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J의 시선
‘평론’이라 부르기는 민망하지만 어쨌든 영화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한 이후부터 다루기에 꽤나 버겁게 다가오는 작품들이 있다. 영화의 주제나 내용 자체가 무겁고 거북해서라기보다 작품의 깊이와 넓이를 한 폭에 다 담지 못하고 겉 부분만 살짝 건드리는 결과물이 탄생할 것이라는 부담감과 부채감 때문일 듯싶다. 이창동 감독의 1999년 작 [박하사탕]도 그런 영화들 중 하나이다. 그동안 이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어찌어찌 미뤄 오긴 했지만 결국 영원한 회피는 불가능했던 모양이다. 의도한 사실은 아니지만 2000년 1월 1일 개봉했던 이 영화의 궤도를 쫓듯 2025년 새해를 맞아 처음 다루는 작품으로 [박하사탕]이 정해진 점에서도 나름의 '숙명'을 느낀다. 이렇게 된 이상 최대한 담담하고 뻔뻔하게 글을 이어 보려 한다.
[박하사탕]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저 멀리 보이는 작은 빛, 그러니까 터널의 끝으로 점점 가까이 나아가는 첫 장면으로 시작된다. 영화의 주제와 서술 방식을 초반부터 단적으로 나타내는 구도인 셈인데, 잘 알려져 있듯 이 영화는 이야기의 ‘결말’에서 ‘시작’ 부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역순(reverse chronological order)의 방식으로 진행된다. 1999년 봄 중년의 나이인 주인공 "김영호"(설경구)가 자신의 마지막을 맞는 첫 챕터 [야유회]에서부터 그가 갓 스무살이던 1979년 가을의 에피소드 [소풍]에 이르기까지 대략 20년의 시간이 7개의 챕터(chapter)로 나뉘어 되감긴다. 다시 말하면 영화는 주인공 영호가 목숨을 포기하는 ‘끝’이자 ‘어둠’으로부터 시작해 그가 살아온 인생을 되짚으며 아직 순수하고 밝았던 시절의 ‘빛’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이처럼 영화는 ‘결과’(effect)를 먼저 보여준 뒤 인물의 시간과 상황을 되짚어 ‘원인’(cause)을 발견하는 전개로 흘러가는데, 어떤 면에서는 누군가의 죽음으로 시작해 살인범의 정체와 범행 동기를 쫓는 "murder mystery"(살인사건 추리물)와도 비슷한 양상이라고 볼 수 있다. 영화의 첫 챕터인 [야유회]에서의 주인공 영호는 관객들에게 아직 낯선 인물로, "가리봉 봉우회"의 야유회에 갑자기 나타난 뒤 어딘가 불편하고 부담스러운 행태로 사람들 사이를 겉돌며 기행을 거듭하다 근처의 철로 위에 올라가기까지 한다. 그를 걱정한 친구 한 명이 끝까지 아래에서 영호를 설득하려 하지만, 영호는 기차가 경적을 울리며 자신을 향해 돌진하는데도 “나 다시 돌아갈래!” 라는 유명한 대사를 남기며 결국 자신의 목숨을 포기한다. 그렇게 챕터가 끝난 뒤 영화는 ‘거꾸로’ 가는 기차의 이미지를 이용해 과거로 ‘역행’하는 여정에 관객들을 참여시키고, 관객들은 ‘관찰자’(observer)의 입장을 넘어 영호의 죽음에 관한 ‘미스터리’, 즉 그가 삶을 포기해야만 했던 이유를 함께 추적하는 ‘참여자’(participant)의 위치에 선다.
