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락처

by 수환

막내딸이 출가하며 남긴 빈방 하나가 내게로 왔다. 생의 한 시절이 빠져나간 자리는 고요했으나, 그 공백 속엔 이국으로 건너와 주유소의 노란 불빛 아래서 청춘을 소진해 버린 70년대 이민자 부부의 낡은 피로가 배어 있었다. 부부는 매일 아침 성경을 펼쳐 침침한 눈으로 구원을 읽어 내려갔다. 그들의 기도 소리는 내 잠을 깨우는 고요한 웅얼거림이었고, 나는 그 간절한 제안에 밀려 일요일마다 낯선 교회의 나무 의자에 앉게 되었다.


신앙의 형식이 몸에 익어갈 무렵, 성삼 집사가 내게 동행을 권했다. 영어 선생이 되겠다며 떠나는 한 여자를 배웅하러 가자는 것이었다. 우리가 도착한 영 앤 핀치(Young & Finch) 역의 '키스 앤 바이(Kiss & Bye)' 구역은 이별의 온기와 차가운 금속성 소음이 뒤섞여 있었다. 멀리서 그녀가 다가왔다. 짧은 파동처럼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 여자의 얼굴 위로 이국적인 생소함이 스쳐 지나갔다. '중국 여자일까?' 나는 속으로 되물었다. 서른 초반쯤 되었을까. 그녀의 얼굴은 화장기 하나 없이 맑았으나, 한편으론 생의 고단함을 씻어낼 틈도 없이 달려온 듯 위태로워 보였다. 굽 없는 운동화와 무릎이 나온 청바지, 그리고 몸의 선을 감추지 못하는 짧은 티셔츠. 그녀는 아마 방금 전까지 어느 비좁은 가게의 조명 아래서 손마디가 닳도록 일을 하다

이곳으로 급하게 발걸음을 옮겼을 것이다.


“샌드라, 공부 끝나면 다시 만나요.”

이미 며칠 전 작별의 말을 나누었던 이들이 건네는 인사는 공허하게 허공을 맴돌았다. "그래요." 그녀는 건조한 단 한마디를 남긴 채 돌아섰다. 지하철 역사의 차가운 아가리 속으로 그녀의 낡은 청바지와 운동화가 빨려 들어갔다. 그녀가 사라진 통로 끝에는 채 가시지 않은 고독의 냄새만이 희미하게 잔상처럼 남아 있었다.


소년은 하얀 치마를 휘날리며 앞서가는 여자의 뒷모습에서 지워진 생의 첫 페이지를 읽어내려 애썼다. 그녀의 보폭은 기억의 속도보다 빨랐으므로, 소년은 끝내 그 얼굴을 확인하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상상 속의 모성(母性)으로 비어 있는 얼굴을 채워 넣어야 했다. 그것은 그리움이라기보다, 어쩌면 태어나기 전부터 각인된 지독한 허기였는지도 모른다.


꿈에서 깨어났을 때, 창밖은 어제부터 내린 폭설로 세상의 모든 경계가 지워져 있었다. IMF라는 거대한 결빙의 계절은 한때 장인이었던 주희 아버지의 일터마저 차갑게 얼려버렸다. 가계 안으로 스며드는 한기를 느끼며 나는 멍하니 설국(雪國)으로 변해가는 거리를 바라보았다.


“형, 주희 언니네 회사가 위태롭대요.”


수현이 전해준 소식은 내리는 눈발처럼 소리 없이, 그러나 묵직한 무게로 어깨에 내려앉았다. 그녀는 신문사를 그만두고 출판사를 차리겠다는 남편의 고집을 타박하며, 구멍가게의 카운터 뒤에 고립된 나의 안부를 물어왔다. 하지만 나는 대답 대신 식어가는 커피 잔 속의 검은 적막만을 응시했다. 폭설로 발이 묶인 가계 안에서, 우리 모두는 각자의 침몰하는 배 위에서 서로의 안부만을 위태롭게 확인하고 있었다.


그녀가 내 기억의 유통기한 밖으로 밀려나 희미해질 무렵이었다. 쿨러 안의 냉기 속에서 우유 팩들의 날짜를 확인하며 재고를 정리하고 있는데, 베네타가 내게 전화기를 내밀었다.


“아저씨, 전화 왔어요.”


수화기 저편에선 성삼 집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샌드라가 공부를 마치고 토론토로 돌아온다는 소식이었다. 한때 내가 중국 여자라고 짐작했던, 영 앤 핀치(Young & Finch) 역의 '키스 앤 바이(Kiss & Bye)'의 그 차가운 금속성 소음 속으로 사라졌던 그 여자였다. 나는 그녀를 배웅했던 익명의 무리 중 한 명이었을 뿐이므로, 그녀가 나를 기억할 리 만무했다. 하지만 성삼 집사는 친절을 가장한 운명처럼 그녀의 귀환을 알리며, 영어 과외라도 받아보라며 내 비좁은 일상에 파문을 던졌다. 그는 홀아비의 식사가 부실해서는 안 된다며, 요리하는 남자의 다정함을 설파해 좌중을 웃게 만들기도 했다.


장손의 부엌 출입을 가문의 대가 끊길 망측한 일로 여기던 할머니의 서슬 퍼런 눈빛 아래서 자란 내게, 요리하는 남자의 앞치마는 평생 닿지 못할 다른 생의 복장이었다. 엄마는 그 서슬에 밀려 나의 부엌 출입을 결코 허락하지 않았고, 나는 그렇게 생의 허기를 스스로 채우는 법을 배우지 못한 채 나이 들었다.


그날 저녁, 성삼 집사의 집에서 미국으로 한의학을 공부하러 떠난다는 서른 중반의 남자를 만났다. 그는 새벽녘 지렁이를 잡던 트럭 짐칸에서 떠오르는 해를 보며 울컥 쏟아지던 눈물을 소주병나팔로 들이켜 잠재우던 사내였다. 한의사 부모 밑에서 작두로 한약재를 썰던 비린 기억을 혐오해 절대 한의사는 되지 않겠노라 다짐했다던 그였다. 토론토 대학에서 컴퓨터를 전공하고 한국의 대기업을 전전하던 그는 결국 도망쳐온 그 작두의 운명 앞으로 다시 소환되어 미국으로 간다며 허탈하게 웃어 보였다. 그 웃음은 마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자의 항복 선언처럼 보였다.


“샌드라 연락처예요. 영어 공부에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성삼 집사가 미리 준비한 종이 한 장을 내게 건넸다. 조명 아래 하얗게 질린 그 종이 위에는 내가 애써 잊으려 했던 이름과 숫자들이 낯선 기호처럼 적혀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전화번호라기보다 다시 시작될 고독의 연대기이자 거부할 수 없는 생의 인력이 내미는 은밀한 초대장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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