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J의 시선
지난 10일, "한글날"과도 맞닿은 의미 있는 시점에 한강 작가가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설레는 소식을 들은 이후 여전히 그 여운에 잠겨 있는 중이다. 지난 며칠간 같이 일하는 동료 변호사들에게 한강 작가의 소설들을 소위 ‘영업’하고 다니면서 - 실제로 옆 사무실을 쓰는 동료와는 점심 시간에 근처 서점까지 동행해 "채식주의자"의 영어 번역본을 찾아 주기도 했다 - 작가의 팬으로서, 또 한국인으로서의 도리를 다하고 있다는 어필도 은근슬쩍 흘려 본다. 이번 편의 글을 통해서도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을 기념하고픈 마음에 "작가"를 주제로 한 작품들을 몇몇 생각했지만, 결국 ‘예술’ 그 자체, 혹은 ‘예술의 존재 의미’를 다루는 영화인 [모뉴먼츠 맨](The Monuments Men)을 선택하게 되었다.
조지 클루니의 2014년 작 [모뉴먼츠 맨]은 로버트 M. 에드셀과 브렛 위터의 역사서 “모뉴먼츠 맨: 히틀러의 손에서 인류의 걸작을 구해 낸 영웅들”을 각색해 만든,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작품이다. 영화의 제목인 "모뉴먼츠 맨"은 제 2차 세계대전의 끝 무렵, 유럽 곳곳의 이름난 문화유산이 전쟁의 폭격과 히틀러의 야욕으로 파괴되거나 수탈 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전선에 투입된 특수 목적 부대의 이름으로, "기념물, 혹은 문화재(monuments)를 지키는 사람들" 정도로 번역될 수 있을 듯하다. 작품 속에서 이 예술품 전담 부대를 이끄는 인물인 미국의 예술학자 "프랭크 스톡스"(조지 클루니)는 인류의 찬란한 문화유산이 전쟁 때문에 짓밟히는 참담함에 대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호소를 거듭한 후 "모뉴먼츠 맨"의 결성을 허락 받는다. 이후 스톡스는 미술관 관장 "제임스 그레인저"(맷 데이먼), 건축가 "캠벨"(빌 머레이), 조각가 "가필드"(존 굿맨), 예술 감독 "새비츠"(밥 발라반) 등 예술가와 학자들을 부대로 ‘스카우트’하지만, 지금껏 군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데다 중장년의 나이라는 불리한 조건까지 '갖춘' 이들은 거의 면피용의 기초 훈련만 받은 뒤 오합지졸스러운 티를 벗지 못한 채 전쟁터로 파견된다.
그 같은 상태로 겨우 유럽에 도착한 그들은 문화유산의 안위보다 당장 눈앞에 닥친 전투의 승패와 병사들의 안전을 우선시하는 현장 사령관들에게 귀찮은 짐, 혹은 방해꾼 정도의 취급을 받는다. 같은 시각, 프랑스에 주둔했던 나치군이 빼돌린 예술품들을 찾아 내기 위해 파리로 파견된 그레인저는 저항군을 위해 비밀리에 노력해 왔던 박물관 큐레이터 "클레어 시몬느"(케이트 블란쳇)와의 협력을 시도하지만, 미국군이 프랑스의 문화유산을 가로챌 것을 우려한 클레어가 비협조적인 태도를 유지하면서 그의 임무도 난항을 맞게 된다. 여러 악조건 속에서 어려움을 겪던 "모뉴먼츠 맨"은 나치 독일이 패망할 경우 수탈한 문화재를 포함한 모든 것을 파괴시키라는 히틀러의 전령, 즉 "네로 명령"(Nero decree)에 대해 듣고 난 후 더욱 절망한다.
하지만 앙숙의 케미를 보이던 부대원 켐벨과 새비츠가 프랑스 예술품 수탈 작전의 선봉에 섰던 나치 장교 "스탈"을 검거하는 쾌거를 이루고, 이를 통해 마음을 연 클레어가 도난 당한 예술품의 행방을 일일이 기록해 두었던 장부를 그레인저에게 넘기면서 이들의 상황은 급반전된다. 독일군이 후퇴하고 연합군이 승기를 잡게 된 변화의 상황이 수탈 당한 예술품의 안전엔 오히려 더 큰 위협일 수 있음을 깨달은 모뉴먼츠 맨은 결국 작품들이 숨겨진 은닉처를 찾아 최전선으로 향하고, 문화재들을 원래의 국가에 반환하려는 자신들과 달리 예술품을 그저 전리품으로 가로챌 생각뿐인 소련군과도 아슬아슬한 경쟁을 시작한다.
