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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향해 쏴라: ‘낭만’에 대하여

by Joanne

엄마 C의 시선



지난 9월 16일 세상을 떠났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진 전설적 배우 로버트 레드포드(Robert Redford)를 추모하는 마음으로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내일을 향해 쏴라(Butch Cassidy and the Sundance Kid)”를 다루면 좋겠다는 데에 딸과 의기투합을 했습니다. 워낙 오래된 영화이다 보니 제목은 익숙해도 직접 보았거나 내용을 자세히 기억하는 분들은 많지 않을 수 있을 이 작품은 사실 그 원제부터가 한국 관객들에게 낯선 것일지 모르겠습니다. 중고교 시절 TV화면으로 – 아마도 “주말의 명화”쯤 될 듯한 프로그램으로 – 처음 보았던 저 자신도 “내일을 향해 쏴라”로 의역된 제목이 더 익숙한 이 영화의 원제가 두 주인공의 이름을 그대로 붙인 “버치 캐시디와 선댄스 키드(Butch Cassidy and the Sundance Kid)”이기 때문이지요.


위에서 그를 ‘배우’로 소개했고 이 영화뿐 아니라 “스팅(The Sting),” “추억(The Way We Were),” “위대한 갯츠비(The Great Gatsby),” “머나먼 다리(A Bridge Too Far),” “내추럴(The Natural),” “아웃 오브 아프리카(Out of Africa)”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여러 명작에서 배우로 크게 명성을 얻은 로버트 레드포드지만, 사실은 “보통 사람들(Ordinary People),” “흐르는 강물처럼(A River Runs Through It),” “퀴즈쇼(Quiz Show),” “호스 위스퍼러(The Horse Whisperer)” 같은 역작을 직접 연출하거나 다양한 작품들을 제작한 영화 감독, 제작자로서의 면모도 그 못지않습니다. 이번 작품의 원제인 “Butch Cassidy and the Sundance Kid”의 배역(후자) 이름을 따 걸작 독립 영화 발굴의 산실이 된 “선댄스 영화제(Sundance Film Festival)”를 만든 설립자로도 잘 알려져 있고 말이지요. 뿐만 아니라 국제적 환경보호운동과 평화운동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온 이력으로 2010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Ordre National de la Légion d’honneur)”을 수여 받는 영예도 누린 바 있다고 합니다.



