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 The Fury>, 모태신앙의 두 얼굴
여기 십대 후반의 아들이 있다. 그는 그 아비가 백세에 얻은 귀한 아들로서, 집안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라왔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일찍 그는 아버지와 두 종과 함께 먼 길을 나선다. 꼬박 이틀을 걷고 셋째 날 아침에 저 멀리 산이 보이자 아버지는 두 종을 물린다. 종이 지고 온 나무는 아들의 등에 메우고 자신은 불과 칼을 손에 받아 들고 그 산에 오른다. 아들이 보니 아버지는 신에게 제사를 드리러 가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없다.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 할 어린양은 어디 있나요?"
잠시 후 아들은 제단에 올려진다. 그들은 바로 아브라함과 아들 이삭. 과연 이삭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답을 알기 전에 일단 영화 <사자(The Devine of Fury)>(2018)의 세계로 먼저 들어가 보자.
2017년 데뷔작 <청년 경찰>로 560만 흥행을 이룬 김주환 감독이 액션 엑소시즘 <사자(The Devine of Fury)>로 2019년 7월 스크린에 돌아왔다. <사자>는 격투기 챔피언과 구마 사제가 악의 세력인 검은 주교에 맞서 싸우는 이야기이다.
격투기 선수의 엑소시즘이라는 자극적이면서 엉뚱한 설정, 145억 원이라는 막대한 제작비, <검은 사제들> <곡성> 등 그간 흥행을 보장해 오던 오컬트 장르적 기대감이 무색하게도 <사자>는 작품성에 대한 아쉬움을 남긴 채 160만의 관객 동원에 그치며 쓸쓸히 퇴장했다.
등장인물들의 내면묘사가 단순하고, 악의 세력의 정체와 그 목적이 불분명하며, 히어로와 안티 히어로의 최후 대결이 다소 밋밋하여 제아무리 화려한 CG 기술을 덧입혀도 영화 <사자>를 하나의 유니버스로 봐주기엔 부족함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주연 박서준(용후 분)의 타격감 강한 '격투기 엑소시즘 액션'과 연기 거장 안성기(안신부)가 창조해 낸 '연민을 자아내는 구마 사제' 캐릭터는 이 영화에서만 누릴 수 있는 미덕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사자>에는 더욱 흥미로운 지점이 하나 더 있다.
격투기 챔피언 용후에게는 아픈 가정사가 있다. 용후의 엄마는 용후를 낳고 하늘나라로 갔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아빠는 아내를 앗아간 신을 한 번도 원망한 적이 없다. 언제나 신실하고 성실했던 아버지는 음주단속 중 사고로 중태에 빠지고, 절망한 용후는 진심으로 기도하면 신께서 들어주신다는 신부님의 말을 믿고 밤새워 기도했지만 아빠는 결국 떠난다.
그날 용후는 신부의 얼굴을 향해 십자가를 던지고 무신론자가 된다. 성인이 된 용후는 격투기 선수의 길에 들어서고, 파죽지세로 해외 원정 경기에서 전승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원인 모를 상처를 손에 입게 된다.
그는 소위 '모태신앙자'이다. 모태신앙자들은 아이를 신앙 안에서 양육하겠다는 부모의 약속을 보증 삼아 아기 때 유아세례를 받는다. 가톨릭은 첫 영성체를 받고, 개신교는 입교식을 통해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비로소 신앙의 주체가 된다.
'모태신앙'에는 두 가지 차원이 공존한다. '선택된 자' 혹은 '천국의 승차권'처럼 우월감의 차원과 자신의 선택이 아닌 '강요당한 신앙심'이라는 차원이다. 용후는 어린 시절 신부를 돕는 복사로 활동하며 아버지의 신앙을 따르는 모습을 보여주나, 그의 전부였던 아버지의 죽음에 응답 없는 신에게 분노하고 아버지의 신앙을 버린다.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신앙으로 양육하겠다는 부모의 약속은 소멸한 듯 보였다.
영화는 신부에게 십자가를 집어던지는 어린 상주 용후에서 격투기 링에 오르는 성인 용후의 장면까지 십수 년의 시간을 건너뛴다. 그 세월에 대해서는 직접 묘사도 간접 묘사도 거의 없다. 그의 신앙생활은 끝났을 것이라 짐작할 수는 있다. 제대한 후 격투기를 시작했는데 어떻게 단기간에 '불패의 사신'이라는 닉네임을 얻을 정도로 승승장구할 수 있었을까? 뭔가 있을 것 같은 암시가 주어진다. 경기 전에 들려오는 목소리다.
"용후야 빨리 복수해!"
귓가에 속삭이는 기분 나쁜 목소리, 제어할 수 없는 분노, 계속되는 악몽과 가위눌림, 꿈을 통해 빛으로 찾아온 아버지, 그리고 손바닥의 상처. '용후'를 두고 벌어지는 어떤 세력들의 쟁탈전. 그가 자신의 힘을, 아니 갑자기 부여받은 힘을 어느 세력을 위해 사용할지 최후의 결정을 이끄는 원동력은 어디에서 왔을까?
