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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득이: 숨어 있는 그들도 ‘꽃’으로 피어나기를

by Joanne


딸 J의 시선



이 영화의 주인공인 유아인 배우가 일으켰던 문제로 인해 그동안 다루기를 주저해 왔지만, 최근의 근황을 들어 보니 그의 출연작이 한국에서 개봉되었을 뿐 아니라 그가 남자배우상 후보에도 이름을 올렸다고 하여 이제는 이 사랑스러운 영화 “완득이”를 다루어도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사실 유아인이라는 배우 한 사람 때문에 영화평조차 쓰지 못하기에는 ‘아까운’ 작품이기도 하다). 외국인 근로자들에 대한 차별과 조롱 문제도 여전한 듯한 분위기라 그에 대한 경종의 의미가 될 수도 있을 듯하고 말이다. 함께 재미있게 보았던 영화라 엄마도 동의하신 것까지는 좋았는데 글을 준비하며 이 영화가 벌써 12년 전(!!!) 작품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얼마나 당황스러웠던지.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도완득"이라는 주인공의 삶에 렌즈를 들이댄다. 고등학교 2학년생 완득이(유아인)는 ‘카바레’에서 춤을 추고 호객 행위를 하며 생계를 꾸리는 장애인 아버지(박수영), 혈육은 아니지만 언젠가부터 함께 살게 된 지적장애인 "민구 삼촌(김영재)"으로 이뤄진 한부모가정에서 자란 아이다. 영화 속 대사 하나를 조금 변형하자면 완득이의 인생은 "비뚤어지기 위한 완벽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좁은 옥탑방에서 남자 셋이 살 수밖에 없을 정도의 가난, 장애인 가족, 고3 수험생 생활이 코앞으로 다가왔음에도 희망이라곤 보이지 않는 성적 등. 실제로도 아버지와 삼촌이 건달들에게 괴롭힘 당하는 장면을 목격하거나 무례한 이웃이 가족을 비하하는 말을 던질 때 완득이가 ‘눈이 돌아가’ 달려드는 모습을 보면, 아이의 아버지가 왜 그렇게 전전긍긍하며 아들의 '주먹질'을 걱정하는지 절로 이해가 간다. 영화의 초반 상황은 완득이가 아주 조금만 삐끗해도 크게 ‘엇나가기’ 쉬운, 외줄을 탄 것처럼 아슬아슬한 지점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관객들에게 보여 준다.



그런데 이 위태로운 상황에 불쑥 들어와 완득이의 혼을 쏙 빼놓는 불청객이 있다. 반 학생들에게 “똥주”라 불리는 완득이의 담임 이동주 선생(김윤석)으로, 학원에서 예습 복습 다 하고 오는 놈들에게 가르칠 게 뭐가 있겠냐며, 수업도 대충 때우고 자습 시간에 졸기나 하는 인물이다. 그런데 이렇게 건성건성 사는 듯한 사람이 이상하게 완득이에 대해서만은 집요하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위한 지급품인 햇반을 챙겨 가라고 급우들 앞에서 망신을 주지 않나, 그러고는 햇반 몇 개 내놓으라고 ‘삥 뜯질’ 않나, 수업 시간 내내 이름을 불러 대지 않나, 결국 땡땡이를 치려고 담을 넘는 것까지 기가 막힌 타이밍에 잡아내질 않나. 게다가 건너편 옥탑방에 사는 이웃인지라 하교 후에도 피할 수가 없다. 완득이 입장에서는 얼마나 괴로운지 동네 교회에 나가 하나님께 “제발 똥주 좀 죽여 주세요”라는 기도까지 하게 된다.


섬세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방식으로 완득이의 삶에 침입하는 동주 선생님은 심지어 완득이에게 너희 엄마는 필리핀 사람, 이라며 엄마라는 존재에 대한 생각조차 없었던 완득이의 삶에 고차원적 고민거리를 투척한다. 동네 교회를 통해 - 완득이가 선생님의 '사망'을 기도하는 바로 그 교회라는 점이 재미있다 - 외국인 노동자를 돕는 일을 하는 동주가 우연한 기회에 완득이의 어머니와 연락이 닿았다는 것인데, 안 그래도 복잡한 삶에 ‘외국인’ 어머니까지, 기가 찬 완득이는 이를 무시하려 하지만 동주로부터 아들의 소식을 듣고 찾아온 어머니와 결국 난생처음으로 마주하게 된다. 완득이는 혼란스러워 하면서도 어머니에게 천천히 마음을 열고, 그에게 끈질긴 관심을 쏟는 동주 선생님의 진심을 조금씩 받아들인다. 더불어 동네 지인의 소개로 시작한 킥복싱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삭막하고 위태롭게만 보이던 예전과 달리 밝고 희망 있는 자신의 길을 구축해 나간다.