이 영화 시나리오의 원작자인 윌리암 골드먼(William Goldman)에 따르면 극본의 원래 제목은 “The Sundance Kid and Butch Cassidy”였다고 – 주인공들의 이름 순서가 반대였다고 – 하는데, 제 42회 미국 아카데미 4개 부문(각본상, 촬영상, 음악상, 주제가상)과 제 24회 영국 아카데미 9개 부문의 수상으로 잠재력을 보이기 시작한 이 작품은 이후 서부극 10대 걸작과 미국 영화 연구소(AFI) 선정 가장 위대한 영화 72위 선정, 2003년 미 의회도서관에 의한 국립영화등기부 보존 결정 등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작으로 평가 받게 되었습니다. 아카데미 음악상과 주제가상 부문 수상을 방금 언급했듯 이 영화의 주제곡인 “빗방울은 내 머리 위로 떨어지고(Raindrops Keep Fallin' on My Head)”는 영화를 보지 않은 이들을 포함한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의 귀에 친숙할 만큼 잘 알려진 곡으로, “선댄스”의 연인인 “에타”가 그의 동료 “버치”와 함께 자전거(당시 서부에서 말을 대신할 교통수단으로 홍보되던)를 타는 장면에 등장하면서 관객들의 뇌리에 깊은 인상을 남긴 명곡이지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져 1969년 개봉된 이 작품은, 1800년대 말~1900년대 초 미국 서부 시대에 활약하던 강도단 “와일드 번치(Wild Bunch)”의 리더이던 “버치 캐시디(본명: 로버트 리로이 파커 Robert LeRoy Parker)”와 조직원인 “선댄스 키드(본명: 해리 알론조 롱바오 Harry Alonzo Longabaugh)”라는 두 주인공의 – 그리고 선댄스의 애인 “에타 플레이스(Etta Place)”와의 아기자기하면서도 복잡(?)한 관계를 포함해 – 무용담을 그린 영화로, “버디 무디(Buddy Movie)”의 고전으로 평가 받고 있다는 것뿐 아니라 서부극이면서도 ‘호감 가는’ 악당 두 사람을 주인공으로 삼았다는(정의로운 주인공과 악한 상대 사이의 대결 구도가 아닌) 점에서 주인공을 위시한 주요 등장인물을 악인들로 배치하는 “피카레스크(picaresque)”식 구성, 그리고 미국 사회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제시하는 방식을 추구하던 “아메리칸 뉴웨이브(American New Wave)” 사조와 같은 다양한 특성들을 보여 주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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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이 판이한 두 인물의 티격태격하는 모습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다 보니 두 명의(주로 동성의) 주인공이 갈등을 겪다가 화합하고 문제를 극복해 가는 과정을 그리는 “버디 무비” 장르로 분류되곤 하는 이 작품에서, 두 주인공은 서로가 무척 다른, 그렇기에 상호 ‘보완’이 가능한 여러 특성들을 보여 줍니다. 두뇌 회전이 빠르고 말주변이 좋은 데다 자상함과 세심한 감성까지 갖춰 보스로서의 자질이 다분한 버치가 막상 사격 실력은 좋지 않다는 치명적 단점을 가지고 있는 반면, 무뚝뚝하고 까칠한 성격으로 인성적인 면에서 버치 같은 원만함을 갖추지 못한 선댄스는 총 솜씨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명사수로 인정 받기 때문이지요. 마치 무성영화처럼 대사도 없는 세피아톤 화면에 “다음의 이야기들은 대부분 실화입니다(Most of what follows is true)”라는 자막으로 시작되는 작품의 도입부에서, 카드 게임 중 자기가 잃은 돈을 모두 따낸 선댄스에게 돈을 놓고 가라며 시비를 걸던 사람이 자신의 대결 상대가 그 유명한 “선댄스”라는 것을 알자 두말없이 순순히 물러나는 모습을 보여 주며 영화는 자연스레 컬러 화면으로 배경색을 바꿉니다.


“벽 속 구멍 갱단(The Hole in the Wall Gang)”이라는 이름의 조직과 의기투합해 은행 강도를 일삼던 그들은 버치에게 정면 도전하던 조직원 한 명이 열차 강도로의 ‘업종’ 전환을 계획하자 나름 좋은 아이디어라 여기고 그쪽으로의 ‘전업’도 시도하지만, 자신의 기차에서 강도 행각을 벌인 것에 분개한 막강한 세력의 철도 사업가 “에드워드 해리먼(E. H. Harriman)”이 전문 추적자를 고용해 집요하게 추격하자 목숨을 건 탈주 끝에 에타와 함께 남미의 볼리비아로 도망칩니다. 그곳에서도 에타에게 배운 서툰 스페인어로 다시 은행털이를 시도하던 두 사람은 자신들을 잡으려 거기까지 따라온 와이오밍 주 보안관 “조 러포즈(Joe Le Fors)”를 목격하곤 더 이상 추격을 받지 않기 위해 ‘정당한’ 직업을 물색하는데, 주석광산 노동자들에게 지급할 급여를 호송하는 경호직을 맡은 그들이 하필 임무를 수행하던 첫날 산적들의 습격을 받으면서 뛰어난 총 솜씨 ‘덕분’에 강도들 모두를 - 2:6의 상황에서도 - 사살하는 상황이 발생하지요.



