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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병기 활: 바람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

by Joanne

딸 J의 시선



김한민 감독의 2011년 작 [최종병기 활]은 [명량]이라는 메가히트작을 내놓으며 "액션 사극" 장르로 입지를 단단히 다지게 될 감독 자신의 이후 행보에 대한 전조처럼 느껴지는 작품이다 -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가 [명량]보다 더 명료하고 단단한 중심을 가진 것으로 생각되긴 하지만 말이다. 장점만큼이나 단점도 뚜렷한 작품이지만 액션 영화 혹은 ‘오락 영화’로서는 상당히 효율적으로 제 몫을 다했다고 본다.





영화는 "병자호란"의 혼돈을 그 배경으로, 역사의 눈먼 폭력에 휩쓸려 갈가리 찢겨 나가면서도 어떻게든 서로의 손을 놓지 않으려는 한 ‘가족’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작품의 실질적 주인공 "남이"(박해일)는 본래 정통 무신 가문에서 자란 귀한 도련님이지만, 인조반정 시기에 아버지가 역적으로 몰리며 여동생 "자인"(문채원)만을 데리고 간신히 도망쳐 아버지의 친우인 "김무선"의 집에서 숨어 자란 인물이다. 역적의 자식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껴 온 것은 물론 입신양명의 길 또한 영영 막혀 버린 채 공부도 무예도 손에서 놓아 버린 남이는, 하인들과 함께 들짐승 사냥이나 다니며 한량처럼 세월을 허비한다. 그처럼 자신과 동생의 불안정한 처지, 그 무엇도 본인의 이름으로 이뤄 낼 수 없는 현실에 절망하며 비관에 빠져 버린 남이와 달리, 동생 자인은 김무선의 아들 "서군"(김무열)과 연정을 키워 나가고 남매를 어린 시절부터 아끼며 친자식처럼 키워 온 김무선이 서군과 자인의 혼인을 허락(!)하면서 그들의 어정쩡한 삶에도 밝은 빛이 드리울 듯 보인다.





하지만 자인과 서군의 혼례식 당일 청나라 군사들이 조선을 침공해 남이와 자인이 사는 마을까지 쳐들어오면서 이들의 미래는 혼돈스런 난장에 처박힌다. 김무선은 청나라 군사들에게 맞서 싸우다 살해 당하고, 자인과 서군은 혼례복 차림 그대로 포로가 되어 청나라로 끌려간다. 동생의 혼례식에 참석하는 대신 혼자 활을 쏘며 산에 있던 남이는 청군의 침공을 목격한 뒤 급하게 마을로 돌아오다 청나라 황실 정예단 "니루"를 이끄는 장군 "쥬신타"(류승룡)와 맞닥뜨린다. 쥬신타와 그의 부하들을 상대하느라 시간을 지체한 남이는 시신들만 남아 있는 마을로 돌아와 절규하고, 아버지의 유품인 활과 화살을 챙겨 청나라 부대를 뒤따르기 시작한다.





몇몇 하인들과 함께 무방비로 끌려가던 서군 역시 압록강 어귀에서 도망치는 포로들을 끔찍하게 죽이는 청나라 군인들에 대항하다 그의 뒤를 쫓아온 남이의 도움을 받아 적군을 제압하는 데 성공한다. 두 사람은 함께 적군의 진지에 잠입해 자인을 구해 내지만 이 과정에서 남이가 청나라의 황자 "도르곤"(박기웅)을 불에 태워 죽이게 되는데, 직전까지 산속에서 남이를 추격하다 막사로 급히 돌아온 류신타는 자신의 주군일 뿐 아니라 사랑하는 혈육이던 도르곤의 끔찍한 시신을 보며 무시무시한 분노를 내뿜는다. 직접 사냥해서 잡은 범의 가죽으로 외투를 지어 입힐 만큼 아끼던 조카의 죽음 앞에 그의 복수심은 맹렬히 타오르고, 남이를 생포해 끔찍한 고통을 안겨 주고자 부하들과 함께 그와 일행을 뒤쫓는다.





앞서 말했듯 이 영화에는 여러 단점들이 존재하며, [명량]에서 정점을 찍지 않았나 싶은 김한민 감독 특유의 신파적 코드와 살짝 오글거리는 대사들, 조선 백성들이 적군에게 대항하는 장면에서의 연출적 엉성함 등은 감독의 여러 작품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 작품에서는 그런 아쉬운 점이 개인적으로 크게 거슬리지 않았는데, 이는 [최종병기 활]이 전반적으로 꽤 절제되고 객관적인, 그리고 서사적 군더더기 없이 상황과 액션에 집중하는 영화이기 때문일 듯하다. "여동생을 구하겠다"는 남이의 목표와 "조카의 죽음에 복수하겠다"는 쥬신타의 목적은 단순하고 맹목적인 만큼이나 이해가 쉽고, ‘생존’ 혹은 ‘보복’을 위한 이들의 여정이 질질 끄는 요소 없이 능률적인 속도로 클라이맥스까지 치닫고 있다는 것이다.


