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J의 시선
5월 어버이날을 맞아 "아버지"라는 주제를 먼저 다루고 싶다는 생각에 이런저런 영화를 생각하던 중, 류승완 감독의 2005년 작 [주먹이 운다]를 떠올리게 되었다. 사실 개인적으로 이 영화가 감독의 필모그래피 가운데 가장 ‘덜 류승완스러운’ 작품에 해당한다고 생각하지만(2017년 작 [군함도]는… 그냥 우리 모두 없었던 일로 했으면 좋겠다) 자녀를 키우는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의 영향력 아래 어른으로 성장하는 자녀라는 두 입장을 동시에 다룬다는 점에서 이 주제와 잘 어울리는 영화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주먹이 운다]는 "강태식"(최민식)과 "유상환"(류승범)이라는 두 남자 주인공의 삶을 동시에 따라가며 진행되는 영화이다. 중년의 강태식은 한때 아시안 게임 은메달리스트로 명성을 떨치며 나름 ‘잘 나가던’ 복서였지만 현재는 도박 빚과 사업 실패로 전 재산을 압류 당한 암담한 처지이다. 아내와 갈등을 겪던 태식은 결국 예전 자신에게 사기를 친 전력이 있는 후배 "원태"(임원희)가 제공한 허름한 옥탑방을 구해 가족과 떨어져 살며, 거리 한복판에서 돈을 받고 매를 맞아 주는 "인간 샌드백"이 된다. 근처에서 우동집을 하는 "상철"(천호진)이 밥을 챙겨 주며 '장사 밑천'인 권투 용품 가방을 가게에 두고 다니도록 배려하는 등 타인의 따뜻한 호의도 경험하고 나름 입소문이 돌아 ‘손님’이 늘기도 하지만, 원태가 다시 한 번 태식의 돈을 훔쳐 도망가면서 희망을 향해 나아가는 듯 보이던 상황은 또다시 진창으로 처박힌다. 그런 중에 원태가 밀어붙여 성사되었던 방송 출연으로 빚쟁이들이 태식을 찾아 몰려드는 난국까지 여기에 가세한다.
이 같은 상황에서 태식과 가족 사이의 갈등도 점차 심화되는데, 아들 "서진"에게서 "아빠와 함께하는 수업"에 대한 가정통신문을 전달 받고 아들의 학교를 방문했던 태식은, 오랜 복서 생활의 후유증으로 흐려진 시력 때문에 준비해 간 내용을 제대로 읽지 못한 채, 초등학생들에게 공부해 봤자 아무 소용 없다는 식의 헛소리를 늘어놓으며 반 친구들 앞에서 아들을 망신시킨다. 이 일로 실망한 서진에게 도리어 화를 내던 그는 결국 아내로부터 이혼 요구를 받고, 신체적 이상 증상으로 찾아간 병원에서는 설상가상 "손상성 치매"라는 판정까지 받는다. 망연자실한 상태로 지하철 역에서 노숙을 하던 태식은 복싱 "신인왕전" 홍보 포스터를 보면서 출전을 결심하게 된다.
한편 유상환은 소위 동네의 ‘양아치’로, 자기처럼 ‘불량’한 친구들과 어울려 도둑질을 하고 싸움에 휘말리는 등 혼자 아들을 키우며 연로한 어머니까지 부양 중인 아버지(기주봉)를 속 썩이는 문제아이다. 잦은 패싸움 끝에 경찰서에 끌려가게 된 상환은, 합의금을 구해야 하는 입장에서 동네 ‘일수꾼’을 상대로 강도질을 시도하다 뜻하지 않게 그를 살해하며 경찰에 체포된다. 징역 5년을 선고 받고 교도소에 수감된 후에도 자신의 ‘성깔’을 이기지 못해 다른 재소자와 싸움을 벌이는 그지만, 이 과정에서 상환의 남다른(?) 독기와 울분을 유심히 지켜본 교도주임(안길강) 덕분으로 교도소 권투부에 합류하게 된다.