볼리비아에서도 역시 불안정한 생활이 이어질 수밖에 없음을 확인한 에타는 결국 혼자 미국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하고, 그녀가 떠난 후에도 여전히 강도짓을 반복하며 농부들을 습격해 빼앗은 말을 끌고 마을의 한 식당에 식사를 하러 들어갔던 버치와 선댄스는, 그곳에서 일하는 소년이 말들 가운데 농장 표식이 있는 한 마리를 발견하고 경찰에 곧장 신고함으로써 절체절명의 위기에 직면하게 됩니다. 경찰의 갑작스런 공격에 놀라 여분의 총알을 가져오려다 두 사람 모두 심한 부상을 당하는 사이 공조 요청을 받은 군부대까지 총출동하면서 식당 주위는 온통 경찰과 군인들로 둘러싸이는데, 달리 물러설 곳도 없어 자신들의 말이 묶여 있는 곳으로 달려나오는 그들을 향해 수백 발의 총성이 울리는 정지 화면으로 영화는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정지 화면으로 정확한 결말을 보여 주지 않고 끝이 나기에 “열린 결말(Open Ending)”이나 “중과부적(衆寡不敵)/볼리비안 아미(Bolivian Army) 엔딩” 등으로 불리는 영화의 마지막이지만, 그럼에도 그 끝이 어떤 것일지 충분히 유추되는 이런 식의 클로징 때문에 이 영화를 생각하면 “델마와 루이스(Thelma & Louise)”라는, 역시 두 (여성) 주인공의 이름으로 제목이 붙여진 또 다른 작품이 떠오르곤 하는데, 사회의 일정한 틀과 규격에 부합하는 삶에서 벗어나 주변 사람들로부터 용인되지 못하는 길을 걷게 된 인물들을 다루는 이런 작품이 보는 이의 마음을 안타깝고 착잡하게 만드는 이유는, 그런 그들의 결말이 어느 한 순간의 실수, 혹은 뜻하지 않은 몇 가지 사건으로 인해 빚어진 결과일 뿐, 처음부터 악의를 품고 의도적으로 작정했던 일의 귀결은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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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이 영화들은 어두운 분위기나 비관적인 주인공의 모습으로 점철되기보다 그런 암담함 가운데에도 자유를 만끽하며 여유와 유머를 잃지 않는 그들의 자세를 보여 주려 노력하는데, 특히 “서부극”으로 분류됨에도 보통 냉정하고 폭력적인 흐름을 보이는 여타 서부극과 달리 영화 후반부까지 살상 장면이 거의 나오지 않는 – 광산 노동자 급여를 강탈한 산적들을 사살하는 장면에 처음 등장하기에 – “내일을 향해 쏴라”는 미래가 불투명한 두 범죄자의 삶을 그리고 있으면서도 시종일관 밝고 명랑한 분위기를 잃지 않는다는 독특함을 보입니다. 여러 평론가들이 ‘코미디’ 장르로 분류할 만큼 재미있고 자유분방한 분위기로 일관되기에 “뉴웨이브 서부극”으로까지 불리는 이 특이한 작품의 마지막은,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만의 유머 감각을 잃지 않는 버치가 경찰과 군인들에 겹겹이 둘러싸인 절망적 처지에서조차 자신들의 다음 행선지는 ‘호주’라며 “영어를 사용하고 땅이 넓어 숨을 곳도 많다”는 말로 선댄스에게 농담을 건네는 장면으로 ‘유쾌하게’ 장식됩니다.


