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by 수환

"승원 씨, 저 한국에 잠깐 다녀와야 해요. 돌아오면 연락드릴게요."


샌드라는 다급한 용건만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시집을 가도 벌써 몇 번은 가야 했을 서른넷 살의 노처녀. 그녀는 혼자 고군분투하며 자신의 꿈을 향해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좀처럼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던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어느 날, 공원을 함께 걷던 중에 마치 타인의 가족사를 이야기하듯 덤덤하게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육십 년대 캐나다로 유학을 왔고, 그녀와 엄마는 삼 년 후, 그녀가 네 살 되던 해에 태평양을 건너왔다고 했다. 아버지는 한국의 유명 대학 석좌교수였고, 엄마는 중소기업을 운영했으며, 오빠는 독일에서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라고 했다. 단단한 현실에 발 딛고 사는 그들의 삶은 나와는 다른 결이었다.

그렇게 그녀는 한국으로 돌아갔다. 남겨진 나는 문득 이 광활한 타국 땅에 홀로 남겨진 듯한 막막함을 느꼈다.


“편의점 한다고 들었는데, 맞니?”


주희의 전화는 예고도 없이 당돌했다. 몇 달 전 수연이 내 연락처를 그녀에게 건넸다던 기억이 뒤늦게 수면 위로 떠 올랐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생경했다. 왜 전화를 했을까 하는 의구심보다, 마치 잘못 걸려온 번호를 받은 듯한 무딘 감각이 먼저 나를 지배했다. 내가 아무런 대답도 돌려주지 않자, 그녀가 다시 물었다.

“힘들지 않아?”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그 말투는 다분히 비아냥거리는 소조(小調)로 들렸다. 자신의 도움 없이 네가 얼마나 버틸 수 있겠느냐는, 날 선 예민함이 문장 행간마다 묻어났다.

“잘 지내.”


짧은 대답 뒤로 무거운 침묵이 고였다. 전화선 저편에서 주희 또한 잠시 숨을 고르는 듯하더니, “회의가 있어서…… 목소리 들었으면 됐어”라는 말을 남기고 서둘러 물러갔다. 상대가 먼저 끊어버린 전화기에선 뚜, 뚜, 하는 기계적인 신호음만이 남았다. 그것은 끊어진 인연이 내뱉는 공허한 숨소리 같기도 했고, 더는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의 단면을 자르는 소리 같기도 했다. 나는 한참 동안 먹먹한 수화기를 귀에 댄 채, 낯선 천장만을 올려다보았다.

이전 09화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