영화를 다시 보며 맨 처음 들었던 생각부터 얘기하자면, 아무래도 ‘청춘’물, ‘성장’물이다 보니 그 장르에서 흔히 쓰이는 클리셰(cliché)들이 보이긴 한다는 점이다. 카바레에서 일하던 아버지가 ‘밤무대’의 쇠락으로 설 곳을 잃는 모습은 예전에 다뤘던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연상시키고, 소년과 청년의 경계선에 선 완득이가 처한 암울한 현실이나 킥복싱이라는 스포츠에 입문하는 설정은 [태양은 없다], [주먹이 운다], 혹은 [록키] 등의 영화와 비슷한 부분이 있다. 이 영화가(혹은 원작 소설이) 다른 작품을 모방했다는 게 아니라 이와 같은 ‘성장물’(어쩌면 ‘극복물’) 특유의 어떤 제약들이 내재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여담이기는 하지만 완득이가 힘든 현실을 벗어나 새로운 희망을 찾는 방법 중 하나가 킥복싱이라는 설정도 조금 씁쓸한 부분이다. 완득이 같은 상황에 처한 이들이 자신의 육체와 체력, 정확하게는 ‘맷집’을 재화로 쓰는 것 외엔 가난을 벗어날 방법이 많지 않다는 현실을 방증하는 요소가 아닐까 해서 말이다. 영화 속에서 킥복싱이라는 스포츠가, 또 완득이를 훈련시키는 관장님(안길강)이 아이에게 긍정적 영향을 주는 것과는 별개로 이 어린 학생마저 – 그것도 선생님의 전폭적 지지 아래 – 부모에게 대물림 된 가난을 탈출하는 방법으로 물리적 폭력에 기반을 둔 일을 선택하게 되었다는 점이 안타깝게 느껴진다. 결국은 때리고 맞는 직업이라는 점에서 미래의 가능성을 위해 자신의 건강을, 혹은 안전을 볼모로 잡힌 셈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그저 뻔한 청춘물, 젊은이의 고행 극복 서사로 전락하지 않는 이유가 몇 가지 있는데, 그 중 가장 큰 것이 캐릭터들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일단 주인공인 완득이가 꽤 신선하다. 남들이 보기엔 단순한 ‘문제아’나 ‘반항아’로 분류되기 쉽겠지만 알고 보면 좀 소심하고 어정쩡한 아이다. 사고를 치는 것도 누군가가 자기 가족을 건드릴 때뿐이고, 야단을 치는 아버지에게도 비교적 얌전하게 순종하며, 지적장애로 아이처럼 구는 삼촌이 애정 표현을 하면 배시시 웃으면서 다정하게 대한다. 걱정해 주는 건지 괴롭히는 건지 헷갈릴 정도로 들들 볶는 담임에게마저 짜증은 날지언정 고분고분 말을 잘 따른다. 힘들고 화가 나고 답답할 만도 한데 학교를 때려치거나 사고를 내는 대신 동네 교회에 가서 기도를 한다니. 심지어 담임선생을 죽여 달라는 기도도 그저 귀여운 심술로 들릴 뿐이다. 반항아라고 이름 붙이기엔 너무 어설픈 아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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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석 배우가 연기한 동주 선생님 또한 무척 매력적인 인물이다. 굉장히 현실적이면서도 동시에 아주 판타지적인 캐릭터라고 생각하는데, 뭔가 좀 구질구질하고 찌질하다가도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흔들리지 않는 대쪽 같은 신념을 보여 준다는 점이 그렇다. ‘교사’라는 꽤 번듯한 직업을 가졌고 돈 많은 아버지를 두었으면서도 굳이 가난한 동네에서 외국인 노동자, 소외된 계층들과 연대하며 살고 있다. 다른 교사라면 적당히 무시했을 ‘문제 학생'에게도 지극한 관심과 정성을 쏟으며 완득이와 아버지 대신 무례한 이웃과 싸워 주고, 때론 함께 술을 마시면서 완득이 아버지의 고민을 들어 주는 등 퇴근 후 '학부모 면담'도 마다하지 않는다. 어찌 보면 정의감이 의인화된 인물 같기도 하고. 그래서인지 약간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가 하는 행동이 그다지 대단한 것들은 아니다. 학생들에게 애정을 쏟고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는, 불평등과 부조리에 반해 목소리를 내는 것이 사실 교사로서는 당연한 일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사회에서 희귀할 뿐이지.