결국 볼리비아로 도주하게 되기까지 그들이 가파른 산길을 오르내리며 추격을 피하는 장면에서, 늘 딸로부터도 “caretaker”라고 놀림을 받는 저로서는 그 험한 길을 끌려오는 말이 무척 불쌍하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긴 했지만, 그 못지않게 늘 의기양양하던 그들의 절박한 도주 광경을 통해 예전에 저희가 다루었던 한국 영화 “킬러들의 수다”도 생각나더군요. 뛰어난 ‘실력’과 나름의 ‘철칙’을 자부하던 그들 모두가 결국 법과 규칙을 상징하는 사람들로부터 쫓기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는 순간에야 비로소 본인의 정체성에 철저히 직면하게 된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킬러들의 수다”에서의 큰형 상연이 조 검사의 추격을 피해 달아나는 동안 눈물을 흘리며 냉엄한 ‘자기 인식’에 마주했다면, 이 영화에서의 버치와 선댄스는 러포즈 보안관의 추격을 피하려 자신들의 친구인 다른 보안관에게 군대에 입대시켜 달라고 사정하다 그가 던지는 날카로운 말을 듣게 된 때가 바로 그런 자기 인식의 순간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봅니다: “이젠 너무 늦었어. 너희들이 이 지역을 주름잡는 대단한 인물일지 몰라도 결국은 그냥 두 범법자일 뿐이야(it's too late. You may be the biggest thing ever to hit this area, but in the long run, you're just two bit outlaws)”라는 폐부를 찌르는 직언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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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들의 범죄 행각이 애초부터 옳지 않은 일이기에 미화하거나 어떤 핑계를 댈 수는 없겠지만, 열차 강도 이후 쉼 없이 쫓아오는 ‘무시무시한’ 추적단이 자신들을 발견하면 멀리에서라도 무조건 사살하리라는 공포감만 없었다면 굳이 볼리비아까지 도망치고 또 말이 통하지 않는 그곳에서 다시 강도 행각을 계속하는 상황은 피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추측해 봅니다. 단순히 자신들을 ‘체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유 불문한 ‘살해’를 목적으로 그토록 집요하게 추격하는 모습을 보며 생겨 난 두려움이 그 두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삶을 반추하고 방향을 바꾸기 위한 노력를 해 보려는 시도의 여지조차 남기지 않았던 것 아닐까 유추해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정체를 알 수 없어 더욱 두렵기만 한 상대에 대한 두 사람의 공포심은 “대체 저 놈들 누구야?(Who are those guys?)”라고 네 번이나 반복되는 그들 간의 대화에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으니까요.


인생을 살다 보면 첫 단추가 잘못 끼워져 옷 모양이 전체적으로 어그러지기도 하고, 맞는 방향인 줄 알고 엉뚱한 길로 들어섰다가 큰 낭패를 당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도 우리에겐 처음부터 단추를 다시 풀어 옷매무새를 바로잡을 수 있도록, 잘못된 길에서 몸을 돌려 옳은 길을 다시 찾아갈 수 있도록 기다려 주는 분이 계십니다. 인정사정 없이 죽이겠다고 위협하는 겁박으로서가 아니라 적당한 ‘경고’를 건네며 스스로 깨달아 회심할 수 있도록 조용한 목소리로 설득하는 그분이 계시다는 것이지요. 끝내 절벽까지 몰아대다 결국 떨어지거나 뛰어내리는 일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속삭이는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누군가가 아니라 두 번, 세 번 새로운 기회를 허락하며 “돌아와라, 돌아와라”를 반복하시는 아버지가 우리 곁에 계십니다. 저 자신의 어리석은 실수와 잘못들을 생각하면 그런 두 번째 기회(the second chance)의 반복적 부여는 사실 공평하지 못한 일임에도 여전히 그런 ‘처사’를 거듭하고 계시다는 것이, 제가 하나님을 공정(just)하시지만 공평(fair)한 분은 아니라고 늘 생각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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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J의 시선