[모뉴먼츠 맨]은 개봉 당시 극장에서 봤을 만큼 나름대로 큰 관심을 가졌던 영화지만, 그럼에도 솔직히 말하면 그닥 특별한 인상을 받았던 기억은 없다.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그저 ‘무난한’ 작품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듯하다. 예전 포스팅에서도 다루었던 [굿나잇 앤 굿 럭](Good Night, and Good Luck)에서 조지 클루니가 보여 준 뛰어나고 예리한 연출력이 발휘되었다기보다 어떤 ‘공식’을 충실히 따른 출력 결과라는 인상이 더 짙다. 영화의 초반, 스톡스가 등장인물들을 하나하나 찾아가며 부대에 편입시키는 전형적 흐름의 도입부라거나 부대원들 사이의 ‘티키타카’, 심지어 그레인저에게 방어적으로 대하던 클레어가 나중엔 이성으로서의 관심을 표하는 설정 등에서는 우리가 보통의 ‘전쟁 영화’(특히 2차 세계대전을 다룬 ‘할리우드’ 영화)들에서 익숙하게 봐 왔던 여러 클리셰와 전개 방식이 그대로 목격되는 느낌이다. 다만 ‘전쟁’ 그 자체를 주제로 삼지 않은 작품인지라 다른 ‘전쟁 영화’들의 대표적 문법에서 벗어나는 순간들이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분기점에서 오히려 더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전쟁의 실제적 참상이나 나치군의 잔혹함 등이 비교적 ‘가볍게’ 혹은 표면적으로 다뤄지며 후반부의 엄숙함을 약화시킨다는 점, 또한 등장인물들이 그다지 입체적으로 그려지지 않아 그들에 대한 감정적 공감이 어렵다는 측면 등으로 영화가 약간, 뭐랄까, 밍숭밍숭해진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에는 유의미한 장점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일단 "무난하다"는 평을 바꿔 말하면 대개의 관객들이 큰 불호 없이 즐길 수 있다는 의미와, 흥분이나 전율은 아닐지언정 익숙한 ‘아는 맛’에서 오는 안정감과 편안함이 존재한다는 뜻은 될 수 있다. 조지 클루니의 인맥으로 가능했으리라 추측되는 톱스타들의 향연이 영화 내내 이어지며 ‘보는 재미’를 보장하는 것도 큰 이점으로 작용한다. 좀 더 진지한 관점으로 보면 할리우드에서 지금까지 제작된 수많은 전쟁 영화, 특히 2차 세계대전 관련 영화 중에서 유일하게 "예술품 전담 부대"를 다룬다는 특징만으로도 이 작품의 존재 의미는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무력과 탐욕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파괴되는 문화와 예술 분야에 초점을 맞춘 이 영화의 신선한 시각은, 전쟁과 갈등 속에서 사회와 인간이 겪게 되는 다양한 종류의 ‘상실’을 포괄적으로 조명해 준다.
앞서 언급했듯 이 영화가 궁극적으로 탐구하는 주제는 문화와 예술의 가치, 더 정확히 말하면 ‘여유’나 ‘안전’ 같은 기본적 조건들이 뒷받침되지 않은 상황에서도 예술 그 자체에 가치가 있는가 라는 것이다. 영화 내내 부대원들이 주위 사람들로부터 줄곧 듣는 말이 "예술을 위해 목숨을 바칠 만한 가치가 있는가"라는 질문일 만큼, 작품은 그러한 의문을 정중하고도 진지한 방식으로 다루고 있다. 스톡스는 자신의 부하들을 "고작 그림 지키다 죽게 할 수"는 없다고 분노하는 사령관에게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며, 실제로 모뉴먼츠 맨은 전투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으면서도 결국 두 명의 부대원을 잃는 비극적 희생을 치르게 된다. 동료의 사망 소식을 접한 뒤 나치군에게서 여러 귀중한 문화재를 되찾고도 제대로 기뻐하지 못하는 스톡스의 어두운 표정에서는 그의 임무와 사명에 대한 고뇌가 엿보이기도 한다.
