그를 인도하시면서 위로하시고 그가 뒤돌아서지 않고 이 세상의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도록 가르치십니다. 이를 위해 성령은 그에게 영혼의 눈을 열어주시고 참회의 노동을 통해서 얻어지는 순결함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이를 통해서 성령은 몸과 영혼이 모두 깨끗해지도록 온전히 성화시키고자 하는 열성에 불을 지펴주십니다. 몸과 영혼을 온전히 깨끗하게 하여 원수의 것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도록, 원수의 질투 때문에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모든 것들을 다 근절한 이후에 수행자의 몸과 영혼을 타락 이전에 존재했던 처음 상태로 이끌어가는 것이 성령의 이끄심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때에야 “나는 내 몸을 단련하여 복종시킵니다.” (1코린 9:27) 라는 사도 성 바오로의 본을 받아서 성령으로부터 계속해서 가르침을 받으면서 먹을 때나 일할 때나 잠을 잘 때나 다른 무엇을 할 때도 언제나 엄격하게 몸을 지배하는 이성의 명령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18. 몸속에는 세 종류의 신체적 움직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첫 번째는 타고난 자연스러운 움직임인데, 이것은 영혼의 동의 없이는 아무 일도 행하지 않고(양심을 괴롭히는 죄를 짓거나 하는) 단지 그것이 몸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게만 하는 움직임입니다. 두 번째 움직임은 음식과 음료를 지나치게 많이 섭취해서 발생하는 움직임입니다. 이런 움직임이 만들어질 때는 몸속에 있는 피의 열기가 영혼을 거슬러 전쟁을 일으키고 영혼을 더러운 음욕으로 기울어지게 만듭니다. 그래서 사도 성 바오로는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도 복음서에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계명을 주셨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루카 21:34) 수도사의 직분을 가지고 온전한 거룩함과 순결함을 얻기를 열렬히 바라는 사람들은 사도 성 바오로처럼 “나는 내 몸을 단련하여 복종시킵니다.”(1코린 9:27) 라고 말할 수 있도록 항상 자신을 잘 지켜야만 합니다. 세 번째 움직임은 악한 영에게서 오는 움직임입니다. 질투심을 가진 악한 영은 이러한 움직임을 통해서 순결함을 추구하여 수도사가 된 사람들을 시험하고 나약하게 하거나 옆길로 빠지게 하는 음모를 꾸밉니다.      

19.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에 흔들림 없이 충실하고 인내심으로 무장되어 있다면, 성령은 악한 움직임들로부터 몸과 영혼을 어떻게 깨끗이 할 수 있을지를 이성을 통해서 그에게 가르치십니다. 만일 그가 자신이 들었던 계명과 명령에 대해 스스로 태만한 마음을 허용해서 나약해진다면, 악령들은 그를 자기의 것으로 만들기 시작하고 몸의 모든 지체에 들어앉습니다. 악령들은 지친 영혼이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고 절망 속에서 어디에서 도움이 오는지 보지도 못할 정도로 그를 더럽히기 시작합니다. 그때야 미몽에서 깨어난 이의 영혼은 다시금 하느님 계명의 편에 서게 되고 그 짐을 받아들이고(혹은 의무의 힘을 인식하고) 성령께 자신을 맡깁니다. 그러면 그의 영혼은 다시 구원의 열망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그때에야 영혼은 오직 하느님 안에서만 안식을 찾아야만 하며 영혼의 평안은 그런 방식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20. 완전한 순결함을 추구하면서 영혼과 몸 모두 똑같이 참회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성이 은혜를 얻어 자기연민과 관용 없이 정욕과의 싸움에 돌입하면, 성령이 생각을 불어넣어 주시고 지시하시며 힘을 북돋워 주십니다. 이성은 성령의 도움으로 마음의 음욕에서 나오는 모든 더러운 공격을 자신의 영혼에서 성공적으로 물리치기 시작합니다. 인간의 영과 결합한 성령은 하느님이 지시하신 계명을 엄격하게 실천하는 결단력을 보고, 이성이 영혼으로부터 모든 정욕, 즉 육체에서 영혼으로 섞여 들어간 정욕과 육체와 독립되어 영혼에 내재한 정욕 모두를 몰아내도록 이끄십니다. 