그 과정에서 관객은 상처와 위악 투성이인 영호의 삶을 지켜보게 되고, 그가 자신의 첫사랑 "순임"(문소리)을 밀어낸 후 아내 "홍자"(김여진)와의 관계도 망가뜨리는 행동들을 목격한다. 염세적이고 위선적인 ‘미래’의 영호로부터 순진하고 순수한 ‘과거’의 영호로 되돌아가는 서사는 역설적이게도 그의 궁극적 타락, 혹은 ‘변질’을 강조하며 그 여정에 ‘참여’한 관객들을 더욱 안타깝게 만들고, 챕터가 지날수록 서서히 드러나는 그의 상처와 비극에도 깊은 연민을 느끼게 한다. 더욱이 영화의 후반부, 6번째 챕터인 [면회]에서는 영호가 죽음을 선택하게 된 본질적 이유(어떤 면에서는 그의 ‘살인범’)가, "1980년 5월"이라는 타이틀 카드를 보면 저절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 시대의 잔혹과 아픔임이 밝혀진다. 신병 시절, 아무것도 모른채 민주화운동 진압군으로 동원되어 광주로의 긴급 출동 명령을 받은 영호는, 기차역에서 마주친 여고생을 무사히 집으로 돌려보내려다 실수로 그녀를 사살하는 끔찍한 '사고'를 겪는다. 움직이지 않는 아이를 껴안고 일어나라며 울먹이는 영호의 모습은 한 사람의 영혼이 부서져 내리는 순간을 마주하듯 참담하기만 하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이 작품의 깊이와 의미, 역사적, 문화적 상징성 등을 이 글에서 모두 다루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논문 몇 개 혹은 책 몇 권은 쉽게 나올 내용이다 보니 여기에서는 함부로 건드릴 엄두를 내지 않겠다는 입장에도 양해를 구한다. 물론 많은 훌륭한 평론가들과 영화학자들이 이 작품에 대해 길고 자세한 해석과 감상을 이미 내놓기도 했고 말이다. 그 대신 이번 글을 통해서는 최근 영화를 다시 보며 들었던 생각들을 나누고 싶은데, 영화의 가장 중요한 은유(metaphor)로 사용된 구도, 그러니까 ‘기차’가 정해진 길을 ‘역행’하는 설정이 가진 양면성에 관한 부분들이다.
‘역행’은 복원 혹은 회복(restoration)의 의미를 가질 수 있지만, 동시에 탈선과 이탈의 뜻도 포함하는 개념이다. 그래서 영화는 광주에서의 비극 이후 파국으로 치닫는 영호의 삶, 그의 ‘필연적’ 몰락과 파멸의 여정을 그대로 따라가는 방식으로 그를 힐난(condemn)하는 대신, 영호의 마지막을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해 그의 ‘어둠’에서부터 ‘빛’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자신은 빛을 누릴 자격도 없다는 듯 얼굴의 일부에만 비치는 한줌의 햇빛 아래 울분으로 씩씩대는 1999년 영호의 모습에서부터 20년의 세월을 되감아 온몸으로 햇빛을 누리고 세상의 아름다움에 눈물짓는 1979년의 영호로 되돌아가는 영화의 전개 방식은, 죽음 앞에서 처절히 절규했을 정도로 "돌아가고" 싶어 하던 그의 소망을 결국 이루어 준 셈이다. 다만 ‘망가진’ 현실에서 ‘온전한’ 과거로 역행하는 작품의 서술은 다정스런 연민이 가득한 만큼이나 더없이 냉정한 측면도 있다.
영화의 이런 '냉정함'은, 영호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던’ 이유를 되짚어 가는 이 작품이 동시에 그가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있었던’ 변곡점들 또한 보여 준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다시 말하면 이 영화는 기차가 점점 정해진 길에서 벗어나는 ‘탈선’을 쫓음으로써 영호의 변질과 타락을 ‘어쩔 수 없는’ 무언가, ‘불가피’한 결과로 그리는 대신, 경로에서 이탈한 기차의 여정을 ‘거꾸로’ 따라감에 의해 오히려 탈선한 삶이 조금씩 본래의 궤도로 돌아오는 모습을, 지금의 타락과 어둠이 한때는 빛과 순수함이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어떤 면에서는 이 영화가 영호의 삶에서 선택되지 않았던 수많은 ‘가능성’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이처럼 영화 전반에서 중요하게 쓰이는 것이 ‘기차’의 상징성으로, 관객들도 함께 ‘기차’를 타고 영호의 과거로 동행하도록 만들 만큼 영호의 삶 안에서 기차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광주에서의 우발적 살인, 즉 이후의 그가 자신과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는 삶을 살도록 만든 근본적 원인이 된 그 사건이 기차 옆에서 일어난다. 기차가 결국 영호의 죽음의 ‘직접적’ 원인이 된다는 점에서 영호가 처음으로 ‘죄’를 짓는 이 장면이 영호의 ‘끝’과 연결된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주목할 부분은 이때의 기차가 ‘정차된’ 상황, 그러니까 움직이지 않는 상태라는 것인데, 이는 여고생을 죽게 한 영호의 ‘잘못’이 ‘수동적’(passive) 성격을 띄고 있음을 상징하는 수단으로 보인다. 이 참극에 대한 책임은 사실 영호보다 그를 이런 상황으로 몰아넣은, 젊고 순진한 청년이 실수로 죄 없는 민간인을 사살하는 상황을 유발한 당시의 사회와 권력에게 물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1980년 5월 영호의 ‘죄’는 온 사회의 죄와 비극이자 모두가 연민하며 공감할 수 있는 아픔이다.