대규모 전쟁 씬 대신 ‘활’이라는 무기의 특성에만 초점을 두는 접근 또한 작품의 성공 요인으로, 후반부로 갈수록 다양한 종류의 화살들이 활용되고 있는 점이나 웅장한 배경 음악, 특별한 효과음 없이도 바람 소리와 활이 팽팽히 당겨지는 소리, 화살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만으로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연출 등이 특히 영화의 긴장감과 몰입도를 높여 준다. 칼이라는 근거리 무기와 달리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자신을 은폐한 채 사용할 수 있는 활의 특성상 적의 공격을 쉽게 예측할 수 없다는 공포와 불안감 또한 관객들에게 같은 강도로 전염된다.





물론 이 대목에서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은 이 영화와 멜 깁슨의 2006년 작 [아포칼립토](Apocalypto) 사이에서 발견되는 유사성이다([최종병기 활]의 개봉 당시에도 어느 정도 논란이 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서사의 구조나 화면의 앵글, "데우스 엑스 마티나"(deus ex machina)처럼 주인공의 위기 상황에 등장해 적을 상대하는 거대한 포식 동물 등등 실제로 이 영화의 주요 장면들이 [아포칼립토]의 그것들과 꽤 흡사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좀 더 정확히 따져볼 때 이 영화가 어떤 특정 작품을 표절했다기보다 강한 적군에게 인질로 잡힌 주인공의 구출과 도주를 소재로 한 영화들이나 대규모 전쟁을 배경으로 삼은 영화들, 혹은 리들리 스콧의 [로빈 후드]처럼 ‘활’이나 ‘궁수’를 내세우는 작품들에서 흔히 반복되는 여러 클리셰들을 충실히 따르며 한국의 역사적 상황에 ‘현지화’시켰다고 이해하는 것이 더 옳지 않을까 싶다.


한편 이번에 영화를 다시 보며 눈에 띄었던 것은 이런 ‘전쟁 영화’ 혹은 ‘액션 활극’들이 이 작품에 남긴 영향과는 조금 다른 부분이었는데, 이 부분을 등장인물인 남이와 쥬신타 사이의 유사성 혹은 평행적 관련성(parallelism)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듯하다. 이들 둘이 ‘동전의 양면’ 같은 존재라는, 즉 서로 다른 국가, 다른 진영에 속해 있지만 영화 내에서 두 사람의 행동을 주도하는 궁극적 동기(motivation)가 ‘가족, 혹은 아끼는 이를 향한 마음’이라는 것으로, 남이의 분투가 동생 자인을 살리려는 마음에서 비롯된다면 쥬신타의 복수 또한 조카 도르곤을 사랑하고 그의 죽음에 분노하는 ‘감정’에서 유래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이들 사이의 갈등은 조선과 청나라 간의 복잡한 정치적 관계와 힘의 논리에서 벗어난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사로운 문제의 결과인 셈이다.





반면 이들을 궁극적으로 구분 짓는 것은 그들의 원동력이 되는 ‘감정’의 성격 그 자체로 보인다. 영화 속에서 쥬신타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남이에 대한 ‘증오’로 - 물론 실제적인 면에서 자신이 섬기던 황족을 살해한 자를 끝까지 쫓는 것이 장수의 도리인 것도 사실이지만 - 그는 수족처럼 아끼던 부하의 죽음도, 저주처럼 나타나 그들의 앞길을 막은 호랑이의 존재도, 불길한 예감이 든다며 추적을 계속하길 망설이는 부하들의 두려움도 무시한 채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자신의 종말을 향해 달려간다. 그 어떤 두려움이나 슬픔도 그 자신의 ‘분노’와 ‘증오’에 잡아 먹힌 듯 보이는 쥬신타는, 그렇기에 처음부터 끝까지 흔들림이 없으며 어떤 면에서는 남이보다 훨씬 더 강해 보이기도 한다.