  성령은 이성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질서 있게 몸을 유지할 수 있도록 가르칩니다. 눈은 순결함을 지니고 사물을 보며, 귀는 세속적인 것을 들으면서도 비방, 험담 그리고 욕설을 즐거워하지 않으며, 혀는 각각의 단어에 무게를 두면서 그 어떤 불결하고 정욕에 찬 대화에 끼어들지 않으며 오직 복된 것만을 말하고, 손은 기도 속에서 행하는 일, 관대한 베풂과 자비를 행하는 데 사용됩니다. 또한 배는 정도 이상으로 자신을 즐겁게 하는 탐심과 정욕을 허용하지 않으면서 단지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만 필요할 정도의 음식과 음료를 섭취하며, 발은 착한 행실로 섬기기 위한 곳을 향하면서 바르게 서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걷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온몸은 온갖 선에 익숙해지고 성령의 권위에 복종하면서 변화됩니다. 그래서 육체는 의인들이 부활할 때 받게 되는 영적 몸의 특징을 어느 정도 갖게 됩니다.     

21. 인간의 영혼은 교만, 시기, 질투, 분노, 우울 등 타고난 본질적 성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혼이 온 힘을 다해 자신을 하느님께 드리면 모든 것을 후히 주시는 하느님께서는 그 영혼에 진정한 회개의 은총을 주시며 영혼을 모든 정욕으로부터 깨끗하게 하셔서 정욕을 따르지 않고 그것을 극복할 힘을 주십니다. 또한 시험을 통해서 다시 우리를 자신의 것으로 약탈하려 하며 그 영혼 앞에 장애물을 설치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 원수들에게 승리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십니다. 만일 영혼이 회개를 가르치시는 성령을 향하여 선한 순종 가운데 굳건히 선다면,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궁핍함과 불편함으로(오랜 금식과 꾸준한 밤샘 기도로 하느님의 말씀을 배우며, 끊임없는 기도로 세속의 모든 즐거움을 멀리함으로, 깨끗한 마음으로 모든 이를 섬김으로, 영혼의 겸손함과 가난함 속에서) 수고하는 그 영혼을 불쌍히 여겨주십니다. 만일 그 영혼이 이 모든 일을 행함에 있어서 견고하게 서 있으면, 모든 것을 후히 주시는 하느님께서는 그 영혼을 자비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신 후에, 그 영혼을 모든 유혹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자비를 베푸셔서 모든 원수에게서 구해내십니다.     

22.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는 죄와 허물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기의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시고”(로마 8:32) 우리를 위해 내어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우리를 위해서 자신을 낮추셔서 우리의 영적 질병을 치유하셨고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이 위대한 하느님의 계획, 즉 말씀이신 하느님께서 죄를 제외하고 모든 점에서 우리와 비슷한 사람이 되셨다는 것을 잘 깨닫고 항상 마음속에 간직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청합니다. 이성을 부여받은 이들이 이것을 이성적으로 아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이 우리에게 오신 능력으로 죄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열성을 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섭리를 올바르게 누리는 이들은 하느님의 종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호칭도 여전히 온전한 것은 아닙니다. 온전한 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 것, 때가 되어 이루어지는 성화(聖化)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이 이미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 것에 가까워져 있고, 또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아보고 있음을 보시고는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요한 15:15)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들이 어떤 존재가 되었는지를 알았던 이들은 목소리를 높여서 “여러분은 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로마 8:15) 라고 말합니다. 죄를 거부할 각오가 완전하고도 철저하게 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구세주의 재림이 그의 심판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십시오. 그래서 성 시메온이 처음부터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루카2:34) 라고 말을 했던 것입니다. 또 그 후에 사도 성 바오로는 “우리는 멸망할 사람들에게는 죽음으로 이끄는 죽음의 향내고, 구원받을 사람들에게는 생명으로 이끄는 생명의 향내입니다.”(2코린 2:16) 라고 선언하기도 했습니다.     

23. 진리의 원수들은 끊임없이 진리를 없애버리기 위해 노력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하느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태초부터 항상 자기 피조물인 인간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온 마음으로 자신의 창조주에게 다가가는 사람에게 하느님은 어떻게 자신을 경외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들과 싸우고 있는 원수의 악의와 또한 육신의 정욕 때문에 영혼의 선한 갈망이 힘을 잃어버리고 사람들은 최초의 상태로 자신을 높이기 위해 죄에서 어떻게 벗어날지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본성과 사명에 따라서 그들에게 고유하게 주어진 것이 무엇인지조차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그때에도 하느님은 인간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기록된 율법을 통해 진실하게 하느님을 경외하는 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이 율법이 쓸모가 없어졌을 때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의 마음의 상처가 커져 단호한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을 아시고 유일한 우리의 의사이신 자기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기로 정하셨습니다.      

