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 어느 곳으로 이사하세요?"
그녀의 질문에 나는 잠시 멀리 있는 풍경을 떠올렸다. 막내딸이 시집을 가고 난 뒤, 적막만 남았던 방 한 칸을 얻어 살던 아파트를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같은 동네의 방 하나짜리 아파트로 옮겨가는 일일 뿐이었지만, 이사는 늘 내게 존재의 거처를 옮기는 엄숙한 의례 같았다.
이민 가방 두 개를 함께 옮겨주고 떠난 성진 선배의 뒷모습을 보았던 첫날이 생각났다. 시차에 적응하지 못해 새벽의 찬 공기를 뚫고 밖으로 나섰을 때, 내 눈앞에 펼쳐진 것은 아침 이슬을 머금고 푸르게 젖어 있던 잔디 운동장이었다. 한국의 흙먼지 날리는 운동장과는 다른, 그 비현실적인 초록의 깊이를 나는 언덕 위에서 한참이나 내려다보았었다. 가게 근처로 옮길까도 생각했지만, 결국 나는 이 동네를 떠나지 못했다. 처음 정착한 이곳을 등지는 것이 마치 오래된 연인을 배신하는 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장소에 대한 그 쓸데없는 결벽이 다시 나를 이 익숙한 거리의 한복판에 주저앉히고 있었다.
"지금 살고 있는 동네 근처로 옮기기로 했어."
베네타는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라고 했지만, 누군가의 손을 빌려야 할 만큼 내 삶의 부피가 늘어난 것은 아니었다. 이민 가방 두 개로 시작된 타국에서의 삶은 여전히 간결하다 못해 서늘했다. 베네타는 동업 중인 주인이 레이크 쇼어(Lake Shore Blvd) &와 레슬리 거리 (Leslie St) 근처에 새 편의점을 낼 계획이라는, 정작 나조차 알지 못했던 은밀한 정보를 흘리듯 건넸다.
샌드라는 매번 성의가 가득 담긴 학습 자료를 챙겨 오곤 했다. 정해진 수업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가끔 식사를 하거나 남은 커피를 마시며 일상의 파편들을 공유했다.
"지금 하시는 일, 힘들지 않으세요? 한국에서의 삶과는 밀도 자체가 다를 텐데……."
불쑥 끼어든 그녀의 질문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잊고 창밖을 보았다. "이민자의 삶이라는 게 대개 이렇지요." 내 입에서 나간 대답은 질문의 무게를 감당하기엔 지나치게 가벼웠다. 그녀는 아마도 내가 왜 멀쩡한 직장을 그만두고 이혼까지 하며, 언어와 관습이 낯선 이 먼 땅까지 흘러 들어와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있는지 궁금했을 것이다. 그것은 나 역시 한국에 가족을 두고 홀로 이곳의 밤을 견디는 그녀의 생(生)에 대해 품고 있던 의문과 닮아 있었다.
"승원 씨, 일 끝나고 시간 되시면 커피 한잔할 수 있을까요?"
어느 날, 주인은 무언가 결심한 듯한 얼굴로 내게 말을 걸어왔다. 나는 그 무거운 표정에 밀려 고개를 끄덕였다. 오후의 햇살이 깊숙이 스며드는 찻집의 창가 자리, 작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마주 앉았다. 각자의 취향이 담긴 커피가 놓였고, 내 앞에는 어김없이 아이리쉬 커피의 알싸한 향기가 피어올랐다. 굳게 다물려 있던 그의 입술이 열린 것은 커피가 반쯤 식었을 무렵이었다.
"개인적으로 가게를 하나 낼 생각입니다. 혹시 저와 함께 운영해 볼 마음은 없으신지요?"
예상치 못한 제안에 내가 머뭇거리자, 그는 나라는 사람에 대한 신뢰와 그간 보여준 성실함이 자신을 움직였다고 덧붙였다. 순간, 주인이 새로운 거처를 물색 중이라던 베네타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귓가를 스쳤다. 운명의 톱니바퀴가 내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소리 없이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다.
샌드라는 마치 자신의 생에 찾아온 행운인양 진심으로 기뻐했다. "가게를 직접 운영하시게 되다니, 정말 축하드려요. 이런 날은 그냥 지나칠 수 없죠." 그녀의 들뜬 목소리가 낯선 타국의 공기를 일렁이게 했다. 우리는 몇 번 들른 적이 있는 단골 중국 식당의 구석진 자리에 앉아 몇 가지 요리를 시켰고, 축하주라며 와인 한 병을 곁들였다. 잔을 채우는 붉은 액체를 바라보고 있자니, 이 땅의 가을이 벌써 세 번이나 내 곁을 스쳐 지나갔음을 새삼 깨달았다. 나는 샌드라가 따라준 와인을 단숨에 들이켰다. 잊었다는 말은, 역설적으로 아직 내 기억의 어느 층위 속에 그 이름이 형형하게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비명이기도 했다.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포도주의 쌉싸름한 맛이, 그곳에 두고 온 계절의 냄새를 비릿하게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멀리 한국에서는 IMF라는 긴 터널을 막 빠져나오느라 세상이 어수선했다. 몸담았던 기자생활을 나와 후배 현재는 아내 수연의 만류를 뿌리치고 기어이 자기만의 출판사를 차렸다고 했다. 수연은 남편의 무모한 열정을 뒷바라지하며 안주인 역할을 묵묵히 해내고 있었다.
"형, 주희 언니가 연락이 와서 형 번호를 알려줬어요. 혹시 연락이 가더라도 너무 놀라진 마세요. 주희 언니는 지금 돌아가신 아버지의 회사를 물려받아 경영하고 있거든요."
수연의 목소리는 수화기 너머에서 아득하게 들려왔다. 주희, 그 고집스러운 성격이라면 아마 차가운 비즈니스의 세계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고 제 자리를 지켜내고 있을 터였다.
"알았다. 이미 잊은 사람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