지난 달 16일 들려온 로버트 레드포드가 사망했다는 비보는 여러 가지 감정을 내게 불러일으켰다. 연기 활동과 사회 공헌의 행보에서 마지막까지 팬들을 실망시키지 않고 평온하게 삶을 마무리한 그에 대한 고마움이 컸지만 생각보다 이 배우를 많이 사랑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될 만큼의 슬픔과 애틋함도 함께 느껴졌다. 훌륭하지 않은 영화를 찾기 어려울 정도의 필모그래피를 자랑하는 배우지만 그중에서도 그의 가장 의미 깊은 문화적 유산 중 하나인 “선댄스 영화제”를 창시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마지막 숨을 거둔 안식처의 이름을 "선댄스 마운틴"으로 지었을 만큼 배우 본인이 애정을 가졌던 영화 [Butch Cassidy and the Sundance Kid](내일을 향해 쏴라)를 이번 글에서 다루기로 결정하게 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조지 로이 힐이 감독을 맡은 1969년 작 [Butch Cassidy and the Sundance Kid]는 실제 존재했던 서부 개척(Old West) 시대의 전설적 강도 버치 캐시디(폴 뉴먼)와 선댄스 키드(로버트 레드포드)에 관한 이야기이다. 1890년대 후반이 배경인 이 영화에서 버치와 선댄스는 갱단을 이끌고 와이오밍 주를 누비며 은행을 터는 강도들이다. 도박판에서 선댄스에게 돈을 잃고 그들을 죽일 것처럼 위협하던 남자가 "선댄스"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꼬리를 내릴 만큼 그들의 악명은 드높아 가지만, 갱단 안에서 버치에게 반기를 든 부하와 싸우다 그에게 듣게 된 아이디어 그대로 은행이 아닌 열차를 털면서 나름 ‘평탄’하던 이들의 삶에 큰 변화가 일어난다. 버치의 갱단에 손해를 입은 철도 회사 회장이 사비를 털어 이 둘을 잡아 올 추적단을 꾸렸기 때문으로, 버치와 선댄스는 지침 없이 자신들을 쫓는 추적대를 겨우 피해 선댄스의 연인 에타(캐서린 로스)의 집에 숨지만, 그들을 잡기 위해 고용된 추적단이 레포어즈(LeFors)라는 전설적 보완관을 포함한 ‘엘리트’들로만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신문을 통해 확인한 뒤 볼리비아로 도주하는 길을 택한다. 스페인어에 능통한 에타도 이들과 합류하여 광산이 들어오며 부를 모으기 시작했다는 볼리비아로 향하고, 그들 셋은 하던 대로 은행을 터는 강도짓을 계속하면서 한동안 순탄한 나날을 보낸다.



엉성한 현지 경찰의 추적을 쉽게 따돌리며 긴장을 풀어 가던 버치와 선댄스의 눈에 뜻밖에도 레포어즈 보안관이 다시 목격된다. 추적단이 자신들을 잡기 위해 볼리비아까지 따라왔다는 생각에 그들은 위험을 피할 수 있는 ‘합법적’ 직업을 찾으려고 노력하지만 자신들에게는 범법자의 길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될 뿐이다. 지금까지 그들 곁을 지키던 에타마저 떠나고 둘만 남은 채 볼리비아의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강도짓을 이어 가던 버치와 선댄스는 이름도 모르는 작은 마을에서 끝내 덜미가 잡히고 만다. 식당에서 음식을 기다리다 현지 경찰들의 공격을 받은 둘은 경찰과의 치열한 총격전에서 다수의 상대를 처리하지만 결국 총상을 입고 작은 은신처로 피신하게 된다. 경찰의 신고로 군대가 출동하며 수백 명의 군인이 그들을 포위하는 가운데 “이번엔 호주로 가자”고 애써 미래의 계획을 세운 버치와 선댄스는 권총을 손에 든 채 함께 밖으로 뛰어 나온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이유는, 이 작품이 폴 뉴먼과 로버트 레드포드라는 두 배우의 매력을 뚜렷하게 드러내 줄 뿐 아니라 사실 상당히 ‘웃긴’ 작품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비극적” 결말로 알려진 영화임에도 소리 내어 웃게 만드는 장면이 많을 정도의 통통 튀는 대사와 코미디적 연출은 물론, 어울리듯 어울리지 않는 두 주인공 사이의 케미가 영화에 다양한 즐거움을 부여한다. “Raindrops Keep Falling on My Head” 같은 유명한 삽입곡을 활용하는 방식이나, 삼인방이 볼리비아로 도주하는 여정과 그곳에서 다시 은행 강도로 악명을 쌓는 과정을 ‘사진’을 통해 대사 없이 보여 주며 플롯을 단순화하거나 과거의 무성 영화를 연상케 하는 연출법의 사용 등도 흥미롭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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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이 작품은 무겁고 축 처지는 ‘비극’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통쾌한 "액션 서부극"이라고도 볼 수 없는데, 이 영화가 근본적으로 ‘그리움’과 '아쉬움'의 멜랑콜리(mélancholie)를 다룬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를 서부극이나 영웅극, 버디 무비 같은 장르로보다는 ‘낭만’(romanticism)에게 보내는 쓸쓸한 러브레터, 혹은 진혼곡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싶다.