이 질문에 대해 영화가 주는 답변은 스톡스의 대사에 의해 분명하게 제시된다. 실의에 빠진 부대원들을 다독이는 장면에서 그는 한 세대를 말살하고 건물들을 불태워도 ‘국가’는 다시 일어서지만 “역사와 유산이 파괴된 국가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과 같다”며 ‘모뉴먼츠 맨’이 반드시 이 참사를 막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문화와 예술을 사회나 국가의 존재 ‘증표’, 혹은 ‘존재의 본질’(essence of being)로 규정함으로써 문화재와 예술품을 지키는 모뉴먼츠 맨의 노력을 인류 그 자체를 지키는 노력과도 동일시하는 듯 보인다. 엄청난 양의 예술품들을 되찾은 상황에서 그레인저가 “히틀러의 제국은 영원하지 못할 것”(“There will never be a 1000 year Reich”)이라며 스톡스를 위로하는 대사 역시 비슷한 맥락으로, 그러니까 그들이 나치군의 손아귀로부터 그들의 ‘문명’을 지켜 냈다는 의미로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조금 다른 시선으로 예술의 의미, 혹은 가치라는 주제에 접근해 보려 한다. 이번에 영화를 다시 보며 계속해서 곱씹게 되었던 대목이 하나 있는데, 모뉴먼츠 맨 부대원인 영국 군인 "도널드 제프리스" 소령(휴 보너빌)이 아직 나치군 점령 하에 있는 도시 브뤼헤(Bruges)에 숨어들었던 장면에서였다. 나치군이 브뤼헤에서 곧 철수할 예정이라는 소식을 접한 제프리스는 오히려 그 때문에 미켈란젤로의 조각상 "브뤼헤의 마돈나"(Madonna of Bruges)에 대해 염려하게 되고, 마치 홀린 사람처럼 "마돈나"가 있는 브뤼헤 성당으로 향해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의 조각상이 안전한지 확인한다. 하지만 안도의 마음도 잠시, 그가 걱정했던 대로 나치군이 작품을 탈취하기 위해 그날 밤 성당으로 들이닥치면서 제프리스는 마돈나를 지키던 중 사망하게 된다.
모종의 불명예스러운 사건으로 가족들에게 큰 실망을 안긴 과거가 암시되는 제프리스는 별다른 활약을 보일 기회도 없이 때 이른 죽음을 맞이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것이 안타깝거나 덧없다기보다 고귀하고 아름다운 희생으로 느껴졌다. 제프리스가 조각상의 발치에서 아버지에게 쓴 편지의 한 구절을 통해 나도 그의 선택에 ‘공감’했기 때문인데, 그는 백여 년 전 이미 나폴레옹에 의해 수탈된 적이 있으나 결국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던 마돈나의 역사를 되짚으며 이 조각상이 “한때 나폴레옹의 소유였던 것만큼이나 나의 것이기도 하다”(“The Madonna is as much mine as it was Napoleon’s”)라는 확신에 찬 말을 남기기도 한다.
이 인물의 표현처럼 내 경우도 어떤 예술 작품이 ‘나의 것’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어렴풋이 느끼기만 할 뿐 제대로 표현하거나 구체화시키지 못한 채 머릿속 어딘가를 유영하던 생각, 감정, 소망 등을 누군가 이미 완벽한 언어나 묘사로 구현해 놓았음을 발견할 때, 혹은 몇 백 년 전의 예술가가 남긴 작품 속에서 나와 같은 고민을, 꿈과 이상을 목격하게 될 때 말이다. 유구한 역사 가운데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것을 보며 내가 느낀 것과 같은 아름다움을 느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마다, 시대와 상황을 뛰어넘어 - 상투적 표현이긴 하지만 - 다른 이의 영혼과 긴밀하고 다정하게 맞닿는 듯한 느낌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런 경험이 쌓일수록 나의 빈곤한 영혼이 확장되는, 인류가 공유하는 어떤 본질적 ‘인간성’(shared humanity)에 더 가까워지는 황홀함을 느끼게도 된다. 이렇듯 예술을 ‘공통된 인간성’의 증거로, ‘나’를 온 인류에게 잇는 ‘연결 고리’로 받아들인다면 "마돈나"를 나치의 마수로부터 보호하고자 단신으로 뛰어든 그 무모함을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다.