권투의 기본과 규칙을 전혀 모르는 채 난동만 부리던 상환이 점점 권투부 활동에 열심히 임하게 되면서 지금껏 자신을 다스리던 분노와 억울함, 아버지에 대한 해묵은 감정들도 천천히 풀려 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공사장에서 노동일을 하던 아버지가 갑작스러운 사고로 사망하고, 손자에 이어 아들까지 잃은 상환의 할머니가 충격으로 쓰러졌다는 소식이 연달아 그의 귀에 들려 온다. 교도주임의 배려로 입원한 할머니를 찾아갔다가 정신이 온전치 않으신 모습을 보며 오열하던 상환은, 교도소로 돌아온 뒤 태식과 마찬가지로 "신인왕전"에 출전할 것을 결심하게 된다.
조금 개인적인 감상을 밝히자면 사실 나는 이 영화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작품 자체의 완성도에 대한 비판을 하려는 뜻은 아니다). 그에 대한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겠는데, 일단 첫 번째는 이 작품이 류승완 감독 특유의 통통 튀는 대사와 유쾌하고 기발한, 어딘가 살짝 비틀린 전개 대신 상당히 관습적인 흐름을 따르는 면이 있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감독이나 작품 자체의 잘못이라기보다 복싱이라는 ‘통제된 야만’을 통해 자아실현을 이루는 남성 중심 서사 권투 영화들에 내재된, 어쩔 수 없는 장르적 한계에 기인한다고 해야 옳겠다. 말하자면 이런 종류의 영화에서는 주인공이 자신의 육체와 건강, 심지어 생명까지 담보로 하며 링에 올라야 하는 명분과 맥락이 반드시 필요하고, 그것들 대부분은 주인공이 처한 절망적 상황에서 비롯되기 마련인 것이다. 합법적 폭력과 학대, 즉 ‘때리고 맞는’ 스포츠에 절박하게 매달려야 하는 인물들을 그리기 위해서는 경제적 몰락이나 정서적, 사회적 파멸 같은 요소들을 서술적 도구로 삼아 ‘복싱 말고는 대안이 없는’ 상황을 설정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신파적 클리셰와 상투적 전개를 완전히 피하는 일은 사실상 어려울 수밖에 없다.
두번째 이유는 아마도 내가 이 영화를 - 특히 ‘강태식’의 서사를 - 객관적인 관객으로보다는 ‘자식’의 입장에서 보게 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초반에 언급했듯 이 작품의 두 주인공인 태식과 상환은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그들의 위치 혹은 역할로도 구분되는 배역인데, 여러 가지 난관을 겪은 후의 상환이 마침내 ‘자식’으로서 옳은 길을 걷게 되는 것과 달리 태식은 여전히 ‘아버지’로서 자기 자리를 제대로 찾지 못하는 듯 보인다. 최민식 배우의 지나치게(?) 뛰어난 연기력 때문에 "강태식"이라는 ‘실감 나는’ 인물이 비호감으로 느껴지는 측면도 없지 않고 말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태식의 서사는 영화 [신데렐라 맨]의 주인공 "제임스 브래독"의 그것과 상당히 유사하다. 두 인물 모두 과거에는 꽤 성공적인 복서였으나 이후 거듭된 현실적 고난으로 가족에게 경제적 안정을 제공해야 할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잃게 된다는 공통점이 있는 데다, 그럼에도 두 사람 모두 결국은 권투를 통해 재기를 꿈꾼다는 사실 역시 닮아 있기 때문이다. [신데렐라 맨]의 브래독이 가족을 위해 수치심을 무릅쓰고 과거의 동료들을 찾아가 도움을 구걸했던 장면 또한, 이 영화에서 태식이 가족을 위해 자기 자신을 "인간 샌드백"이라는 조롱과 화풀이의 대상으로 희화화시키는 내용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겠다.