하지만 거스를 수 없는 시대와 권력의 광풍에 휩쓸린 다음, 영호는 자신이 어찌할 수 없던 ‘수동적’ 비극을 넘어 적극적, ‘능동적’(active)으로 스스로의 삶을 망가뜨리기 시작한다. 광주에서의 사건 이후 영호의 삶에 등장하는 기차들은 모두 ‘움직이는’ 상태로, 영호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던 상황, 그러니까 어둠에서 빛으로 되돌아가는 영화의 전개처럼 경로에서 이탈한 자신의 삶을 ‘되돌려 놓을 수’ 있었던 상황들에 출현한다. 1984년 가을, 신참 형사로 근무하던 영호는 자신을 찾아온 순임을 돌려보내고, "사진 찍는 일을 하고 싶다"던 자신의 옛 소망을 기억해 사진기를 선물한 그녀에게 ‘기차가 떠나는 순간’ 카메라를 돌려준다. 죄책감과 자기 혐오에 갇힌 채 진정한 사랑, 한때 꿈꿨던 미래와 희망을 자기 손으로 ‘직접’(actively) 거부하며 떠나보낸 셈이다. 이후 영호는 자포자기한 듯 자신을 짝사랑하는 홍자의 마음을 받아들이지만, 순진한 모습으로 그를 사랑했던 홍자가 10년 후 바람을 피우게 될 정도로 그들의 결혼 생활은 행복과 거리가 멀다.
영호는 아내와 내연남을 찾아가 폭력을 가하지만 - 여기에서도 그가 진심으로 아내의 외도에 분노했다거나 상처를 받았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 자신 또한 불륜 관계를 이어 가며 상대를 기만한다. 그가 내연 관계인 여성과 차에서 만나는 중, ‘지나가는’ 기차가 자동차의 창문에 비치는 설정 또한 영호가 ‘능동적’으로 본인의 삶을 그리고 아내와의 관계를 파괴하고 있음을 암시해 준다. 스스로 목숨을 버리기 며칠 전, 죽음을 앞둔 순임이 자신에게 남긴 카메라를 전해 받은 그가 카메라 안에 있던 필름을 햇빛에 노출시켜 다시는 볼 수 없게 망가뜨려 버릴 때, 과거의 사랑이나 순수함과의 마지막 연결점을, 그리고 삶과 희망을 선택할 수 있을 순간을 자기 손으로 없애 버린 영호의 뒤로 다시 기차가 ‘지나간다.’ 결국 영호를 죽음에 이르게 한 ‘달리는’ 기차는 광주에서부터가 아니라 영호 스스로가 자신의 삶을 진창에 처박기로 결정한 순간부터 그의 마지막을 향해 운행을 시작한 셈이다.
이 영화가 보편적 개념의 ‘죄’를 논하는 일에 관심을 둔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이 작품의 경계 안에서 ‘죄’를 찾는다면 실망과 좌절, 혐오 속에서도 희망과 아름다움을 찾으려는 분투와 노력,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고통과 괴로움을 포기하는 태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운동권 학생을 고문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 ‘악질’ 형사이던 1987년의 영호가 그 학생의 일기에서 본 "삶은 아름답다"는 구절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있는 대목이 이번에 색다른 의미로 다가왔던 것도 그 때문이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학생에게 건네는 영호의 표정에서는 경로를 이탈한 채 길을 잃은 영혼의 허무함과 고단함이 그대로 묻어 나온다.