예술의 의미란 평단의 인정과 대중적 인기, 금전적 가치, 혹은 작품 그 자체가 갖는 역사적, 문화적 중요성만이 아니라 그를 통해 가능해지는, 서로 다른 인간 사이의 교류와 공감, 이해에 더욱 근거할 수 있다고 본다. 예술의 가장 큰 의미와 가치는 그것이 우리의 영혼을 얼마나 든든히 덧입히는지, 연결점 없는 타인과의 공통성을 확인시키며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가치와 이상에 얼마나 깊이 천착하는지에 달려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인지 훌륭한 예술 작품을 감상하고 경험하는 일은 설교를 듣거나 찬양을 부르는 것 못지않게 ‘예배’의 성격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창작자의 의도나 세계관 등과 별개로 인간에 대해 깊이 고민하며 모든 영혼 속에 새겨진 희망과 갈급함을 쫓는 여정 자체가 주님의 마음과 궤를 같이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예술이란 불완벽하고 불완전한 세상을 사는 인간이 창조주의 품에서 느꼈던 완벽한 온전함을 다시 찾아 헤매는, 무의식적 그리움의 발로일지 모른다.
뛰어난 예술 작품을 폄하하고 정치적 선전이나 선동의 매개체 따위로만 취급하려는 세력들의 행보는 그래서 더욱 안타깝다. 진정한 예술이란 ‘정치’나 ‘이념’을 초월하는, 다시 말하면 모두의 영혼에 공통적으로 새겨진 가치와 희망에 닿고자 몸부림치는 창조물의 기본적 노력이다. 나치 정권이 수많은 문화재와 예술품을 수탈해 ‘전리품’으로 격하시켰던 이유, 또한 지금도 세계 곳곳의 강압적이며 비민주적인 세력들이 문화와 예술을 검열하고 통제하려 드는 이유는 결국 그들이 예술을 통해 이뤄지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공감과 이해, 영혼과 영혼의 교류를 경계하고 두려워하기 때문일 것이다.
예술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가치가 있는지는, 글쎄, 여전히 명확한 답변을 내놓기 어렵다. 하지만 예술을, 그것이 상징하는 의미를 지키기 위해 ‘살아가는’ 것은 합당하고 즐거운 일임이 틀림없다. 우리의 영혼과 영혼이 연대하며 일으키는 거대한 물살이 억압과 폭거에 짓눌린 펜과 붓과 카메라와 목소리를 해방시킬 날을 기대해 본다.
P.S. 몇 년 전 [소년이 온다]를 읽는 내내 하나님의 얼굴을 마주하는 듯 느껴졌던 기억이 있다. 작가의 의도를 떠나 나에게는 죄와 악, 영혼과 회복에 관해 깊은 생각을 하게 해 준, 개인적으로도 소중하고 의미 있는 작품이다. 이 책이 이루어 낸 세계적 유대와 연대야말로 예술의 순기능을 시사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엄마 C의 시선
제목 자체에서 그 주제와 줄거리가 충분히 짐작될 만한 영화 “모뉴먼츠 맨(The Monuments Men)”은, 배우로서뿐 아니라 진지한 사회 의식이 돋보이는 영화들을 제작, 연출하는 것으로도 인정 받는 - 저희가 올해 초 포스팅했던 “굿 나잇 앤 굿 럭(Good Night, and Good Luck)”에서도 소개되었듯 - 조지 클루니(George Cloony)가 제작과 각본, 감독, 주연 등을 모두 맡았던 2014년 작품입니다. 제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실제 상황을 각색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흔히 ‘전쟁’을 배경으로 했다고 할 때 떠올리게 되는 일반적 “전쟁 영화”들과는 색채가 다른, 오히려 전쟁에 뒤따를 수 있는 ‘부작용(side effect)’에 보다 더 초점을 맞추면서 그러한 문제에 대한 보는 이들의 관심과 각성을 촉구하기 위해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2차 세계대전의 시작과 함께 유럽 각지에서 역사적 건물들이 폭파, 손상되는 일이 발생함은 물론 인류의 소중한 문화유산이 훼손되거나 도난 당할 위험성까지 대두되자, 당면한 상황에 깊은 우려를 느낀 미술 역사학자 “프랭크 스토크(Frank Stokes)” 교수는 더 이상의 손상과 손실을 막는 임무를 수행할 “예술품 수호 전담 부대”를 결성할 필요성을 느끼고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에게 자신의 뜻을 전하면서 설득에 임합니다. 결국 그 같은 사명을 실행할 특수 목적 부대의 결성을 허락 받은 그는, 건축과 조각, 미술, 공연 등 예술 분야 전반의 전문가들을 모아 히틀러(Adolf Hitler)가 유럽 전역에서 약탈해 가고 있는 세기의 걸작품들을 추적, 보호하기 위한 작전을 시작하지요.