그렇지만 이번에 영화를 보면서는 완득이와 동주 선생님, 말하자면 이 작품의 투톱 주인공들보다 그 주변의 인물들에게 왠지 더 시선이 갔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완득이를 지탱하고 변화시킨 인물이 비단 동주 선생님‘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해야 옳겠다. 일단 완득이의 아버지가 그렇다. 장애인으로 멸시와 차별을 수도 없이 겪으며 살아왔겠지만, 세상에 분노하거나 그 울분을 털어 내는 방편으로 자식에게 화풀이하는 대신 아들을 소중히 여기고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당연하면서도 당연하지 않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완득이의 장래를 함께 걱정하며 선생님과 술을 마시다 잔뜩 취한 아버지가 완득이에게 업혀 가는 동안 우리 아들, 멋있다, 를 몇 번이나 반복하는 장면에선 꽤 울컥했는데 저런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가 ‘잘못될’ 리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와 동시에 완득이만 보면 반가워서 얼굴이 환해지는 민구 삼촌 또한 완득이에게 ‘엇나가선’ 안될 이유를 하나 더 만들어 줬다고 본다.


여기에 완득이 어머니(이자스민)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말도 안 통하는 타국으로, 그것도 여전히 장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남아 있는 한국 같은 나라의 장애인 남편에게 ‘시집 와서’ 오죽 힘들었을까마는 어린 자식을 두고 남편을 떠난 것만은 사실이니 완득이 입장에선 원망스럽고도 남는 존재일 것이다. 하지만 아들 앞에서 죄인처럼 구는 태도를 보고 있자면 그저 애틋하고 안쓰러운 마음만 들고, 자식에게 존댓말을 쓰며 쩔쩔매는 모습에서는 완득이가 어머니를 탓하는 대신 다정하게 대하기 위해,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유를 저절로 납득하게 된다. 라면을 먹으러 가자는 같은 반 친구에게 그런 건 친한 사이에서나 하는 일이라며 매몰차게 거절했던 완득이가 처음으로 찾아온 엄마에겐 라면 드시겠냐며 붙잡는 장면도 보는 이의 마음을 뭉클하게 한다.



이번에 영화를 감상하면서 특히 새롭게 느껴진 장면이 있는데, 완득이가 시장에서 엄마에게 구두를 선물하려 하자 오지랖 넒은 가게 주인이 둘의 관계를 묻는 부분이다. 몇 번이나 묻는 주인에게 완득이는 그녀가 자신의 어머니라고 답한다. 그가 드디어 엄마에게 마음을 열었음을 보여 주는 장면이기도 하지만, 이 짧은 대사가 생전 처음 완득이가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표현으로 나에게는 느껴졌다. 누군가를 자신의 어머니라고 소개하는 말은 동시에 자신이 누군가의 아들임을 밝히는 일도 될 것이다. 영화 내내 "완득아", 혹은 "얌마 도완득"으로 남들에게 ‘불리기만’ 했던 아이가 어머니라는 타인을 인정함으로써 그녀의 아들인 자신의 존재,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부르고 인정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대화 이후, 엉엉 우는 엄마를 품에 안고 환하게 웃는 완득이의 표정이 무척이나 인상 깊다. 아마도 자신이 사랑 받고 있다는 확신을 가진 사람의 표정이 바로 저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그렇게 보인 듯하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나'를 사랑하는 타인에게서 비롯된, 타인에 의해 성립되는 ‘나’의 정체성을 깨닫기 시작한 순간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내’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 내가 나를 이해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내가 ‘남’에게 어떤 존재인지 알게 되는 일일 테니 말이다. 다시 말해 내가 ‘나’를 이해하기 위해선 반드시 ‘남’이라는 존재가 필요할 터인데, 내가 타인에게 소중한 사람, ‘사랑 받는’ 사람이라는 - ‘상대적’ 정체성이라 볼 수 있을 -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이야말로 ‘나 자신’에 대한 독립적인 정체성을 구축해 나가는 과정의 시작이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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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에서 완득이는 그 뒤 모든 일에 어떤 ‘확신’과 안정감, 혹은 여유를 가지고 임한다. 관장님의 주선으로 마련된 다른 학생과의 킥복싱 매치에서 정말 먼지가 나도록 얻어터지면서도, 울컥 분해서 폭발했을 예전과는 달리 바닥에 대자로 뻗어서도 소리내며 밝게 웃는다. 친구 하나 없이 혼자 떠돌던 과거와 달리 다른 학생들과의 관계에도 변화가 생기며, 심지어 좋아하던 여자 아이와의 연애 사업까지 급진전한다. 항상 소극적이고 애매했던 예전보다 훨씬 자신감 있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관계가 개선되어 이웃들을 집에 초대했을 때는 전보다 쉽게 저희 삼촌이에요, 저희 어머니에요, 하고 가족을 소개하며 그들에게서 비롯된 자신의 정체성도 분명하게 드러내 보인다. 단순히 어머니와의 사이가 좋아졌기 때문에 완득이가 변한 것은 아니리라고 본다. ‘어머니로부터 사랑 받는 아들’이라는, 또 주변 사람들에게 소중한 존재라는 상대적인 정체성을 통해 ‘나 자신’에 대한 확신과 자신감도 자라나기 시작했기 때문 아닐까 싶다.