다만 이 작품의 "태식"이 "브래독"과 다른 점은, 브래독이 생계비를 번다는 개념에서의 ‘가장’ 자리는 잃었을 망정 가족들의 정서적, 감정적 구심점이라는 위치는 단 한 번도 포기하지 않았던 것에 반해, 태식은 경제적 어려움과 빛바랜 과거의 영광이라는 무게에 떠밀리며 가족들의 손을 그저 놓아 버린 것으로 보인다는 사실이다. 사회가 ‘가장’을, 더 정확하게는 ‘아버지’라는 역할을, 경제적 활동, 사회적 명예같이 일시적이고 불안정한 요인들에 고정시켰을 경우의 폐해를 증언하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태식은 여러 이유로 가족들을 경제적 어려움에 몰아넣지만, 그 모든 상황이 오롯이 태식의 잘못이나 책임으로 귀책되는 건 아니다. 실제로 태식의 아내는 재산이 압류 당한 막막한 상황으로 그에게 화를 내면서도 동시에 남편의 수작(?)을 못 이기는 척 받아들이는 등 태식과의 관계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는다. 아들 서진 또한 길거리에서 낯선 사람들에게 얻어맞고 사는 아버지를 창피해 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가정통신문을 건네며 학교에 와 주기를 요청한다. 서진의 학교에서 태식이 깽판(?)을 치고 나서야 서진은 아버지에의 실망을 표하고 아내는 이혼을 언급하는데, 이때의 문제도 태식이 맞춤법을 틀렸다거나 흐린 시력으로 수업 내용을 정확히 읽지 못했다는 등의 불가항력적 '무능'이 아니라, 최소한의 준비도 하지 않고 수업에 임한 뒤 자식의 입장과 체면은 고려하지 않은 채 본인 하고 싶은 말만 늘어놨다는 점인 것이다. 심지어 태식은 손상성 치매 판정을 받은 후에도 담배를 피우고 있다가 다시 자신을 찾아온 서진에게 화를 내고, 이 일은 아들을 위해 함께 그를 찾았던 아내가 그에게서 완전히 ‘정을 떼는’ 동기가 된다.
태식 또한 아버지이기 이전에 인간인지라 불완전하고 불완벽한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영화 속에서의 그는 이처럼 ‘좋은’ 아버지와 남편이 될 수 있는 기회를 - 경제, 사회적 위치와 별개로 - 여러 번 흘려보내 버리고 만다. 그의 실패나 부족함을 이유로 가족이 그를 거부하고 외면한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자기연민에 빠져 가족 곁의 자리를 직접 파괴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니까 태식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경제적 혹은 사회적 어려움)에 매몰되어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부분(가족과의 관계, 아들을 향한 사랑과 노력)까지 등한시함으로써 진정한 ‘가장’의 의무와 책임을 저버린 셈이다.
그래서인지 그가 신인왕전에 출전한 후 중년의 몸으로도 승리를 거듭하는 모습들이 개인적으로는 크게 와닿지 않았다. 태식이 복싱 대회에 출전을 결정한 이유 중에는 ‘아들에게 자랑스러운 아버지’가 되고 싶다는 소망도 분명 있었겠지만, 궁극적으론 자기 자신에게 무언가를 증명하려는, 가족과 미래를 모두 잃은 듯한 상황에서도 마지막으로나마 자신의 ‘건재함’을 스스로에게 확인시키려는 의도가 더 크다고 느껴져서였다. 아버지, 혹은 가장이라는 무게와 책임에서 벗어나 오롯이 개인으로서의 성취를 바라는 것이 잘못이라는 뜻이 아니라, 태식이라는 인물 자체가 본질적으로 가족보다는 ‘나’에게 더 집중되어 있는 사람으로 보인다는 말이다.
이번에 영화를 보며 흥미로웠던 점은, 그에 비교할 때 상환의 경우는 오히려 ‘좋은’ 자식의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영화 초반에서의 그는 넘치는 화와 분노를 이기지 못해 자신과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는 인물이었고, 이런 그의 미움과 원망은 자신의 아버지를 향해서도 조준되어 있었다. 이 인물의 과거가 작품 안에서 자세히 다루어지지는 않지만 상환의 가족이 살고 있는 현재의 형편을 보았을 때 그가 가난하고 ‘무능한’ 아버지에게 미숙한 원망을 품고 있다는 것은 충분히 유추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상환의 아버지는 경제적 부양자로서 전통적 ‘가장’의 임무에 실패했을지언정 아들의 도덕적, 감정적 기준이 되어야 할 진짜 ‘아버지’의 자리는 결코 잃지 않았다. 