예술 작품들에 대한 뛰어난 식견과 남다른 애정을 가진 전문가들로 조직된 그룹을 구성하는 과정은, 이런 식의 스카우트 과정을 그리는 영화들이 취하는 전형적 방식을 – 조지 클루니 자신이 제작한 “오션스 일레븐”에서도 사용되었던 – 보여 주고 있는데, 이렇게 선발된 일곱 명의 인물들은 각기 다른 계급으로 나뉘어 연합군의 일원으로 배치된 후 군부대의 진격로를 따라다니며 각자의 임무를 수행합니다. 유럽 각 지역의 주옥 같은 예술품들을 강탈해 본인의 고향 오스트리아 린츠(Linz)에 설립 계획 중인 “총통 박물관(Führermuseum / Fuhrer-Museum)”에 비치하겠다는 히틀러의 계략에 도전장을 내민 이들은, 나이도 많은 데다 본래 군인이 아니다 보니 엉성하고 급작스러운 군사 훈련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문제는 물론, 자신들이 맡은 임무의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는 직속 상관 위치의 장교들이 보이는 몰이해로 인해서도 여러 가지 난관에 부딪히게 됩니다.
미켈란젤로의 조각상 “브뤼헤의 마돈나(Madonna of Bruges)”를 직접 지키고자 벨기에의 브뤼헤 성당까지 찾아가 나름의 조치를 취하던 “모뉴먼츠 맨” 구성원 중의 한 명, “도날드 제프리스(Donald Jeffries)”가 조각상을 약탈하려고 침입한 독일 장교의 총에 맞아 사망하고, 작전 수행을 위해 이동 중이던 “장 클로드(Jean-Claude Clermont)” 역시 매복해 있던 적들로부터의 피격으로 사망하는 등의 악재가 겹치는 상황에서, 실종된 예술품의 위치를 파악하는 데에 결정적 도움을 줄 수 있을 프랑스 여성 “클레어 시몬(Claire Simone)” - 나치 장교 “빅터 스탈(Viktor Stahl)”의 업무에 강제 동원되었던 - 또한 파리로 파견된 “제임스 그레인저(James Granger)”에게 냉랭한 태도로만 대할 뿐 협조하려는 자세를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암담하기만 하던 상황 가운데 다행스럽게도 예술품들이 숨겨진 장소에 대한 실마리가 조금씩 풀리기 시작하는데, 자신을 설득하고자 노력하는 제임스를 계속 경계하다가 신문에서 “모뉴먼츠 맨” 멤버들의 혁혁한 공로를 읽은 뒤 핵심 정보를 제공하기로 결심한 클레어의 도움이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됩니다. 지역 이름에서 단서를 얻어 탐색한 독일 지겐(Siegen)의 구리 광산에서 도난 당했던 16,000점의 예술품을 발견하고 메르케스(Merkers)의 소금 광산에서 100톤 어치의 금궤를 찾아 내는 등 사태는 해결의 국면을 맞습니다. 약탈 당했던 예술품들 각각이 소중하고 그것들을 찾아 내는 장면 모두가 흥미진진하지만, 영화의 서사상으로 볼 때 작품을 지키려다 도날드가 목숨을 잃었던 “브뤼헤의 마돈나”를 알타우제(Altaussee) 소금 광산에서 발견하는 장면이 특히 감동적입니다. 도날드의 죽음으로 적지 않은 마음의 빚을 졌을 주인공 프랭크뿐 아니라 영화를 보고 있던 관객들 역시 그 대목에서 함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되니까요.