영화의 막이 내릴 즈음 완득이가 처한 경제적, 사회적 환경들은 별로 변한 게 없음에도 아이에 대해 그다지 걱정이 되지 않는 것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 삼촌, 동주 선생님 등 완득이에게 필요한 ‘남’이 충분히 곁에 있다는 안도감 때문이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소중한 존재’라는 상대적 정체성을 완득이에게 부여해 줄 수 있는 타인들 말이다. 조금 슬프게 여겨지는 것은 이 이야기에서 완득이가 스스로에 대해 확신과 안정감을 가지고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리 많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동시에, 이 정도의 기반이나 이만큼의 ‘남’조차 갖지 못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부표처럼 떠도는 삶을 살고 있다는 점이 안타깝게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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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득이가 자신을 사랑해 주고 정체성을 확신시켜 주는 ‘남’의 대부분을 만나는 매개체가 교회라는 점은 - 엄마도 교회를 통해 만나고, 동주 선생님과도 결국은 교회에서 관계가 더 깊어지기에 - 이 영화에게 고마운, 감동적인 부분이다. 다만 요즘의 교회, 혹은 믿는 자들이 얼마나 서로에게 ‘나’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남’이 되어 주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믿음의 공동체가 비슷한 환경, 유사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여 자신들의 믿음을 확산하고 그들만의 신념을 재생산하는, 사회 속의 소외된 사람들과는 아무 상관없는 ‘타자’로 전락하지 않기를 바란다. 위태롭게 떠도는 이들의 주변에 튼튼하게 뿌리를 딛고 서서 그들도 누군가에게 소중한, 사랑 받는 존재라는 확신을 줄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 ‘내’가 누구인지의 첫 깨달음, ‘나’에 대한 확신과 자신감을 주는 ‘남’이 될 수 있다면, 그런 타인은 '지옥'이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이 땅에서 천국을 누릴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이라고 믿는다.




엄마 C의 시선



영화 “완득이”는 소설가 김려령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2011년 개봉작으로, 2007년 제정되었던 “창비 청소년 문학상”의 제 1회 수상작인 원작은 70만부 이상의 판매 실적을 올린 베스트셀러라고 합니다. 같은 작가의 소설인 “우아한 거짓말” 역시 영화화(2013년)했고 휴먼 드라마 “증인”을 발표(2019년)하기도 했던 이한 감독은 누적 관객수 500만 이상이라는, 같은 해 개봉작 중 네 번째의 흥행 성적을 기록한 이 영화를 통해 대중성 있는 연출력을 인정받았습니다. 장애인, 이주노동자, 다문화가정과 같이 우리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 할 소외 계층의 문제를 따뜻한 시선으로 조명한 영화의 관점이 많은 이들의 공감을 이끌어 낸 결과이리라 짐작됩니다.


“척추장애”라는 흔치 않은 질환으로 굽은 등에 작은 키를 갖게 된 아버지와 필리핀 “결혼이주민”인 어머니 – 원작에는 베트남 이주민으로 나오며 완득이 본인은 다 자랄 때까지 그 존재를 알지 못했던 – 사이에서 태어난 “도완득”은, 아버지 “도정복”과 카바레에서 아버지의 일을 돕는 정신지체 장애인 “민구”와 함께 옥탑방에서 살고 있는 고등학교 2학년 학생입니다. 조금씩 인식이 나아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장애인을 일컫는 순화되지 않은 호칭들이 아직도 잔존하는 한국 사회에서, “기초생활수급자”라는 빈곤계층에다 무엇 하나 변변히 내세울 것 없는 가정에서 성장했다는 커다란 ‘결격사유’까지 가진 완득이가 어떤 모습의 삶을 살고 있을지에 대해선 자세한 설명이 필요 없겠지요.