우리가 시대와 사회의 현상에 휩쓸려, 실수로 혹은 방관적으로 다양한 죄를 짓고 살아가는 것을 이 영화는 탓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돌아가고 싶은’ 온전한 과거의 한 순간, 타락의 모든 책임을 떠넘길 단 하나의 ‘원죄’를 내세우며 우리를 쉽게 해방시켜 주지도 않는다. 바른 길에서 벗어난 질주를 제자리로 돌려 놓을 기회는 우리의 생각보다 자주 다가오며 곁에 있는 이들에게 상처 주지 않는 길 또한 언제나 열려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킴으로 말이다. 믿는 사람이 선택해야 할 여정이란 결국 "삶은 아름답다"는 구절을 억지로라도 받아들이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를 태운 기차는 뒤가 아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엄마 C의 시선
긴 설명이 필요 없을 한국 영화 “박하사탕”은 “새 천년”이 시작되는 첫날, 즉 2000년 1월 1일 개봉된 이후 “공동경비구역 JSA(2000),” “봄날은 간다(2001),” “올드보이(2003),” “괴물(2006)” 등과 함께 2000년대를 대표하는 한국 영화 명작으로 손꼽히게 된, 또한 지금은 이름이 널리 알려진 전직 소설가 이창동이 각본을 쓰고 본인의 감독 데뷔작인 “초록물고기”에 이어 두 번째로 연출을 맡았던 작품입니다. “대종상영화제”와 “백상예술대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등의 국내 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 감독상, 시나리오상, 신인남자배우상/남우주연상과 같은 주요 부문의 상들을 휩쓴 것은 물론, “칸 영화제 감독주간”에 초청되고 노르웨이 “오슬로영화제”에서도 연기 부문에서 수상했을 만큼 영화의 메시지와 작품성 모두에서 확고한 인정을 받은 수작이지요.
영화의 시간적 흐름이 과거에서부터 현재나 미래로 이어지는 보편적 구조(선형적 구조)를 택하지 않고 현재에서 시작해 점점 조금씩 더 과거의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특이한 구조(비선형적 구조)를 선택했다는 것뿐 아니라, 이 영화를 생각하면 저절로 떠오르는 “나 다시 돌아갈래”라는 대사와 함께 주인공 “김영호”의 생을 마감하게 하는 ‘기차’라는 매개체를 사용해 한 단계씩 과거로 향해 가는 내용들을 7개의 챕터로 구성한 형식 역시 무척 독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시간상으로 맨 마지막 부분(영화 내용상으로는 시작 부분)인 1999년에서 출발한 영화는, 주인공의 순수하고 풋풋한 첫사랑을 보여 주는 1979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마무리되는데, 한국 현대사의 격동기와 맞물린 그의 삶을 빌어 잔인한 공권력이 한 개인의 인생을 파멸시키는 과정을 처절한 이야기로 풀어 내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인생 영화”로 꼽는, 그리고 비평가 이동진이 별 5개를 선사한 몇 안 되는 한국 영화 중 하나임에도 이런 요인들로 인해 볼 때마다 가슴에 심한 통증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다시 보기 전에 충분한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영화이기도 합니다.
“야유회”라는 제목의 “쳅터(Chapter) 1”은 영화 순서로는 시작 부분이지만 이 영화의 내용상으로는 – 위에서 말했듯 –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끝부분으로, 1999년 봄 “가리봉 봉우회”의 모임에 느닷없이 나타난 주인공 영호가 오랜만에 모인 그들의 유흥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장면이자 영호 자신의 삶’이 마침표를 찍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노래방 기계의 마이크를 빼앗아 난동 수준으로 소리 지르고 춤을 추며 분위기를 망쳐 놓던 그가 갑자기 기찻길 선로 위에 올라서서 “나 다시 돌아갈래!”를 절규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 참혹한 모습을 마주할 때, 너무도 갑작스럽고 영문을 알 수 없는 그 상황이 불러오는 당혹감과 비통함은 영호의 친구들뿐 아니라 관객들 모두의 몫이 되고 맙니다.
그 일이 일어나기 사흘 전으로 시간을 거스른 “챕터 2”는 “사진기”라는 제목이 붙은 에피소드로, IMF 사태로 모든 것을 잃은 마흔 살의 영호가 단 하나 남은 소유물인 자동차를 타고 어딘가로 향하면서 라디오를 통해 흘러 나오는 “가리봉 봉우회” 야유회의 안내 방송을 듣는 모습이 비춰집니다. 수중에 있던 돈을 모두 털어 어렵사리 구입한 권총으로 차 안에서 자살을 시도하다 실패한 그는, 복수 대상인 듯한 누군가를 찾아가 사살하려다 역시 실패한 후 “강아지가 보고 싶다”는 핑계로 이혼한 아내의 집을 찾았다가 문전박대 당합니다. 주룩주룩 비가 쏟아지는 밤, 자신의 거처인 비닐하우스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낯선 사내로부터 그가 자신의 첫사랑인 “윤순임”의 남편이며 투병 중인 그녀가 마지막으로 자신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 말을 듣고 병원으로 찾아간 영호는, 순임이 보관하고 있던, 자신의 젊은 시절 추억이 담긴 카메라를 받아와 중고품으로 헐값에 팔아 버리고는 그 돈으로 빵과 우유를 사 먹으며 오열합니다.
