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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갑판 밑 인어 Jul 31. 2023

돈코츠 라멘 세트2

 추가로 주문한 짭조름한 멘마를 술안주 삼아 꼬독꼬독 씹어 삼키면 하이볼로 목을 축이니 조금은 억울했던 마음이 풀리는 것 같았다. 아무도 나에게 잘 못 하진 않았지만 억울하긴 했다. 진짜 나는 재수가 없어도 너무 없다. 34분 전에 일이 할당되면 어떻게 하라는 거야. 4분만 늦게 왔어도 당직인 동기한테 일을 배정됐을 텐데. 묘하게 너무나도 억울하게 터널터널 버스 정류장까지 혼자 내려올 때는 눈물이 날 것만도 같았다. 


 재수 없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그게 딱 내 꼴이다. 원래 오늘은 가족 모임이 있었다. 오늘은 아빠 생신이다. 구태여 오프를 바꿀 생각까지는 없었지만 마침내 오프 날과 딱 맞아떨어졌다. 나에게 오프를 바꿔 줄 수 없냐고 세 사람이나 물어왔지만, 번번이 거절했다. 그렇게 큰 효녀는 아니지만, 우연히 내 앞에 떨어진 오프를 구태여 바꿀 만큼 상도덕이 없지도 않으니. 아빠에게 가족 모임에 참가하겠노라 말했었고, 어제 장소까지 어떻게 갈지 의논했었지만 새 업무가 나에게 할당된 순간 나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모임은 불참이고 어쩌면 집에도 못 갈지도 모른다고. 지난 세월 동안 여러 이유로 너무 많이 가까운 사람들에게 무관심했고, 그걸 또 그 사람들은 이해해 줬는데. 이번에도 또 어그러진 타이밍을 보며 언제까지 나는 이렇게 무관심하게 살아갈까, 살아갈 수 있을까 생각했다.



싸구려 양주와 레몬향이 적절히 섞인 하이볼 한잔을 금세 비운다. 더 먹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마감하는 분위기의 가게에서 시간을 질질 끌기도 어렵다. 2시간 30분 오버타임한 직장인은 어째선지 가게 아르바이트생한테도 깊게 이입하고 만다. 저 사람도 내가 얼른 나가길 바라겠지. 타인을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나에게도 더 이상 남은 시간이 없다. 내일도 일찍 출근해야 하니깐. 살짝 아쉽지만 지금이 적당한 때라는 걸 깨닫고 가방을 메고 가게를 나선다. 태블릿을 주문하면서 선결제한 탓에 마감 준비를 하는 가게는 내가 가게를 나서는지도 모르는 듯했지만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점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다시 나온 번화가. 라멘집에서도 감미로운 멜로디인척 하지만 쾅쾅대는 비트가 밑에 깔린 그다지 조용하지 않은 노래가 퍼져 나왔었지만 여기는 감미로운 멜로디로 포장조차 하지 않는 노랫소리들이 어지러이 퍼져 흐른다. 라멘 먹는다고 뺐었던 무선 이어폰을 다시 찾아 낀다. 내가 듣고 싶었던 노래를 틀어보지만 내 싸구려 이어폰은 노이즈캔슬링 기능이 없다. 내가 듣고 싶은 노래는 번화가에 퍼져 나오는 노래와 기묘하게 어우러져 알 수 없는 노래가 되어 고막을 때린다. 하지만 구태여 이어폰을 빼진 않는다. 무선이어폰은 그러니깐 난 아무와도 직접적으로 교류하고 싶지 않다는 일종의 사회적 선언이다. 


 정체를 잃어버린 노래를 들으면서 유명한 A사의 노이즈캔슬링 무선 이어폰을 떠올린다. 그러니깐 나에게 30만원이 없는 게 아니다. 30만원으로 A사 노이즈캔슬링 이어폰을 살 순 있다. 다만 나는 A사 휴대폰을 살 돈이 없다. 그러니깐 난 30만원은 있지만 150만원은 없는 사람이다. A사 휴대폰이 없으면 A사 노이즈캔슬링 무선 이어폰은 기능이 반밖에 활용 못한다는 말에 사지 못했다. 대신 어딘가에서 사은품으로 받은, 사용하는 휴대폰과 동일한 회사의 무선 이어폰을 쓴다. 싸구려 하이볼 맛은 딱 내 수준이라 기뻤는데 어쩐지 내 수준의 이어폰 앞에서는 살짝 울적해진다.


 자기 연민에 빠지고 싶진 않지만 이미 빠져버렸고 벗어나는 법을 모른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노래가 고막을 때리고 내 수준의 하이볼을 찾아 기뻤던 마음이 조금은 싸늘해진다. 시끄러운 노래가 소리가 퍼지는 거리를 벗어나 버스 정류장을 향하고, 곧 아무 버스나 잡아타고 집으로 향한다.

 집에는 아무도 없다. 직장에서 돌아오기엔 늦은 시간이지만 가족모임이 파하기에는 이른 시간이다. 조용한 집에 불을 켜고 내일을 위해 샤워를 한다. 살짝 울적했던 기분은 알딸딸함이 섞인 몽롱함이 밀려 곧 사라진다. 얌전히 씻고 눕는다. 가족을 기다리기에는 나는 너무 지쳤고 몽롱하다.


 내 수준에 맞는 하이볼과 입맛에 맞는 라멘. 나에게 맞는 것이 존재하는 공간. 내가 쓰는 이어폰. 정체를 알 수 없게 어지럽게 울려 퍼지는 노래. 2시간 30분의 야근. 나를 빼고 진행되는 가족모임.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데서 오는 안도감. 산발적으로 떠오르는 감정과 생각들을 정리하기도 전에 금세 수마에 빠진다. 

 

그렇게 전부 덮어둔 채로 내일의 태양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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