늘 교실 뒤쪽 구석 자리에 앉고 공부에는 특별한 관심도 ‘재능’도 없는 완득이에게 유일한 소망이 있다면, 옆집 옥탑방의 이웃사촌으로 시도 때도 없이 자신을 불러내 괴롭힐 뿐 아니라 기초생활수급자라는 자기의 치부를 같은 반 친구들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밝히는 – 게다가 창피를 무릅쓰고 받은 “햇반”을 빼앗아 먹기까지 하는 – 담임선생 “동주(학생들 사이에서 “똥주”라고 불리는)”가 주변에서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종 교회를 찾아가 십자가 앞에 앉아서는 “제발 똥주 좀 죽여 주세요”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곤 합니다. 하지만 일을 하던 카바레가 문을 닫으면서 시골장을 전전하게 된 아버지를 배웅하다가 동주가 성경을 들고 교회에 가는 모습을 우연히 본 완득은 자신의 기도가 ‘먹히지’ 않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며 툴툴거리게 되지요.


아버지가 시골장을 다니느라 집을 비운 동안 자신을 불러내서는 그 존재조차 전혀 모르던 친엄마에 대해 언급하며 만나 보라고 이야기하는 동주 때문에 당황스럽고도 분통 터지는 완득이 가출 같은 나름의 일탈을 꿈꿔 보지만, 오지랖 넓은 동주의 ‘가정방문’으로 그마저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집까지 찾아온 동주는 교회의 외국인 노동자 사랑방에서 어머니를 만나게 된 경위를 설명하며 “이숙희”라는 한국 이름을 가진 어머니가 일하고 있는 식당의 위치도 알려 줍니다.



아버지의 생계 도구인 중고 경차를 못으로 긁고 타이어에 펑크를 낸 옆집 아저씨와 시비가 붙은 완득이 파출소에 가게 되었을 때 따라나섰던 동주가 그에 대한 선처를 호소하다 만난 옆집 아저씨의 동생 “호정”에게 첫눈에 반하고, 완득이 역시 감히 쳐다보지 못하던, 성적이 1등인 모범생 “윤하”와 핑크빛 무드를 즐기는 상황도 발생하지만, 이런 기쁨도 잠시뿐, 자기 집 옥탑방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어머니와 결국 마주하는 순간이 오지요. 어색한 분위기에서 몇 마디 나누던 어머니가 돌아가고 난 후 어설픈 한글로 쓴 엄마의 편지를 발견한 완득이의 마음은 복잡하기만 합니다. 교회에서 자주 만나는 인도인 “핫산”을 통해 킥복싱을 알게 된 완득이가 자신도 킥복싱을 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을 때 오히려 '주먹질'만 더하며 잘못된 길로 빠질 것을 염려하는 정복이 반대의 뜻을 내비치자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는 건 좋은 것”이라는 말로 동주는 아버지를 설득합니다.


어머니가 일하는 식당에 찾아갔다 함께 아버지를 만나러 시골장까지 갔던 완득이가 엄마의 낡은 신발이 마음에 걸려 새 구두를 사 주러 들어간 신발 가게에서 둘이 무슨 관계인지를 궁금해 하는 가게 주인에게 완득이 “어머니”라고 소개한 후에야, 망설이며 아들의 이름을 불러 본 “숙희”와 완득이가 버스 터미널 안에서 처음으로 따뜻한 포옹을 나누는 장면은 보는 이의 마음을 뭉클하게 합니다. 스스로를 ‘전도사’라고 소개했던 동주가 교회에 “신나는 다문화센터”를 열어 온 동네 사람들의 모임의 장을 마련하고, 마침내 어머니와 한 집에서 살게 된 완득이가 열심히 운동하며 환하게 미소짓는 모습을 끝으로 영화는 '행복하게' 마무리되지요.