이에 반해 남이는 영화 내내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아버지를 잃고 동생과 함께 도망친 이후의 그는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두려운 삶을 살아 온 사람이다. 동생 자인이 "이럴 거면 그때 같이 죽지 그랬냐"며 화를 낼 정도로 변변한 신분과 설 땅이 없는 자기 처지에의 인정조차 두려워하는 그는, 소중한 동생이 상처를 받을 것이 두려워 다시 한 번 그녀를 데리고 현실로부터 ‘도망칠’ 생각까지 한다. 도르곤에게 끌려가 능욕을 당할 뻔한 상황에서도 용감하게 대항하며 혈육을 두고 가느니 차라리 같이 죽자고 소리칠 만큼 담대한 동생 자인과 달리, 오빠인 남이는 아버지의 죽음 당시 느꼈던 그 공포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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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던 남이가 아버지의 마지막 당부대로 결국 ‘두려움을 직시’하게 되는데, 그 계기는 분노도 증오도 아닌 ‘사랑’에 의해서이다. 영화의 마지막, 죽음에 이르러 피를 토하면서도 쥬신타를 향해 활을 겨누는 남이를 지탱하는 것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살리고 싶은 동생을 향한 절절한 마음이다. 그는 두려움을 무시하거나 잊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사랑을 품음으로써 살아남기 위해 아버지를 뒤로 하고 떠났던 어릴 적의 트라우마를 마침내 극복해 낸다. 증오와 독선에 시야가 가려진 쥬신타와 달리 사랑과 헌신을 통해 진정한 내면의 눈을 뜨게 된 남이는 그래서 자신이 진심으로 원했던 목표, 기어코 모든 것을 바쳐 자인을 살리는 일에 성공하며 평안에 이른다.


‘악인’과 ‘선인’을 구분하는 기준이 생각보다 모호하다고 느껴질 때가 많다. 남이를 쫓던 쥬신타 역시 본인에게는 합리적이며 ‘옳은’ 이유가, 더욱이 남이의 목적과도 비슷한 결을 띈 동기가 있었듯, 우리 모두에게도 주관적인 자신만의 입장과 바람, 심지어 원한까지 있을 테니 말이다. 결국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은 ‘사랑’의 유무가 아닐까 싶다. 분노와 혐오로 눈이 가려진 줄도 모른 채 서로 자신이 의롭고 선하다고 확신하며 개인의 목적을 이루고자 거침없이 자기의 길을 내려는 혼란한 세상 속에서, 오직 사랑만이 우리를 옳은 곳으로 인도할 테니까.





P.S. 이 영화 속에서 백성을 두고 도망친 나랏님을 탓하던 "남이" 역의 박해일이 몇 년 후 [남한산성]에서는 바로 그 "인조"를 연기했다는 사실도 흥미롭고 의미 있게 다가온다. 나의 옳음과 의로움을 자신하며 살지만 그 언제든 다른 누군가에게 ‘악인’이 될 수 있는 우리의 사정과도 비슷해 보인다는 점에서.




엄마 C의 시선



2011년 개봉된 한국 영화 “최종병기 활”은 사극 연출에 능한 것으로 알려진 감독 김한민이 연출을 맡았던, 그래서인지 역시 역사적 사건인 “병자호란”을 소재로 제작된 사극입니다. “명량,” “한산,” “노량” 등 소위 “이순신 3부작”이라 불리는 역사물의 흥행으로 지명도를 확고히 하게 된 김한민 감독은, 자신의 세 번째 작품인 이 영화에 장편 데뷔작이던 “극락도 살인사건”에서 주연을 맡았고 이후 “한산”에서 이순신 장군 역할을 하게 될 – 그리고 “살인의 추억,” “괴물,” “이끼,” “헤어질 결심” 등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 주며 입지를 넓힌 – 배우 박해일을 주연으로 기용했습니다. 이에 대해 주인공 박해일은 “대종상 영화제”와 “청룡영화상”에서 남우주연상 수상으로 응답했을 뿐 아니라, 작품 자체도 여러 국내 영화제들에서 남우조연상, 촬영상, 기술상 등을 휩쓴 데 이어 뉴욕아시안영화제, 도빌 아시아 영화제, 아시안 필름 어워즈 등 다양한 해외 영화제에 초청되는 성과를 거두었지요.