“삶은 아름답다”라는 제목의 “챕터 3”은 그로부터 5년 전, 35세이던 영호를 보여 주며 시작됩니다. 동업으로 가구점을 운영하는 그는 주식으로도 돈을 버는 등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삶을 누리는 것으로 보이지만, 아내인 “양홍자”가 운전 교습 강사와 바람 피는 현장을 급습해 상대 남성에게 폭력을 가한 직후 본인은 자기 가구점에서 일하는 여직원과 외도를 하는 충격적인 모습 또한 보여 줍니다. 여직원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러 고깃집에 간 영호는 과거 형사로 근무하던 당시 자신이 심문했던 남성과 그곳에서 우연히 마주치는데, 처음에는 그들이 어떤 관계인지 의아할 수밖에 없던 관객들은 화장실에서 다시 만난 영호가 무심한 듯 건네는 “삶은 아름답다... 그렇죠?”라는 말에 얼굴빛이 사색으로 변하는 남성을 보며 그들 사이의 관계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게 됩니다.
이와 직접적으로 내용이 연결되는, “고백”이라는 제목이 붙여진 “챕터 4”에서는, 민주화운동이 한창이던 1987년 봄, 아직 신혼이자 만삭의 상태임에도 그런 아내 홍자에 대한 사랑이 전혀 없음을 표정에서도 숨기지 못하는 영호의 모습을 목격하게 됩니다. 중견 형사로 근무하고 있는 그는 운동권 수배자의 지인을 잡아와 폭행과 물고문으로 수배자의 소재지를 알아내는데 – 이때의 지인이 고깃집에서 우연히 만났던 그 남성으로, 청년 시기의 그가 자신의 일기장에 적어 둔 글이 바로 “삶은 아름답다”라는 문장이었던 것이지요 – 수배자를 찾아가 잠복근무를 하던 중 카페에서 만난 여종업원과 하룻밤을 보내는 영호가 첫사랑 순임에 대한 그리움을 그녀에게 투영시키는 모습은 보는 이의 마음을 시리도록 만듭니다.
다시 3년 전인 1984년 가을로 돌아가는 “챕터 5”의 제목은 “기도”로, 아직 풋내기 형사인 영호는 심한 고문에도 입을 닫고 있는 학생에 대한 폭행을 막아 보려 애를 쓰다가 고집을 꺾지 않는 그에게 도리어 끔찍한 폭행을 가하고 맙니다. 하필 그날 영호를 찾아온 순임이 그의 단골 식당에서 마주 앉은 자신에게 그의 손을 처음 봤을 때 그런 손을 가진 그가 착한 사람일 거라 생각했다는 말을 하자 영호는 그 ‘손’으로 순임 앞에서 식당 주인의 딸인 홍자를 보란 듯이 성추행하지요. 눈물을 흘리며 자리를 뜨던 순임이 사진을 찍고 싶다던 그의 옛말을 상기시키며 준비해 온 사진기를 건네지만, 기차를 타고 떠나는 순임에게 사진기를 그대로 되돌려 준 영호는 스스로에 대한 좌절감으로 자신을 짝사랑하던 홍자와 하룻밤을 보내고, 그런 그의 손을 잡고 “주기도문”을 외우는 홍자의 ‘기도’가 무척이나 우스꽝스럽게 이어집니다.
순수하던 영호의 삶이 어긋나기 시작한 첫 단계를 보여 주는 “챕터 6”의 시간적 배경은 1980년 5월인데, “면회”라는 제목과는 달리 전방 보병 사단 소속의 신병 영호를 만나기 위해 부대로 면회 온 순임과 계엄령의 발동으로 긴급 출동하느라 그녀를 만나지 못하는 영호의 엇갈림이 안타깝게 화면을 채웁니다. 출동을 위해 군용 트럭에 탑승했다가 헛걸음을 하고 혼자 산길을 걸어가던 그녀를 먼발치에서 바라보았던 영호는, 한밤중 도착한 광주에서 발에 총상을 입고 부대원들로부터 뒤처지게 됩니다. 귀가 길에서 군인을 보고 두려워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여고생에게 빨리 집에 가라며 재촉하느라 발포한 위협 사격이 뜻하지 않게 그녀를 맞추자, 그 자리에서 사망한 여학생을 품에 안은 영호는 “일어나... 빨리 집에 가야지”라며 울먹이다 끝내 오열하고 말지요.