패싸움을 벌이다 경찰에게 잡힌 아들의 뺨을 치며 훈육하는 그는, 교도소에 수감된 아들이 면회를 거부하면서 자신을 향한 해묵은 미움을 표현해도 크림빵과 영양제, 편지를 전하며 서툴지만 간절한 사랑을 변함없이 표현한다. 돈이나 권력이 아닌 아버지의 투박한 진심이 상환의 마음을 열기 시작하고, 때이른 아버지의 죽음이 그를 본질적으로 변화시킨다. 통제되지 않은 분노로 방향성 없이 날뛰던 예전과 달리, 그를 도발하는 재소자 패거리와 맞서는 대신 자신에게 상처를 내는 방식으로 경고 메시지를 전할 만큼 스스로를 절제하게 된 상환은, 정신이 온전치 않은 할머니를 위해 휴가를 받겠다는 목표 하나로 신인왕전의 출전을 결심한다. 말하자면 상환은 자기 자신의 성공이나 만족감 때문이 아니라 가족을 위해, 지금껏 외면하고 거부해 왔던 의무와 책임을 다하려고 대회에 참가하는 것이다. 비록 상환의 아버지는 그의 곁을 떠났지만, 아버지의 사랑과 영향력을 깨닫고 자신의 책임을 감당하는 어른이 되고자 홀로서기를 시작함으로써, 상환은 아버지에게 ‘좋은’ 아들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영화의 마지막, 결승전에서 맞붙게 된 태식과 상환 중 결국 상환이 우승을 거머쥐는 장면은 적지 않은 의미와 상징을 갖는 듯하다. 이 우승이 상환에게 사랑의 유산을 남긴 아버지의 승리이기도 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는 점에서 말이다. 다행인 것은 아빠를 포기하지 않고 경기장으로 달려와 준 서진 덕분에 태식의 패배도 그렇게 씁쓸하게 다가오진 않는다는 점이었다. 세상적 명예를, 객관적 성취를 통해서만 자랑스러운 아버지가 될 수 있다고 믿는 듯한 그의 손에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음에도,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는 아들을 껴안으며 터뜨리는 태식의 웃음을 보면서, 결국 아들 서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었을까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엄마 C의 시선
“주먹이 운다”는 “다재다능”이라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감독 류승완이 연출과 각본을 맡고, “연기의 달인”이라 불려 크게 손색이 없을 두 남성 배우, 최민식과 류승범이 주연을 맡아 2005년 개봉되었던 한국 영화의 제목입니다. 칸 영화제 “감독주간”에 초청되어 “국제비평가협회상”을 수상했다는 사실에서도 유추되듯, 권투 선수 두 사람의 ‘복싱 인생’을 그리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스포츠 영화로 분류되기에는 무리가 있는 – 사실 저희의 영화 목록에서는 “예술 영화” 카테고리에 포함시켜 놓은 – 작품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작년 8월 포스팅했던 “아라한 장풍대작전”에서 감독 류승완, 배우 류승범과 저희의 인연(?)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었는데, 그로 인해 ‘특별한’ 애정과 친밀감을 느끼게 된 두 사람이 합을 이룬 데다가, 그의 연기력을 제가 진심으로 인정하는 배우 최민식이 출연한 작품이기도 한 만큼, 저에게는 개인적으로 적지 않은 의미를 갖는 영화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첫 장면부터 관객들을 무척 심란하게 할 뿐 아니라 내용이 진행될수록 보는 이의 마음을 퍽도 아프게 만드는 이 영화는, 운동복과 권투화를 어깨에 메고 터덜터덜 길을 걷던 한 중년 남성이 뒷골목 모퉁이에서 옷을 갈아 입은 뒤 번화한 길 구석에 앉아 우유 한 팩을 마시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는 거리 복판에서 덥석 큰절을 한 그는 메가폰을 입에 대고 자신을 “1990년 북경 아시안게임 은메달리스트, 강태식”이라고 소개하며, 여러분들(장사 안돼 짜증나는 사장님, 떼인 돈 못 받아 잠 안 오는 사모님, 애인한테 버림 받은 언니 오빠)의 울분과 스트레스를 한 방에 날릴 수 있도록 자신이 돈 ‘만원’에 “인간 샌드백”이 되어 주겠다고 광고합니다. 화면이 바뀌어 다른 쪽을 비추면 고급 차량의 오디오를 훔쳐 들고 나오려다 경찰에 발각되자 오토바이로 도주전을 펼치는 한 젊은 남성이 등장하지요. 그 자리에서는 운 좋게 경찰을 따돌렸지만 친구를 돕겠다고 패싸움을 벌이다가 결국 경찰에 체포된 그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경찰서 문을 나섭니다.
