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와 어떻게 그림을 보실건가요?
아들과 미술관에 갔었다.
아들은 힘들었던 고등학교 시절 우연히 찾은 미술관 이후 지금까지 종종 미술관을 찾는 편이다. 이번에는 나도 따라갔다. 이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내 군대를 제대한 후 이제 어엿한 성인이 된 아들과 함께 미술관을 가는 기분이란 달리 대체할 수 있는 완벽한 문장이 떠오르지 않는다.
경복궁을 끼고 있는 삼청동 미술관 거리는 그야말로 작은 미술관들이 촘촘히 늘어서 있다. 아들은 국립미술관 같은 규모가 큰 미술관보다는 마치 주머니에 넣고 싶을 만큼의 아담한 미술관을 더욱 좋아했다. 아들이 선택한 미술관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티켓을 끊고 갤러리로 향했다. 아들의 말대로 작가의 화풍이 매우 화려했다. 화려 화면서도 마음의 빈 틈을 메워주는 그림들이 많았다. 대부분 큰 그림들이었다.
1관을 관람하고 슬래시 표시 같이 생긴 작은 통로를 따라 우리는 2관을 들어갔다. 1관 보다는 2관이 그림을 관람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런데 앞서 있던 아들이 나를 잡아당겼다. "아빠, 저기 봐봐." 아들이 알려준 곳에는 건물을 받치는 기둥에 등을 대고 엄마와 초등학생 저학년으로 보이는 딸이 나란히 바닥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마주 보이는 전시된 그림을 나란히 엄마와 딸이 똑같은 스케치북에다 그리고 있었다. 얼핏 봐도 앞에 걸린 그림을 따라 그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다가가서 엄마와 딸을 주시했다. 엄마와 딸은 서로의 그림에 대해 이야기를 수런거리며 조용히 그리고 신나게 그리고 있었다. 놀라운 광경이었다.
나는 아이의 표정을 보았다. 진지해 보였다. 그리고 마치 자기가 화가가 된 것처럼 매우 몰두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이의 그림에 참견하지 않았다. 색깔이 틀린 것 같아서 엄마가 딸에게 알려주었더니 듣는 둥 마는 둥 자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엄마도 미소를 지으며 더 이상 말을 잇지도 않았다.
내가 멀뚱히 쳐다보고 있으니 아들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리고 물었다.
"아빠, 뭘 그렇게 뚫어져라 보고 있어?"
"멋지지?"
"그래서 계속 보고 있었어?"
"네가 다시 저만한 나이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왜?"
"그럼 이제는 아빠도 저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아니 저렇게 해보지 못한 게 너무 아쉽다."
"몰랐구나. 아빠는 내가 저 나이 때 꽤 괜찮은 아빠였었어."
미술관에서 본 어머니와 딸의 모습은 지금도 쉬이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나는 그때 어머니에게 인터뷰를 하고 싶었다. 어머니는 대체 어떤 교육을 받으셨길래, 또 어떤 마음으로 미술관을 올 때 스케지북과 크레파스를 가져올 생각을 하셨는지. 묻고 싶었다.
얼마 전 지방 끝자락에 있는 도시를 찾아 초등학교 학부모를 대상으로 강연을 한 적이 있었다. 강연 서두에 나는 오늘의 미술관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학부모들에게 물었다. "만일 여러분들이 지금 자녀와 미술관을 간다고 하자고요. 그리고 그곳에서 자녀를 위해 우리는 어떻게 그림을 보면 아이에게 더 좋을지 고민을 한다고 생각해봐요. 여러분들은 자녀와 어떻게 그림을 보시겠습니까?라고. 그랬더니 어느 한 어머니께서 "저는 아이에게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서 해줄 것 같아요." 그랬더니 맨 뒤에 계시는 어머니께서 또 손을 들었다."저 같으면 아이에게 그림을 따라 그려보라고 할 것 같아요." 그 말을 듣는 순간 학부모들이 모두 '와'하는 탄성이 나왔다. 나 또한 그 말을 듣고 너무 반가웠다. 어머니께서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아이를 위해 늘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후에는 손을 드는 어머니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미술관에서 본 어머니와 딸의 모습을 이야기해 주었다. 예상했던 대로 대부분의 학부모들은 심하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시간을 되돌아가보면 어떨까? 그럼 좋겠다. 영화 '어바웃 타임'같이 주먹을 불끈 쥐면 내가 후회하는 시간으로 되돌아가서 만회를 했으면 좋겠다. 인생을 두 번 살게 해 주면 안 될까? 그럼 후회를 만회할 수 있을 텐데. 대부분의 부모는 아마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아쉬워하는 그때로 돌아갈 수 없으니 이제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나는 그래서 지금부터 다른 형태의 노력을 찾는 중이다. 지금부터 아들의 편이 되어주고 아들이 꿈을 좇는 데 응원해주려고 한다. 몇 년이 지나고 나서 또다시 후회를 하지 않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