일단 영화는 그 배경 자체를 ‘지나간 시절’의 낭만화에 기대고 있다.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인 서부 개척기는 여러 서부극과 창작물들에 의해 ‘낭만적’ 시절로 탈바꿈된 시대로서, 일확천금을 꿈꾸며 "골드러시"에 참여한 광부들의 희망뿐 아니라 새로운 삶을 쫓아 아직 개척되지 않은 땅을 찾아온 수많은 사람들의 소망이라는 낭만적 요소를 내재한다. 서부 시대의 강도나 다른 범죄자들이 어떤 낭만적 전설로 문화사에 자리잡았다는 점에서 작품의 주인공들이 실제로 존재했던 유명한 강도들이었다는 사실에 의미가 부여되는 측면도 있다. 뿐만 아니라 영화는 할리우드의 황금기(Golden Age)를 그 문화적 배경으로 두는데, 에롤 플린을 선두로 인기를 끌던 옛날 액션 배우들을 상기시키는 두 주인공 덕분에 이 작품은 1903년 작 [대열차강도](The Great Train Robbery) 류의 범죄 서부극이나 "로빈 후드" 같은 의적을 다루는 옛 영화들의 느낌까지 불러일으킨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그 기반 자체가 아름다운 과거의 기억, 혹은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를 되짚음에 있는 것이다(영화 개봉 후 거의 60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는 당시의 아메리칸 뉴웨이브(New Wave) 또한 그립고 찬란한 과거가 되었다는 사실도 재미있다).



이처럼 ‘낭만’적이거나 이미 지나가 버린 시대를 상기시키는(outdated) 요소들은 영화 내내 등장한다. 에타는 선댄스의 연인이지만 어떤 면에선 버치와 더 깊은 감정적 교류를 나누는 것으로 보이는데, 버치가 에타를 불러내 자전거를 태우는 장면이나 그녀가 지켜보는 동안 자전거 위에서 온갖 재롱(?)을 부리는 장면들은 마치 상대 여성에게 배우자나 약혼자가 있는 경우에도 기사가 레이디에게 승리를 안겨 주고 선물을 바치는 것이 명예가 - 흠이 아니라 - 되었던 중세 시절의 "궁정식 연애"(courtly love)와 닮은 면이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열차를 터는 중에도 상대의 안위를 걱정하고 보안관과도 친하게 지내며 유머와 입담을 잃지 않는 버치는 범죄자들마저 ‘매너’를 지켰던 상상 속의 시절, 그러니까 기사도 정신이 최고 순위로 여겨졌던 어떤 카멜롯(Camelot)을 그려 낸다.


이렇듯 영화의 가장 중요한 주제가 ‘낭만’이기에 주인공들은 불가피한 비극을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다. 단지 이들이 유명해진, 그래서 많은 적을 갖게 된 범죄자여서 이들의 결말이 암울해지는 것이 아니라, 영화 속 버치와 선댄스는 더 이상 자신들이 존재할 수 없는 세상에 여전히 남아 있는 인물들이기에 곧 그 끝을 마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땀흘려 노동한다는 ‘구질구질한’ 일상의 노력을 통해 돈을 벌고 삶을 영위하는 대신 범죄라는 ‘흥미진진한’(exciting) 행위로 부를 갈취한 두 사람은 쉽게 얻은 만큼 쉽게 그 부를 써 버리지만, 이런 삶의 방식은 자본주의와 실용주의의 전진 앞에서 위태로움에 직면한다. 축적된 부의 제도화(institutionalize)로 손실을 수용할 수 없는 사회에서 그들은 더 이상 매력적인, 전설적인 구성원이 아니라 현 사회에서 자연스레 사라지거나 혹은 없애야만 하는 골칫거리로 전락해 버린다. 버치와 선댄스에게 우호적이었던 보안관 또한 자신들을 사면해 준다면 스페인과의 전쟁을 위해 입대하겠다는 그들의 제안을 비웃으면서 “너희의 시대는 끝났다(Your times is over)”고 일축하고 만다.