이처럼 교차편집으로 진행되는 두 이야기 속에서 ‘매 맞아 번 돈’으로 하루하루 먹고사는 40대 남성 “강태식”은, 도박 빚과 운영하던 공장의 화재로 집은 물론 가재도구에까지 압류가 들어오자, 아내와 아들은 처가로 보내고 자신은 주저앉기 직전의 옥탑방에서 지내며 스스로 ‘고안’한 방편을 생계 수단으로 삼기 위해 거리에 나섭니다. 하지만 벌이가 조금 되기 시작할 무렵, 사람들에게 얼굴이 알려지면 돈 벌기가 훨씬 쉬울 거라고 꼬드기는 후배(예전에도 그의 돈을 ‘갈취’한 적이 있는)가 주선했던 방송 출연의 여파로 태식의 거취를 파악하고 ‘직장’까지 찾아오는 빚쟁이들에게 매일 버는 돈을 그대로 빼앗기는 상황을 다시 맞게 되지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빠가 부끄럽다는 아들의 말과 생활고를 겪는 아내의 이혼 요구에까지 직면한 그는, 거리에 나선 첫날부터 자신을 챙겨 주던 – 너무 창피해서 말로도 못하고 “인간 샌드백이 되어 주겠다”고 쓴 종이를 들고만 있던 태식이 안쓰러웠던지 – 근처 국수집 사장에게도 호된 욕을 먹고 술에 취해 지하철에서 노숙을 하다 역내에 붙어 있던 “권투 신인왕전” 홍보 포스터를 우연히 보게 됩니다.
경찰서에서 자신을 빼내어 준 아버지로부터 “내 얼굴을 봐서 똑바로 살라고는 못하겠다. 그래도 네가 할머니를 봐서 그러면 안 되지”라는 말을 듣는 – 막노동하는 아버지가 따로 나가 있어 할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는 – 20대 청년 “유상환”은, 힘들게 벌어 모은 돈으로 합의금을 내주겠다는 아버지의 제의를 거절한 채 스스로 ‘문제 해결책’을 찾으려고 동네에서 현금 부자로 알려진 노인의 돈을 갈취하는 범행을 계획했다가, 우발적 살인을 저지르고 체포되어 교도소에 수감됩니다. 가진 거라곤 오기와 ‘성깔’뿐인 그를 권투부에 들어가도록 주선해 준 교도주임 덕분에 복싱을 시작하고 나서도 운동에 별 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하던 상환은, 공사장에서 불의의 사고로 숨진 아버지와 그로 인한 충격으로 병원에 입원한 할머니의 소식을 들은 후 어떻게든 외출이나 특박을 허락 받을 방법을 찾으면서 “신인왕전”에 출전해 타이틀을 따겠다는 강력한 동인을 얻게 됩니다.
흔히 화가 나거나 억울한 일이 있음에도 ‘주먹’으로 한 대 치고 싶은 욕구를 참아야 할 때 쓰는 “주먹이 운다”는 표현을 재치있게 비틀어 사용한 – “권투하는 사람(주먹)이 눈물을 흘린다(운다)”는 뜻으로 – 제목의 이 영화를 언제든 이 공간에서 한 번 다루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어버이날”을 즈음해 연관성 있는 주제의 한국 영화를 찾던 중 문득 이 작품을 떠올리게 된 데에는 주인공 두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의미가 큰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관계가 - 태식의 경우는 아버지로서 자기 아들과의, 그리고 상환의 경우에는 아들로서 아버지와의(또한 자신을 키워 주신 할머니와의) 관계가 - 이 영화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 주효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비록 가장으로서의 책임감, 경제적 능력 등에서 모두 낙제점을 받아 결국 새아버지에게 ‘빼앗겨야 할’ 상황에 놓인 아들임에도 그 어린 아들 앞에 최소한의 자긍심과 떳떳함으로 서고 싶은 “아버지” 태식, 그리고 경찰서에 있던 자신을 데리고 나와 국밥을 사 먹이고, 이후 자신이 교도소에 수감되자 ‘단 것’이 먹고 싶을 거라며 면회 신청 때 챙겨 온 아버지를 “불편하다”는 말로 그냥 돌려 보낸 데 대한 미안함을 되갚으려는 “아들” 상환의 이야기는, “어버이날”을 맞아 다루기에 부족함 없는 주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더불어 그들 주변의 마음 따뜻한 이웃들, 즉 본인이 건넨 꾸준한 진심에도 계속 정신 못 차리고 방황하는 태식에게 “이 세상에 사연 있는 사람, 너 하나뿐이 아니야”라는 정신 퍼뜩 날 말을 들려주던 국수집 사장이나, 독기를 잔뜩 품은 상현을 어떻게든 사람 만들어 보겠다고 권투를 가르쳐 온 교도주임과 박 사범 등은, 우리 사회에서 ‘어른’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 꼭 필요한 인물들의 전형으로 제시된 것이 아닐까 여겨지기도 합니다.