우연치 않게도 정확히 1년 전 저희가 다루었던 사극 “남한산성”과 동일한 역사 배경, 즉 “병자호란”을 주제로 만들어진 이 작품은, 인조 재위 14년인 1636년 겨울에 일어났던 – 정확히 말하면 1636년 12월 말 발발해 이듬해인 1637년 2월 말까지 계속된 – 외란 상황들을 그리고 있는데, 청나라 대군에 쫓겨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후에도 주화파(主和派)와 척화파(斥和派)로 나뉜 조정의 이견 사이에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며 우유부단함을 보이다 결국 대신들과 함께 청 황제 홍타이지에게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의 수모를 - “삼전도의 굴욕”이라는 오명으로 알려진 - 겪었던 무능한 왕 인조 치하에서 극심한 고통을 감내해야 했던 백성들의 실상을 극적 설정에 의해 묘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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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측면에서 인조 왕 집권의 ‘부작용(side effect)’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을 듯한 이 영화는, “인조반정” 당시 그 내란, 즉 ‘쿠데타’에 반대하던 아버지가 역적으로 몰려 목숨을 잃은 후 어린 여동생과 함께 개성에 있는 아버지의 친구(무관 김무선) 집으로 피신해 신분을 속이고 성장한 “남이”라는 청년을 주인공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입니다. 아버지가 처단되는 장면을 직접 목격한 데다 하루 아침에 명예로운 무신 가문의 자제에서 수치스런 ‘역적 집안’의 자식이라는 신분으로 전락하게 된 남이는, 어차피 노력해도 자신이 세상에 나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는 패배의식과 자격지심을 품은 채 아버지가 남겨 준 유품인 활로 사냥이나 하고 다니는, 또한 김무선 집안의 하인들과 어울려 술 마시고 싸움질이나 하는 것으로 소일하는 삶을 이어갑니다.


그런 그가 끔찍이도 소중하게 여기는 단 하나의 존재는 아버지가 숨을 거두며 자신에게 부탁한 여동생 “자인”이었는데, 김무선의 집에서 더부살이하며 눈치밥을 먹고 자란 그로서는 함께 성장한 김무선의 아들 “서군”이 자인을 연모해 혼담이 오가는 상황조차 기쁨보다는 걱정과 불안의 요소로 작용할 뿐입니다. 서군의 어머니이자 자신들의 양모 역할을 해 온 김무선의 아내 또한 여동생과 자신을 “역적의 자식”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그런 분을 시어머니로 모시고 살아야 할 동생의 마음고생을 미리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두 사람의 혼사가 결정되었을 때 남이가 동생을 향한 속 깊은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혼인 당일 자인의 방 앞 댓돌 위에 꽃신 한 켤레를 말없이 남겨 두고 가는 일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우여곡절 끝에 맞이한 자인의 혼례 날 청나라 군대가 쳐들어와 마을 사람들을 끌고 가면서 혼례를 치르던 서군과 자인까지 그들에게 포로로 끌려가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이제 여동생도 혼인을 하고 안정된 삶을 누리게 된 만큼 더 이상 그 집에 얹혀 살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며 혼자 조용히 떠나려던 길에 외적의 침입을 목격한 남이가 도중에 마주친 청군과 대결하다 겨우겨우 집으로 돌아오지만, 자인과 서군은 이미 끌려간 상태였고 자신을 거둬 준 김무선과 그의 아내 모두 죽임을 당한 후였습니다. 자기가 가진 유일한 무기이자 특출한 장기인 활을 챙겨 청나라 군대를 쫓기 시작한 남이 앞에 놓인 뜻밖의 난관은 그들을 데려간 군대가 청나라 황실의 정예 부대인 “니루(Niru)”라는 것이었습니다. ‘신궁’이라 불릴 만한 활 솜씨로 청군의 심장부를 공격하며 적군을 하나하나 처치해 가는 그이지만 남이의 놀라운 실력을 알고 난 후 그를 주목하게 된 청군의 명장 “쥬신타”가 도리어 추격해 오기 시작하면서 활로 자웅을 겨루는 긴박감 넘치는 전투가 벌어집니다.


온갖 위험과 난관을 극복하며 하나뿐인 여동생 자인과 그녀의 남편이 된 서군을 구하려는 일념으로 압록강까지 다다른 남이는 청군과 용감히 맞서 싸우던 서군을 그곳에서 만나 함께 자인을 찾아나서고, 그런 그들은 젊은 여성들을 따로 모아 자신의 “시침녀(첩)”로 유린하려는 황태자 “도르곤”에게 목숨을 걸고 저항하던 자인과 극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자인과 서군을 먼저 떠나보낸 후 인질로 삼고 있던 도르곤까지 살해하고 동생 부부와의 재회를 위해 다시 압록강 쪽으로 향하던 남이를 쥬신타가 끝까지 쫓아오면서 그 둘 사이의 마지막 대결이 벌어지는데, 남이에게 끔찍한 죽임을 당한 도르곤의 삼촌이기도 한 쥬신타와 자신을 보고 반가워 달려오던 자인을 사이에 둔 남이인지라 그들 간의 대결은 한 치의 양보도 허락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활이 날아오는 방향을 예측할 수 없다는 남이의 곡사(曲射)와 엄청난 파괴력을 자랑하는 쥬신타의 육량시(六兩矢) 사이 대결의 결말이 남이의 승리로 끝나기는 하지만 그 역시 쥬신타의 화살에 치명상을 입게 됩니다.