영화 내내 버치와 선댄스를 불안하게 하는 ‘추격단’이 단 한 번도 제대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설정 또한 두 주인공의 서사가 단순히 ‘법 집행관(lawmen)에게 쫓기는 범죄자’의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작품 초반 열차를 털던 그들에게 나타난 추격단은 정체를 가늠하기 어려운 인물들로, 일정한 거리를 두고 빠르지도, 느려지지도 않는 속도로 계속 버치와 선댄스를 뒤쫓는다. 마치 먹지도 쉬지도 않는 듯한 그들은 이들을 따돌리기 위해 버치가 생각해 낸 어떠한 속임수에도 넘어가지 않는, 사람이라기보다 어떤 무형의 '힘'처럼 느껴지는 존재들이다. 말하자면 버치와 선댄스가 상징하는 지나간 과거나 이상, 이제는 아무도 그것을 원치 않는 세상에 끝까지 남아 있던 무언가를 압도하러 오는 ‘시간’ 혹은 ‘발전’(progress)의 힘으로도 해석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또한 관객들에게 레포어즈 보안관의 얼굴이 끝까지 공개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이 추격단을 ‘내면’의 두려움, 즉 더 이상 호의적이지 않은 사회적 흐름과 태도로 인해 자신의 꿈과 이상, 세계관에 대해 혼란을 느끼는 내적 갈등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듯하다.


자신들에게 적대적인 힘에게 쫓기면서 두 사람은 나름대로의 변신을 시도하지만, 슬프게도 그들의 ‘낭만’은 시대를 따라 바뀌지 못한다. 볼리비아까지 쫓아온 추격자를 피해 합법적 일자리를 구하던 그들은 아이러니하게도 광산 업체 광부들의 급여를 은행에서 전달 받아 안전하게 호송하는 업무를 맡게 되는데, 자신들이 지금까지 해 온 행위(강도질)의 잘못을 벌충하고 바로 잡아 보려던 이들의 노력은 도리어 그들의 상관이 산적의 습격에 살해 당하고 버치가 처음으로 사람을 사살하는 더욱 끔찍한 상황을 낳고 만다. 외부의 압력과 두려움에도 결국 낭만은 자신을 통제하거나 검열하지 못하는 셈이다.



이때 에타가 둘의 곁을 떠나면서 그들의 몰락이 예고된다. 학교 교사로 단조로운 삶을 살아 왔기 때문인지 버치와 선댄스를 자신이 인생에서 경험한 유일하게 “흥분되는 일”(excitement)로 묘사하는 에타는, 상징적 ‘낭만’에 동참하고 싶어 하는, 적어도 그것에 기꺼이 속아 주려는 인물의 역할을 맡는다. 하지만 끝까지 그들의 낭만을 믿어 주고 철 지난 이상과 삶의 방식에 참여하던 에타마저 결국 이 낭만이 계속 유지될 수 없음을 간파하는데, 그녀가 두 사람을 – 더 정확히는 그들이 상징하는 낭만을 – 포기하는 순간이 어쩌면 버치와 선댄스의 진실된 ‘끝’이 아닐까 싶다. 그들이 그토록 경계하며 두려워했던 레포어즈 보안관이 아니라 왠 엉뚱한 적에 의해 죽음을 맞게 된다는 설정만 보더라도 그렇고.


사실 영화는 주인공들에게 다가올 마지막을 작품의 첫 장면부터 암시하는데, 버치는 새로운 은행에 들어가 동향을 살피다가 “옛날의 그 아름다웠던 은행은 어디로 갔냐”고 경비원에게 묻고, “계속 털리는 바람에 없어졌다”는 대답에(ㅋ…) “아름다움을 위해 그쯤은 감수해야지”(“Small price to pay for beauty”)라는 답을 건넨다. 은행 강도 주제에 참 뻔뻔하다고 여겨지는 대화지만 사실은 ‘낭만’의 끝을 상징한 대사라고 볼 수 있을 듯하다. 아름답지만 불편하고 불완전하며 손실과 손해를 내재했던 ‘낭만’은 이제 확실하고 안전한, 빈틈없는 질서와 제도로 교체되었다. 낭만과 아름다움을 위해 ‘감수’할 만한 존재였던 주인공들 또한 더 이상은 허용되지 않듯 말이다.