이제 이삭의 운명에 주목해 보자. 제단에 올려진 그는 아버지가 칼을 들어 올릴 때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 순간 음성이 들려온다. "그 아이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독자까지도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세기 22장 12절) 자식 없는 아브라함은 75세 때 하나님으로부터 자손을 약속받지만, 이삭을 얻은 것은 25년이 지난 백세 때였다. 그러나 그렇게 얻은 아들 이삭을 번제 하라는 명을 받는다.
어느 날 갑자기 들려온 신의 음성에 따라 안락한 삶을 버리고 낯선 이민족의 땅을 전전해야 했던 아브라함은 환란 가운데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아야 했고, 그런 그의 믿음에 더 큰 축복으로 화답한 하나님이었다. 이삭의 번제 사건 역시 온전한 믿음은 죽어야 사는 믿음이며 축복은 주어지는 것이지 간청하는 것이 아님을 상징한다.
이삭은 그 무렵부터 아버지의 집 브엘세바를 떠나 어머니 사라와 함께 헤브론에 살았다. 번제 사건 이후 이삭은 아버지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버지의 신앙을 잘 알면서도 인간적인 원망이 과연 없었을까? 성경에는 그런 언급은 딱히 없다. 다만 아버지의 신앙이 그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알 수 있는 기록이 있다. 바로 이삭의 우물 분쟁 사건이다.
흉년이 들자 이삭은 가솔을 이끌고 곡식이 풍족한 애굽으로 가던 도중 그랄 땅에 이르렀을 때 애굽으로 가지 말고 그랄 땅에 머물라는 신의 명을 받는다. 흉작이 예상되는 상황이었지만 그랄 땅에 머물며 농사를 지었는데 풍작이 되어 큰 부자가 되었다. 그러자 그 땅의 사람들이 크게 시기하여 아버지 아브라함이 생전에 판 우물 두 개를 흙으로 메우고 이삭을 골짜기로 내쫓는다.
광야에서 우물은 생존 그 자체. 이삭은 그랄 골짜기에 머물며 아버지의 우물을 다시 팠지만 사람들이 쫓아와 다시 메운다. 이삭이 다른 곳에 우물을 파면, 그 땅의 사람들이 쫓아와서 빼앗고, 또 파면 또 빼앗고를 반복한다. 굴착기도 없던 시절 우물 하나를 얻기 위해서는 사람이 100m 넘게 바위를 부수고 파 들어가야 했다. 주목할 점은 바로 수 백 개를 파면 한두 개 만날까 말까 한 수원(水源)을 이삭은 팔 때마다 만났다는 사실이다.
두 개의 우물을 빼앗긴 이삭은 다시 우물을 파기 시작했고, 또 수원을 만났다. 세 번 연속 우물이 터지자, 그 땅의 사람들은 이삭에게 두려움을 느꼈으며, 왕은 친히 사람을 보내 상호불가침조약을 청하기에 이른다. 우물을 파고 빼앗기기를 모두 네 번이나 반복하면서도 그 땅의 사람들과 다투지 않고 묵묵히 새 우물을 파는 이삭.
그가 그럴 수 있는 원동력은 백 년이 가까운 기간 동안 수없이 반복된 축복의 약속과 뒤이은 환란, 그리고 약속의 실현이라는 아버지 아브라함의 신실한 신앙의 자세를 목격했기 때문이 아닐까. 이삭은 다섯 번째 우물에 안주하지 않고 신이 약속한 땅 브엘세바로 올라가 또 우물을 판다.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제대로 된 신앙의 자세를 물려주었다.
모태신앙자는 '교회 다니는 사람의 자녀'라는 뜻이 아니다. 부모가 신앙 안에서 양육하겠다는 다짐으로 낳은 자녀라는 뜻이다. 자녀는 부모의 신앙생활을 보고 자라며, 부모의 신앙의 자세를 그대로 물려받는다. 기독교인이라면, 특히 목회자라면 자문해 보라. 혹시 신앙의 자세 말고 교회를 물려줄 생각을 하고 있는가. 신앙의 자세 말고 직분을 물려줄 생각을 하고 있는가.
아브라함이 판 우물은 그 땅의 주민들에 의해 흙으로 메워졌고 이삭이 새로 판 우물도 분쟁을 거듭하며 빼앗겼다. 이삭은 주민들과 다투지 않고 새 우물을 팠다. 이삭이 아비에게 물려받은 것은 신앙의 자세이지 우물 그 자체가 아니다. 이삭의 하나님은 우물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수원을 주시는 분이다. 이삭이 무슨 재주로 수원을 정확히 알고 팠겠는가. 당신이 무슨 재주로 큰 교회를 일궜는가. 더 많은 사람들과 먹고 마시라고 주신 교회를 자신의 것으로 알고 교인들과 싸우고 세상과 싸우는가.
우물에 눈이 어두워 수원을 주시는 하나님을 못 보는 이 땅의 부모들에게 영화 <사자>를 권하고 싶다. 자녀를 살리는 것도, 죽이는 것도 부모의 신앙임을 부디 잊지 않기를. 그리고 자녀들에게 한마디, 내 손으로 파지 않은 우물은 전부 분쟁의 우물임을 부디 잊지 마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