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라는, 오래전 제가 즐겨 듣던 대중가요의 한 구절이 시사하듯, 자신도 언제든 이처럼 처절한 삶으로 전락할 수 있으리란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이런 류의 슬프고도 ‘구질구질한’ 영화에 진심으로 공감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영화 속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을 말해 달라는 질문에 신인왕전 우승 후 할머니와 껴안는 마지막 신을 꼽았다는(실제로도 자기 형제가 할머니 손에서 자랐음을 고백했던) 배우 류승범은 물론, 영화의 피날레를 장식하며 두 사람이 만나 벌이는 경기의 장면이 연출 없는 ‘진짜’ 시합으로 - “접근전,” “태식 우세,” “상환 우세” 정도의 방향 설정만 한 채 - 촬영되면서 경기 당시 독감으로 몸도 못 가눌 정도의 상태에서 촬영에 임하며 사투를 벌였다는 배우 최민식의 실제 상황 등에서 이 영화가 이끌어내는 공감력의 원인을 발견하게 되는 것과 다르지 않게 말이지요. 영화를 처음 관람했을 때 절박함에서 ‘우열’을 가릴 수 없을 그 둘의 경기를 보며 누구를 응원해야 할지 난감하기 그지 없었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면서 죽도록 매 맞아 돈을 벌어 놓으면 채 모이기도 전에 누군가가 와서 훔치고 빼앗아 가는 태식의 삶을 보고 있으면 “그들이 밀을 심어도 가시를 거둘 것이고 지치도록 일을 해도 얻는 것이 없을 것이다; 우리말성경 (They will sow wheat but reap thorns; they will wear themselves out but gain nothing),” “네가 씨를 뿌려도 추수하지 못할 것이며 올리브 열매를 밟아 짜도 기름을 얻지 못할 것이고 네가 포도를 밟아 짜도 포도주를 마시지 못할 것이다; 우리말성경 (You shall sow, but not reap; you shall tread olives, but not anoint yourselves with oil; you shall tread grapes, but not drink win; ESV)”라는 예레미야 12장 13절과 미가 6장 15절의 말씀이 절로 떠오릅니다. 기도만 하면 뭐든지 해결된다는 ‘태평한’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그와 반대로 하나님의 개입하심 없이 자신의 의지와 오기로만 버티려는 사람은 태식의 경우처럼 “밑빠진 독에 물 붓는” 삶(학 1:6)을 살 수밖에 없음도 명약관화합니다. 태식이 떳떳하고 당당한 아버지로서의 삶으로 방향을 돌린 일, 상환이 아버지와 할머니께 부끄럽지 않은 아들(손자)이 되기 위해 삶의 목표를 바르게 확립한 일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우리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과정”으로 볼 수 있음 역시 그런 이유입니다.
계속되는 타격으로 “손상성 치매” 판정을 받은 태식이나 장기간의 수감 때문에 군대도 갈 수 없는 “사회부적응자”의 낙인이 찍힌 상환과 같이, 막다른 골목 앞에, 더 이상 떨어질 곳도 없을 나락 앞에 서 있는 사람이라 해도, 스스로의 힘과 의지에 기대려는 노력이 아니라 진정으로 사랑하는 ‘누군가’를 생각하며 삶의 방향을 트는 이들에게는 여전히 희망이 존재합니다. 그런 절박한 이들이 향해 있는 ‘누군가’가 부디 하나님이었으면 하는 것이 타인의 삶에 관심이 많은 저의 기도이고 말이지요. 자신의 옥탑방에 와서 잠이 든 아들의 목에 소중히 간직해 온 은메달을 걸어 주며 “6라운드까지만 버티자”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던 태식의 대사에 근거했을, “링에서 6라운드를 버틴 사람은 누구나 웃을 자격이 있다”라는 한 영화평의 구절처럼, “매일매일 링에 오르는 우리 자신을 그린” 이 영화가 보는 이들에게 자기 본연의 모습, 하나님께서 처음 의도하신 삶의 자리로 되돌아가라는 메시지로 작용할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