소위 말하는 “라떼는” 화법을 좋아하지 않는 데다 예전 시절을 기억하며 “그때가 더 좋았지”라고 푸념하는 것은 현 세대와 미래 세대 모두를 위해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요즘 같은 세상에선 과거의 ‘낭만’을 쫓지 않는 일이 어려워진 것도 사실이다. 극단적 혐오의 언어와 세계관에 갇힌 사람들을 볼 때마다 과거 언젠가의 '낭만적' 사회를 곱씹게 되고, AI의 남용과 OTT 채널용으로 대강 기획되는 콘텐츠가 범람하며 점차 인간미와 창의성을 잃어가는 듯한 영화와 창작물들에 실망할 때마다 ‘옛날 영화의 아름다움’을 더욱 그리워하게 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가 사는 세상은 과거 상상도 못했던 부의 축적과 기술적 발전을 이뤄 내고 있지만, 불완벽함과 불안전함 속에서 꿋꿋이 존재했던 다정함, 손실을 감수하면서도 닿고자 했던 예술적 아름다움은 지금 어디에 어떤 상태로 남겨져 있는지 우려스럽기만 하다.


그래서인지 영화의 초반부, 선댄스와 시비가 오고가는 도박판의 장면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선댄스”라는 이름을 듣고 꼬리를 내리는 상대방에게 버치는 “더 있다 가라”고 부탁하라고 귀띔하고, 고집스럽게 상대와 대치하던 선댄스는 “더 있다 가라”는 부탁을 듣자 그제서야 “이젠 가야 한다”고 대꾸한다. 우리가 과거의 아름다움과 이상들을, ‘낭만’을 드디어 이해하고 진심으로 원하게 되었을 때, 그러니까 우리가 그것을 붙잡을 때 낭만은 이미 우리 곁을 떠난 상태임을 비유하는 장면인 듯도 하다. 사랑하는 배우가 우리 곁을 떠나고서야 그를 진심으로 그리워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씁쓸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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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유명한 영화의 마지막 장면, 피 흘리는 몸을 이끌고도 화려한 저항(defiance)을 멈추지 않는 버치와 선댄스의 모습에서 작은 위로를 발견한다. 프리즈 프레임으로 표현된 그들의 마지막은 초라한 죽음이 아니라 가장 맹렬히 타오르는 불꽃의 순간과 같다. 영원으로 박제된 그 순간 안에서 이들에게 과연 ‘끝’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재미있게도 실제 역사 속 버치 캐시디와 선댄스 키드의 마지막 또한 불확실하다고 한다. 그 둘로 추정되던 사람들이 영화 속 설정처럼 볼리비아 군대에 의해 사살되었지만 당시에도 완벽하게 신원이 확인된 것이 아니었을 뿐더러, 먼 훗날 이들이 묻혔다는 묘지를 샅샅이 뒤졌음에도 그들의 DNA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쩌면 낭만은 여전히 어딘가에 숨어 있는 중일지 모른다. 나와 다른 이웃의 손도 웃으며 잡아줄 수 있었던, 흥행과는 상관없이 의미 있고 아름다운 작품을 만드는 창작자와 그 일을 돕는 조력자들이 존재하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우리가 다시 그것을 찾아나설 때까지. 그때는 “더 있다 가라”는 간절한 부탁을 기꺼이 받아들여 낭만이 오래도록 우리 곁에 있어 주면 좋겠다.


P.S. 아름다운 눈과 미소를 지녔던 배우이자 감독, 영화 밖에서도 멋진 삶을 살며 약자를 높이고 환경을 사랑했던 로버트 레드포드를 추억한다. 내가 당신을 이렇게나 좋아했을 줄이야. Rest in Light, Sundance K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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