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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Dec 16. 2022

그것이 알고 싶다

사이비 2세로 살아온 대표의 비밀 공유 Ch.3

2학년 4반


학교에서 본 단순한 수학 시험에서 27점을 맞았다.



3학년 5반 


나누기와 곱셈을 선행 학습하고 오는 친구들이 많았기에

첫날부터 수준을 보기 위한 시험을 내주셨다.


나는 가장 쉬운 첫 문제 빼고는 다 틀렸다.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를 하면 항상 내가 쓴 글을 친구들에게 보여주셨다면

수학은 달랐다. 


수학은 학원에서 선행학습하고 오는 과목이었다. 


가장 교육열이 치솟고

구구단 정도는 거꾸로 외우고

인도에서는 60단 까지 외운다는 말을 듣고

학원에서 누구나 할 것 없이 외우라고 아이들을 시키던 그때


나와 내 친구들 세명만 학원을 가지 않고 놀이터에서 놀았다.



갈수록 놀이터에 나오는 친구들이 하나 둘 줄어들고


학교 끝나고 우리 집에 놀러 오라고 할 때마다

학원을 가야 해서 못 간다는 답이 익숙해지고 있었다. 



어느 순간 내 친한 두 친구들마저 학원에 가면서 

부모님은 상황 파악을 하신 것 같았다.


우리 가족은 한 번도 넉넉치 않았다.


목사들 돈 많다고 하던데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전에 말했던 것처럼

착하신 분이다. 



월 30만 원의 월급을 받으며 교회를 운영했고

헌금은 고스란히 교회와 사이비 교주에게 들어갔다. 


얼마 전에 같이 교회에 다녔던 지인을 만났는데

그 교주랑 그 밑에 몇 명의 주요 인물들이 얼마나 비싸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지

온몸에 걸친 명품이 문제가 되고 있다고 했다.



우리 아버지는 아직도 그 당시 입던 양복을 꺼내 입으신다. 


그래도 다행스럽게도 우리 가족 말고는 친가도

외가도 돈을 다 잘 벌어 목회하는 우리 가족을 좋게 봐주셔

많이 금전적으로 도와주신 걸로 알고 있다.



여름마다 한 보따리에 담겨오는 친척 언니가 사용하던 필기용품부터 작아진 옷까지

그 보따리가 올 때만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거기에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배고픔을 잘 느끼지 못했다. 



2차 성장기가 오기 전까지 

배고프다는 게 크게 무엇인지 느끼지 못했고

또 밥을 먹으면 두통과 복통이 항상 생겨 먹는 걸 피했던 것 같다


그래서 다른 또래 친구들보다 왜소했다. 

덕분에 밥 두숟가락이면 한끼로 충분해 식비를 많이 아끼지 않았나 싶다.


그렇게 공부는 학원 보낼 돈이 없어 가지 못했기에

낮에 보기 힘들었던 아버지가 틈틈이 집에 오셨고, 나를 아버지 컴퓨터 책상 옆에 앉혀놓고

수학을 가르쳐주시곤 했다.

아마 어머니가 내 시험 성적을 보고 또 주변 아이들이 학원을 가는 걸 보고

걱정을 하시며 한 소리를 하셨 던 것 같다.



그렇게 아버지와 앉아서 수학 문제를 하나씩 푸는데

아버지가 많이 답답해하시는 게 느껴졌다.


아버지는 새것과도 같은 나의 수학책 표지면에 연필로 나눗셈을 하는 방법을

적어 내려가셨고


나는 아버지 말 보다는 내 책 표지를 엉망을 만들어 놓는 아버지에게 너무 화가 나고 있었다.

하지만 양복 재킷만 벗어던지고 앉아 나를 가르치던 아버지는

목사님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에 나는 화를 내지 못했고

속상한 표정을 감췄다. 


그렇게 이해는 가지 않지만 계속 아버지에게 수학 과외를 받으며

수학책을 비추는 따뜻한 햇살이 수학책을 태워버렸으면 하는 마음으로 앉아있을 때쯤

집 전화기가 울렸다. 


아버지는 경직됨과 동시에 떨리는 표정을 전화를 받았고

정말 중요한 통화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버지는 경직된 자세로 부드럽지만 간결한 톤으로 대답만 연신 했다.


그때 난 촉으로 교주한테 전화가 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전화가 있고 난 며칠 후 나와 오빠는 토요일 난생처음 63 빌딩을 보러 가자며

깨운 어머니와 아버지를 따라 교회에 갔다. 