생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전선에서 생활하는 군인들이어서 물론 그렇겠지만 – 사실 당시의 두 대통령 또한 마찬가지였지만 – 영화 내용 중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대사가 “예술품을 지키는 일이 사람의 목숨을 걸 만큼 중요한 일인가”라는, 즉 “예술품의 가치가 사람의 목숨 값에 상응할 만한 것인가”란 질문이었던 한편, 늘 긴장된 분위기가 감도는 군부대에 누군가의 가족이 녹음해 보낸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려 펴지고, 그 잔잔한 음악을 큰 ‘충격’과 감동에 싸인 표정으로 듣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서 위의 질문과 관련된 여러 생각들이 머릿속을 오고 갔습니다. 우리가 당연시하며 감사하지 않는 평범한 일상을 지켜 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필요했는가는 물론, 우리의 오늘이 있기까지 인류의 정신과 문화의 밑거름이 되어 왔음에도 그저 당연한 듯 치부하며 가치를 인정할 줄 몰랐던 유형, 무형의 예술품들을 수호하려 얼마나 많은 이들의 보이지 않는 희생과 애씀이 필요했을지도 깊이 생각하게 되면서 말이지요.
저희가 이번에 다룰 영화로 이 작품을 선택한 데에는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이 결정적 요인이 되었기에 그 소식과 관련된 몇 가지의 단상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겠는데, 고국의 작가가 일궈 낸 그 기쁘고 자랑스러운 소식을 멀리에서 들으면서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지금 같은 시대에 – 광주 민주 항쟁을 폄훼하고 제주 4·3 항쟁을 욕보이는 사람들이 정부 주요 기관 곳곳에서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때에 - 이런 의미 있는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역시 하나님은 살아 계신 분이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너는 벙어리처럼 할 말을 못하는 사람과 더불어,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의 송사를 변호하여 입을 열어라; 표준새번역, 새번역 (Speak up for those who cannot speak for themselves; ensure justice for those being crushed; NLT)”라는 말씀(잠 31:8)을 통해 힘없고 억울한 이들, 자신의 입장을 주장하거나 항변할 수 없는 사람들의 입이 되고 목소리가 되어 줄 것을 명령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한편, 이처럼 반가운 소식을 함께 기뻐하고 축하하기는 커녕 온갖 트집을 잡으며 오히려 그 의미를 폄하하는 이들이 있다는 말을 역시 멀리에서 듣게 되는 마음은 착잡하기만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기준까지는 아니라도, 또한 시대를 앞서가는 선구자적 사고와 자세까지는 아니더라도, 오늘날의 사회에서 추구하는 보편적 지향의 수준조차 따라가지 못한 채 세상적 윤리와 인간애 등의 가치에도 미치지 못하는 삶을 고집하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이번 수상이라는 경사가 스스로를 냉철하게 되돌아보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영화의 끝부분, 프랭크 교수가 트루먼(Harry S. Truman) 대통령에게 자신들이 되찾은 예술품에 대해 보고할 때 수천 부의 “토라”와 5,000개의 “교회 종”을 거론하고 있기도 하거니와, “모뉴먼츠 맨”이 찾아내어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은 예술 작품 가운데 다 빈치(Leonardo da Vinci)와 렘브란트(Rembrandt H. van Rijn),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등 중세 미술가들에 의해 제작된 - 기독교 관련 작품들이 주류를 이루는 - 회화와 조각은 물론 성경 필사본, 태피스트리, 각종 교회 성물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는 측면에서, 이 부대원들에게 특히 감사해야 할 사람은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들의 노고를 아는 사람도 칭송하는 사람도 그리 많지는 않겠지만, 하나님의 역사가 지금도 도도하게 흐를 수 있기까지에는 이처럼 숨은 곳에서 그분의 손발이 되어 준 사람들의 역할이 컸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