24.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에 굴복한 저는 이 시대를 바라보면서 기쁨과 한탄 그리고 애통함을 느끼곤 합니다. 우리 같은 많은 사람은 경건한 수도사의 옷을 입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 중 몇 사람들만이 온 마음으로 이 직분을 수행하고 주 예수께서 오셔서 이루신 구원받기에 합당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나는 이런 사람들을 보며 기뻐합니다. 어떤 이들은 서약의 능력을 경멸하고 육체의 뜻과 자신의 마음이 기우는 대로 행함으로써 주님께서 오신 것이 그들에게는 죄를 드러내는 것이 되었습니다. 나는 이런 사람들을 보며 한탄합니다. 어떤 이들은 온전히 하느님께 나아가는 수행 기간이 오래 걸린다는 생각에 마침내 낙담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경건한 옷을 벗어버리고 마치 말하는 것을 잊은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나는 이런 사람들을 보며 눈물을 흘립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이 그들에게는 정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25. 나는 온 힘을 다하여 여러분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여러분이 의지와 감정을 바르게 다스리고 또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루카 12:49) 하신 그 불을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속에 집어넣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26. 바람이 잔잔할 때는 바다의 모든 항해사가 자신을 높이 평가하고 자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람이 갑작스럽게 바뀌면 노련한 항해사의 기술이 드러나게 됩니다.


27. 주님을 두려워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 하느님의 종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처한 이 종의 신분은 단순한 종의 신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우리를 인도하는 의로운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사도들을 택하시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위임하셨습니다. 그들이 받은 계명은 우리가 모든 정욕을 통제하고 아름다운 섬김의 선을 행할 수 있도록 우리를 위해 아름다운 종됨의 직책을 정해놓았습니다. 우리가 은혜에 더 가까이 나아갈 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사도들에게 하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말씀하실 것입니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요한 15:15) 은혜에 다가간 사람들은 경험적으로 성령의 움직임을 알아차리고 자신이 영적으로 나아갈 길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것을 알고 이해한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부르짖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로마 8:15)


28. 만유의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은혜의 행위로써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어떻게 행동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지식을 위로부터 여러분에게 내려달라고 아버지 하느님의 은혜를 간구하며 밤낮으로 부르짖는 기도를 게을리하지 말고 낙심하지도 마십시오. 여러분을 하느님께 거룩한 희생 제물로 드리고 그분을 뵙기 위해서 “내 눈에 잠도, 내 눈가에 졸음도 허락하지 않으리라.”(시편 132:4) 왜냐하면 사도 성 바오로의 말씀처럼, “거룩해지지 않고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히브 12:14)이기 때문입니다. 


29. 모든 성인이 우리의 게으른 모습과 태만한 모습을 보신다면 슬퍼하고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흠 없이 온전하게 성장하는 것을 보신다면 기쁨과 즐거움 속에서 끊임없는 기도로 하느님께 우리를 위해서 중보할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성인들의 기도와 행동에 대해서 기뻐하셨던 것과 똑같이 우리의 선행을 기뻐하실 것이고 우리에게 온갖 은총의 선물을 아낌없이 주실 것입니다.


30. 본질적으로 물질이고 이 지상의 것인 육체에 대해서, 그리고 그 육체의 모든 움직임과 행위에 대해서 경계심을 갖지 않는 사람, 그리고 자신의 이성으로 만유의 아버지를 높이 찬양하지 않는 사람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를 행하는 사람의 노고에 감격하시면서 그의 내부에 있는 모든 정욕을 불태워 버리고 그의 이성을 온전하고 깨끗하게 만들 수 있는 보이지 않는 불을 그에게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그 속에 거하시고 그에게 마땅히 아버지를 경배하는 법을 가르치면서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물질적 육체를 즐거워하는 한 그때까지 우리는 하느님과 그의 천사들과 모든 성인에게 대적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들에게 간청합니다. 여러분의 삶과 여러분의 구원을 업신여기지 마시고 순간적 시간이 끝없는 여러분의 영원을 훔쳐가는 것을 허용하지 마시고 육체가 여러분에게서 말로 할 수 없는 무한한 빛의 나라를 빼앗아 가는 것을 허용하지 마십시오. 성인들이 행한 일을 선택하여 실천하기 위해 우리가 자유를 부여받았음에도 마치 포도주에 취하듯 정욕에 취해서 자신의 영혼을 고결하게 하지도 하늘의 영광을 추구하려고도 하지 않고, 또 성인들의 후계자가 되어서 그들과 함께 영원한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성인들의 행적을 본받고 그들의 발자취를 따르려 하지도 않는 것 때문에, 내 영혼은 진실로 당혹스럽고 내 영은 혼미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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