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by 수환

"아파트가 참 정갈하네요, 아저씨."

베네타가 낯선 허공을 더듬듯 거실을 휘둘러보며 싱거운 농담을 던졌다. 갓 이사한 집 특유의 마른 시멘트 냄새가 아직 가시지 않은 공간이었다. 뒤따라 들어온 사장은 뜻밖의 횡재라도 한 표정으로 이런 집을 구한 안목을 치하하며, 제 손에 들린 과일 상자와 주방 세제, 그리고 화장지 꾸러미를 겸연쩍게 내밀었다. 그것들은 생의 비루함을 가리기 위한 최소한의 치레처럼 보였다. 곁에 서 있던 토니가 "승원 씨, 이제 여자만 들어오면 완벽하겠어"라며 짐짓 유쾌한 소리를 내자,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텅 빈 벽면에 부딪혀 공허하게 흩어졌다.


그때 성진 선배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잠의 앙금이 채 가시지 않은 듯 축축하고 허스키했다. "승원아, 개업 축하한다."

그가 새벽 근무를 시작한 뒤로, 우리는 탁자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피를 나누던 시간을 잃어버렸다. 밤과 낮이 뒤집힌 그의 일상은 위태로운 가장의 자리를 지켜내기 위한 안간힘이었을 것이다. 잘 살아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건너온 이 먼 타국의 땅에서, 함께 절망을 견디던 지인들은 하나둘 가족의 부양이라는 명목 아래 다시 반도의 땅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들은 돌아간 것일까, 아니면 패배하여 쫓겨난 것일까.


"네, 주변 도움으로 겨우 시작하게 됐습니다."

나는 짧은 소회를 전하며 말을 아꼈다. 우리는 언제나처럼 기약 없는 '언제 한번'이라는 허망한 약속을 징검다리처럼 놓으며 통화를 끝냈다. 수화기를 내려놓자, 다시금 이국 땅의 낯선 정적이 발밑까지 차오르고 있었다.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새롭게 문을 연 가게는 의외로 손님들의 살가운 반응을 얻었다. "전에는 내부가 어둡고 비좁았는데, 이젠 밝고 깨끗해서 좋네요. 물건도 많아졌고." 삼십 대쯤 되어 보이는 백인 남자가 플레이어스(Player’s) 담배 한 갑과 진저에일(Ginger Ale) 한 병을 계산대에 올리며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 미소는 이국의 낯선 공간에 던져진 우리에게 건네는 일종의 위로처럼 느껴졌다.

베네타는 자신이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마다치 않겠다며, 이전에 함께 일했던 동업자 사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새로 오픈한 가게로 주 2일 출근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동업자 사장은 흔쾌히 허락했다. 마치 유비가 제갈공명을 얻은 듯, 나는 베네타의 출근 시간에 맞춰 조합장이나 홀세일 시장을 분주히 오가며 필요한 물건들을 채워 넣기 시작했다. 방문 판매를 온 세일즈맨이 베네타와 나를 부부 사이로 착각하여 싱거운 웃음을 터뜨리는 해프닝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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