예전에 이 영화를 볼 때는 대다수 한국 역사물에서 그다지 부각되지 않던 ‘활’을 소재로 한 ‘액션 사극’이라는 점과 박진감 넘치는 영상, 스토리 등을 쫓느라 미처 깨닫지 못했다가 이번에 다시 보면서 새로이 주목하게 된 부분이 있었는데, 애초 남이와 자인이 이처럼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된 이유는 인조가 일으킨 ‘반정’ 과정에서 그들의 아버지가 사망하고 집안이 풍비박산되었기 때문이라는, 사건의 근본 원인과 관련한 측면이었습니다. 아마도 불안하고 혼란스런 한국의 현재 상황과 인조반정이라는 - “조선의 4대 반정” 중 하나로 불리는 - ‘내란’ 상황에 존재하는 공통점이 저의 주목을 불러온 것이 아닐까 싶은데, 이처럼 불안정한 국내 정세의 결과로도 볼 수 있을 외란(병자호란)의 발생으로 인해 힘겹던 백성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지게 되었지요.


한양에서 개성까지 자신을 찾아온 남이와 자인에게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 없는지를 김무선이 묻자 “사직과 백성의 안위가 바람 앞의 등불이니 어이할꼬”라 했음을 전한 남이의 말이나, 포로가 되어 청나라에 갔다가 압록강을 건너 도망쳐 오는 백성들에게 왕이 도리어 죄를 묻는다더라는 하인의 말에 “나라도 백성도 버린 그 임금은 이미 큰 죄인이오”라고 답하는 남이의 말 역시 무능하고 비겁한 위정자가 백성들에게 끼치는 해악이 얼마나 큰지를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실제 역사상으로도 포로나 인질이 되어 끌려간 50만 명의 백성 중 전쟁이 끝난 후 나라에서의 송환 노력을 통해 돌아온 사람은 전무하며 스스로의 힘으로 되돌아온 몇몇 사람들만 존재한다고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 역시 참담한 마음을 금할 수 없게 합니다. “각자도생’이라는 말이 지금 상황에만 해당하는 표현인 줄 알았는데 역사는 ‘반복’되는 정도가 아니라 혹 ‘퇴보’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데에까지 생각이 미치면 더욱더 착잡한 마음이 되기도 하지요.





그럼에도 우리가 희망을 버리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모든 상황 속에서”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불꽃 같은 눈동자로 지켜 주시며 끝끝내 뜻을 이뤄 가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며, 또한 이 영화를 생각하면 누구나 가장 먼저 떠올릴 “바람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다”라는 대사 때문이기도 합니다. 본래 “한국의 활쏘기”라는 정진명의 책에 수록되어 있던 “활은 바람을 타고 쏘는 것이 아니다. 극복해서 쏘는 것이다”라는 구절을 감독이 살짝 변형해 사용한 것이라는데, 역사의 흐름과 민족의 아픔을 극복하겠다는 비장한 선언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또 지나치게 ‘띄우려고’ 한 의도가 너무 번연히 드러난다는 엇갈리는 반응도 존재한다지만, 인생의 철학을 담고 싶었다는 감독의 의도처럼 양궁 선수(!)들이 가장 좋아하며 공감하는 대사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역시 전자의 평가, 그리고 ‘양궁 선수’들의 공감에 동조하는 저의 입장에서는 그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신앙인의 자세도 그러해야 한다고 해석하게 됩니다. 비록 눈을 뜨고 있을 때 보이는 현실은 암담하고 큰 희망이 없는 듯 여겨지지만 눈을 감아야 보이는 미래에서는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라도 하실 수 있는” 그분(눅 18:27; 슥 8:6)으로 인해 마침내 이 어려움들이 ‘극복’되리라는 믿음을 견지하는 자세 말이지요. 지금의 ‘바람’이 우리의 ‘계산’상으론 도저히 ‘순풍’이 될 가능성이 없는 것이겠지만 인간의 계산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힘과 능력에 의지해 ‘극복’해 나간다면 언젠가 옛말을 하며 웃을 수 있는 날이 꼭 오리라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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