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노여움

by 수환

편의점의 생리는 단출하고도 집요했다. 손님이 내뱉는 담배 이름과 복권 번호에 기민하게 대응하고, 새로 입고된 물건들의 유통기한을 제 몸의 나이처럼 익히는 데 석 달의 시간이 흘렀다. 이 도시의 한인들이 아흔 번의 손길로 일궈놓은 이 좁은 상권은 영어가 서툰 이민자들에게는 생의 마지막 보루와도 같은 곳이었다.

세탁소의 증기나 식당의 불길을 견디는 일보다 배우기는 수월했으나, 그만큼 영혼이 마모되는 속도 또한 매끄러웠다.


“아저씨, 주문서 작성해 주세요.”

베네타가 서류 뭉치를 내밀었다. 열아홉에 가족을 따라 이 땅으로 건너온 그녀는 회계사가 되겠다는 꿈을 지갑 속의 부적처럼 품고 사는 스물아홉의 처녀였다. 십 년 후의 그녀는 지금과 다를 것이라며 활달하게 웃는 그녀의 얼굴을 볼 때면, 나 또한 마른 두 주먹을 쥐어 보이며 동질감을 확인하곤 했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내일'이라는 이름의 가련한 가불(假拂)이었는지도 모른다.


"아저씨, 이번 쉬는 날에 제 대신 일해 줄 수 있어요?"

베네타가 뜬금없이 뉴욕행을 선언했다. 현실이라는 창살에서 잠시나마 도망치고 싶다는 그녀의 말은, 한때 내가 한국을 떠나올 때 내뱉었던 비명과 같은 음가(音價)를 지니고 있었다. 가족을 위해 헌신해 온 그녀의 노고를 알기에, 나는 흔쾌히 그녀의 빈자리를 메워주기로 했다. 그것은 그녀를 위한 배려이자, 도망치지 못하는 나 자신에 대한 일종의 대리만족이었다.


점심시간, 인근 중학생들이 파도처럼 밀려들면 가계 안은 금세 소란스러운 긴장으로 가득 찼다. 아이들의 주머니 속으로 사라질 과자 부스러기나 장난감들을 잡아내기 위해 나와 베네타의 시선은 맹수처럼 번뜩였다.

“아저씨는 뒤쪽에서 아이들을 좀 봐주세요.”

베네타의 목소리에 나는 가계 후미진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때 세상을 호령할 큰 뜻을 품고 태어났다고 믿었던 사내가, 이제는 아이들이 훔쳐 갈 눈깔사탕 하나를 가려내기 위해 비좁은 진열대 사이를 유령처럼 배회하는 감시자가 되어 있었다.


'우울한 날들을 견디며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유배지의 푸시킨이 뼈에 새기듯 읊조렸을 그 시구(詩句)가 입안에서 모래알처럼 껄끄럽게 맴돌았다. 마음은 언제나 도래하지 않을 미래를 살고 있는데, 몸은 여전히 유통기한이 임박한 일상의 비좁은 칸막이 속에 갇혀 있었다. 나는 그렇게 감시당하는 감시자가 되어, 사탕 봉지 위로 떨어지는 무력한 오후의 햇살만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승원 씨, 캐나다 생활 힘들지?”

선배의 아내는 남편이 나를 만나는 날이면 으레 자정을 넘겨 돌아올 것임을 예감한다고 했다. 선배는 그 사실을 마치 훈장처럼 내게 알려주었다. 그와의 대화는 낡은 레코드판처럼 같은 대목을 반복하곤 했지만, 한국에서의 그것보다 훨씬 밀도 높은 비린내를 풍겼다. 가족 여행을 핑계로 한동안 소식이 없던 그에게서 문득 연락이 닿은 것은 대지가 꽁꽁 얼어붙기 시작한 무렵이었다.


“잘 아시면서요, 선배. 잘 지내시지요?”

수화기 너머로 선배의 긴 한숨이 습기처럼 배어 나왔다. 쉰 줄에 접어든 가장의 어깨를 짓누르는 생의 압박감을 그는 용케도 견디고 있었다. 지난 2년은 견디는 것이 아니라 삭여내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노라 선언하고 떠나온 모국을,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망령처럼 소환했을 것이다. 도망치고 싶은 욕망이 쌓아 올린 모래성은 현실의 파도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졌다가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그나마 언어의 습득이 빠른 아이들이 부모의 부실한 입을 대신해 줄 때면, 무너진 자존감의 파편들이 발등을 찔러댔을 것이다.


“가게를 하는 것도, 직장을 구하는 것도 만만한 일이 아니야. 그래도 에이전트 쪽에서 몇 번 연락이 오긴 했어.”

“다행이네요. 에이전트가 먼저 전화를 했다니.”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버티는 거지. 아내는 자네가 소개해 준 편의점에서 파트타임을 시작했어.”

성진 선배는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짓눌러 끄더니, 이내 새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가 깊게 빨아들였다가 내뱉는 연기는 그의 남루한 현실처럼 아무것도 붙잡지 못한 채 허공으로 흩어졌다. 새벽일이라도 찾아봐야겠다며 아쉬움을 토로하는 그의 말은, 거울처럼 내게 반사되어 돌아와 가슴에 박혔다.

선배는 비어 가는 맥주잔을 채우며, 지나치게 청렴했던 공직자 아버지를 원망하듯 허탈하게 웃었다. 물려받은 재산 하나 없이 맨몸으로 이 거대한 동토(凍土)에 던져진 자의 덤덤한 자조였다. 그리고 며칠 뒤, 그는 기어이 새벽의 어둠 속으로 출근하기 시작했다.


토론토의 겨울은 칼날처럼 날카롭고 매서웠다. 어둠은 예고 없이 찾아왔고, 행인이 끊긴 도로 위엔 오직 나만이 홀로 서 있었다. 고장 난 중고차 대신 버스를 기다리며, 나는 손발을 떨며 밤의 냉기를 견뎌냈다. 버스를 기다리는 그 적막한 시간 동안, 나는 선배의 담배 연기가 되어 이 도시의 검은 하늘 위를 부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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