갑작스런 출동 명령으로 군장을 챙기던 영호가 순임이 그동안 보내 줬던, 그래서 자신의 반합에 모아 두었던 박하사탕을 떨어뜨려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는 “챕터 6”의 장면과, 순임이 입원한 병원을 찾아간 영호가 오는 길에 산 병에 든 박하사탕을 그녀의 침대 맡에 두고 가는 “챕터 1”의 장면은, 1979년 구로공단의 야학에서 만난 영호와 순임, 박하사탕 공장에서 일하던 순임과 사진 찍기에 관심이 있다던 영호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 “소풍”이라는 제목을 가진 “챕터 7”에서 그들이 꿈꾸던 - 삶이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음을 상징하는 듯합니다. 영호가 시장에서 사 들고 온 지금의 박하사탕은 어떠한 방법을 쓰더라도 순임이 정성껏 싸 보냈던 예전의 박하사탕과 같은 것일 수 없다는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 다시 회복되는 일이 불가능한 그들의 관계와 “다시 돌아가는” 일이 불가능해진 그들의 삶에 대한 상징인 듯 느껴진다는 것이지요.
“역사의 수레바퀴 밑에서 으깨지는 개인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나 영화가 적지 않지만, 한국의 현대사라는 특수 상황 속에서 무참히 짓밟히고 ‘망가져’ 버린 한 개인의 삶을 이토록 현실감 있게 그린 작품은 드물지 않을까 싶을 만큼, 주인공 김영호와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삶이 철저히 부숴지는 과정을 생생하게 그려낸 이 작품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서는, 지금 이 순간 한국 국민들이 맞닥뜨리고 있는 현실은 물론 미래의 대한민국을 위해서도 반드시 반추되어야 할 역사의 한 페이지로서 기억되고 평가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문학적 수준에서나 역사적 측면에서 큰 가치를 갖는 이 작품이 기독교인인 저에게 약간의 ‘불편함’을 느끼게 하는 부분이 있다면 영화의 내용 중 두 번이나 등장하는 아내 홍자의 ‘기도’ 장면인데, 결혼 전 짝사랑하던 영호와 동침하면서 외는 기도와 결혼 후 가구점 직원들을 초대해 집들이하는 자리에서 ‘뜬금없이’ 혼자 시작하는 기도가 모두 어색하고 희화화된 모습으로 그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감독 이창동은 훗날 자신의 영화 “밀양”에서도 하나님을 향해 정면으로 ‘선전포고’ 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는데, 저만의 개인적 견해일지 모르지만 기독교나 하나님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는 – 그래서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식으로 대충 넘어가는 – 작가나 예술가들에 비하면 이런 식의 반감을 통해서나마 진지한 방식으로 접근하는 편이 훨씬 희망적인 경우가 아닐까하는 생각도 종종 해 보게 됩니다. 성경의 오류를 찾아내기 위해 열심히 성경을 읽다가 회심하게 된 무신론자의 이야기는 흔히 접하지만 성경이나 하나님에 대해 호감도 반감도 없는 이들이 회심하는 경우는 확률상으로 드물다는 사실을 고려하더라도 말이지요.
나이가 들어 더 이상 ‘젊지 않은’ 사람들 중에는 자신의 청춘 시기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절대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손사래 치는 사람들 역시 존재하는 듯합니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암울한 시기였다고 할 수 있을 – 어쩌면 바로 지금이 더 암울한 시기인지도 모르겠지만 – 1970-80년대에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의 시절을 보냈던, 그리고 청장년 시기까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암흑’의 삶을 살았던 저이기 때문인지 결코 과거의 그 시절로는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데, 이 영화에서의 “나 다시 돌아갈래!”라는 절박한 외침을 생각하면 그때로 되돌아가고 싶은 시절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오히려 하나님을 알고 믿고 의지하는 ‘지금’이 훨씬 행복하고 감사하다는 사실이 큰 축복 아닐까 하는, 이 무거운 영화에 대한 조금 가벼운 위안감으로 이번 글을 마무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