학교에 찾아온 형사들에 의해 동주가 잡혀가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그의 ‘정체’가 밝혀질 때, 불법체류자가 된 외국인 노동자들을 돕던 동주의 '활동'을 악덕업주인 그의 친부가 고발했다는 사실도 함께 드러납니다. 동주의 어린 시절, 본인의 공장에서 일하다 큰 부상을 입은 베트남 노동자를 치료도 해 주지 않고 추방한 아버지를 향해 생긴 원망 때문에 성인이 된 이후엔 인연을 끊다시피 한 그가 '달동네'에 와서 살며 외국인 근로자들을 돕는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지요. 엄마를 “저쪽 사람”이라고 부르는 신발 가게 주인의 호칭에서 보듯 지금도 Half-Korean(적절한 한국어 표현이 아직도 없기에)을 바라보는 시선이 여전히 곱지 않은 데다, 같은 유색인이면서도 피부색이 ‘짙은’ 사람들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유독 심한, 나름대로 “코리안 드림”을 품고 찾아와 성실하게 살고 있는 그들을 결코 ‘이웃’으로 인정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의 인식과 뚜렷이 대조되는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엄마를 처음 만난 후 따지듯 묻는 완득이에게 아버지는 “그 사람, 나라가 가난해서 그렇지 거기서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이다”라는 말을 하고, 그 말을 들은 완득이는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을 공부하던 미술 수업 중 작품에 대한 느낌을 묻는 선생님에게 “그림 속의 세 여성이 '이방인'으로 보인다”며 “자기들 나라에서는 다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이라는 '뜬금없는' - 선생님에게는 어이없이 느껴졌을 - 답변을 내놓습니다. 예전에는 꽤 재치 있는 유머라고만 생각했던 이 대사가 이번에 다시 영화를 보면서 무척 씁쓸하게 다가왔던 것은,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 “아메리칸 드림”을 가지고 타국으로 가서 험한 일을 하고 차별을 받으며 살아야 했던 수많은 한국의 '고등교육 인력'들이 떠올라서이기도 했지만, 이제는 제발 '자기 나라에서 배울 만큼 배운' 사람뿐 아니라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해 주위의 도움이 더욱 필요한 이주민에 대해서도 귀히 여기고 품어 주는 마음을 보이며 하나님께 기쁨 드리는 '대한민국'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절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소설의 원작자인 김려령이 기독교인인지 아니면 곳곳에 그토록 많으면서도 – 어떤 세계적 건축가가 한국 방문에서 얻은 가장 강렬한 인상을 “도시 야경 속 빛나는 십자가”라고 말했을 정도로 – 제대로 역할을 못 해내고 있는 교회들에게 이상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싶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정의를 꿈꾸는 법대 출신의 사회 과목 교사이자 교회에서 전도사를 겸하고 있는 동주라는 인물의 삶을 통해, 즉 낮고 힘없는 위치의 사람들을 도우며 사랑을 전하는 자세를 통해 대변되는 하나님의 마음이, 보는 이들에게 기독교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를 전달하기에 부족함 없는 요소이리라 여겨집니다. 비록 하나님께 담임 선생님을 “죽여 주시면” 그가 내는 헌금보다 많이 드리겠다는 ‘딜(deal)’을 제시하고 “계속 안 죽이시면 부처님에게 가겠다”는 ‘협박성’ 발언까지 하기는 해도 무엇이든 고하거나 상의할 일이 있으면 교회를 찾는 완득이와, 서툰 한국말 때문에 그런 완득이를 “자매님”이라고 부르는 인도인 노동자 핫산의 모습 또한, 하나님도 미소 지으시게 만들 듯한 사랑스러운 면모이고 말이지요.


“왜 숨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고, 사실은 너무 오래 숨어 있어서 두렵기 시작했는데, 그저 숨는 것밖에 몰라 계속 숨어 있었다. 그런 나를 똥주가 찾아냈다”라는 소설 속 완득이의 독백은, 영화의 광고 카피 중 “그가 나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내 인생은 꼬이기 시작했다!”라는 유머러스한 문구와 서로 연결되면서, 분명 그것의 변형이었을 김춘추 시인의 “꽃”이라는 시의 한 부분인 - 그리고 저의 이름을 불러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매번 떠올리게 하는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이 되었다”라는 구절을 연상시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이름이 불리기 전까지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던, 이름이 불림으로써 그분의 ‘꽃’이 된 우리들도,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 주고 어두운 구석에 숨어 있는 그들을 하나님 앞으로 불러내어 밝고 환한 또 하나의 꽃으로 피어나도록 돕는 자리에 설 수 있길, 따뜻해진 가슴으로 소망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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