교회 사람들이랑 같이 서울 소풍을 가는 건가 갸우뚱했지만

교회에 도착해보니 소풍 가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분명히 큰 버스도 빌렸고

다들 서울 갈 준비를 한 차림이었지만

표정이 어딘가가 혼란스러웠다.


나를 포함한 어린아이들은 컴퓨터실에서 동물 농장을 보며 놀고 있었고

언제 출발하나 궁금해 잠깐 들여다본 강당에서는

뭔가 혼란스러운 뉴스가 나오는 화면을 돌려다 보며 

교인들에게 말하고 있는 우리 아빠의 모습이 보였다.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지금 어떤 상황인지 설명한 것 같았는데

어린 내가 상황을 알아듣기엔 너무나도 어려웠다. 


나는 그냥 속으로, 놀러 가는 건 아니구나 체념했다. 



그렇게 한 시간 즈음 흐르고 우리는 큰 버스를 타고 63 빌딩이 살짝 보이는 곳 앞에 도착했다.


엄마는 나와 오빠 그리고 같이 온 아이들에게 주차장 뒤편에서 놀고 있으라고 했다. 

우리는 군말하지 않고 정말 알아서 나무를 타고 돌을 주워서 던지며 놀았다.


그리고 어른들은 주차장을 채운 후 그 자리에 앉아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며 무언가를 요구했다. 


나중에 커서 알고 보니

사이비 교주가 그것이 알고 싶다에 다뤄졌고

그걸 보고 화가 난 교인들이 데모를 하는 거였다. 


그것이 알고 싶다 정말 열심히 일한다. 


나도 어린 나이지만 

감금당한 사람 이야기

성추행당한 이야기 등 정말 많이 들었지만

항상 부모님에게 말하면 

다 거짓말이라곤 하셨다. 


예수님도 그 당시 핍박을 받고 의심을 받지 않으셨냐고. 

지금 우리의 주님도 그 길을 걸어가는 것뿐이라고. 


어린 나는 다 믿었다. 그 나이에 세상의 진리는 부모님에게서 배우는 것이니. 


부모님이 하늘은 초록 색이다 하면 초록색인 거니까. 

학교에 와서야 하늘색이구나 알지만 

누가 학교에서 네가 다니는 교회가 사이비야 말해주냔 말이다. 



그렇게 나는 세상 사람들은 구원 못 받을 불쌍한 존재

나는 구원은 물론이고 성인이 된 후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교인들과도

 차원이 다른 순수하고 축복받은 2세로 스스로를 여기며 살았다. 



데모가 있은 후 우리 아버지가 집에 있는 일이 잦아졌다. 


아버지는 자기 전 인사만 할 수 있던 바쁜 가장이었지만

집에서 전화를 받으시기도 하고

서류를 찾기도 하시고 나와 오빠에게 이런저런 질문도 많이 하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루는 긴 통화를 끝내시더니 어머니한테 


"허락하셨어, 미국 허락하셨어"라고 하셨다. 


그리고선 나와 오빠를 보고선 

"우린 샌프란시스코로 갈 거야. 샌프란시스코 어때?" 라고 물어보셨고


샌프란시스코가 뭔지 모르는 나와 오빠는 좋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며칠 후 학교에서 마지막 수업이 끝날 무렵 선생님은 갑자기 나를 불러 

교탁 앞에 서라고 말하셨다. 



교탁 앞에 서서 친구들을 바라보고 있자

선생님은


"우리 성례가 선생님이 너무 가고 싶어 하는 샌프란시스코로 이사를 가게 되었데요

오늘이 마지막 수업이라고 하네, 다들 성례에게 꼭 인사 나누고 가야 해요"


다른 건 잘 못 알아 들었고 선생님이 너무 가고 싶다는 곳이라는 것만 들렸다.


아, 내가 무언가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곳을 놀러 가는구나,

다들 날 부러워하는 거는구나란 생각에 들떠 씩- 웃었다. 


아무래도 사진을 찍고 여권이라는 걸 만들던 이유가 이거였구나


대가족 사진을 찍고 사람들이랑 매주 밥을 먹었던 이유가 이거구나 그때야 이해를 했다.



그리고 다음날 나는 생전 처음 비행기를 탔고 

신기한 공기가 가득 찬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차가우면서도 신비로운 공기를 맡으며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백색소음으로 들렸고

순간 나는 내 인생이 예전과 같지 못하겠구나 온 몸으로 느꼈던 것 같다.



"송 목사님! 웰컴 투 샌프란시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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