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괴된 사나이>, '잃은 양'은 돌아오는 길을 모른다
녹초가 된 목자가 양 한 마리를 매고 양 떼가 기다리는 우리로 돌아오고 있다. 양 한 마리가 사라졌음을 목자가 알게 된 것은 양들을 들판의 우리에 하나씩 넣어본 후였다. 아흔일곱, 아흔여덟, 아흔아홉. 목자의 양은 모두 백 마리인데, 하나가 사라진 것이다.
목자는 일고의 지체 없이 양을 찾으러 길을 나섰다. 어디서 낙오했는지 알지 못하기에 그날 들렀던 경로를 모두 훑는다. 경로만 훑어서는 양을 찾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 길에서 이탈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길에서 미끄러져 굴러 떨어졌는지, 향긋한 풀냄새에 이끌리어 길이 아닌 곳에 들어선 것인지, 뙤약볕에 탈진해 쓰러졌는지, 늑대가 물어간 것인지 목자는 알 수 없다.
목자가 아는 것은 양이 스스로 돌아오는 길을 알지 못한다는 것뿐이다. 그리고 위험에 처했을 때 자신을 방어할 발톱도 이빨도 없으며, 도망갈 만큼 빠르지도 못하고, 뒤집히면 다시 서지 못할 만큼 나약한 존재라는 것뿐. 결국 목자는 잃은 양을 찾았다. 그가 잃은 양을 찾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렸을까? 그동안 그가 겪었을 고초는? 잃은 양은 어쩌다가 실족했을까? 우리에서 목자를 기다리던 양들의 안전은? 단순치 않은 현실적인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잠시 영화 <파괴된 사나이>의 세상으로 함께 가 보자.
<파괴된 사나이>가 2010년 작품이니 벌써 13년이 지났다. 딸을 유괴당한 후 삶이 파괴된 어느 목사가 뒤늦게 딸을 찾아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다. 리암 니슨 주연 <테이큰>(2008) 같은 '아빠 액션'을 기대했다면 적잖이 실망했을 법하다. 이 영화는 딱히 액션도 공포 스릴러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당시 어떻게 100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을까. 타락한 목사의 일상을 담는 전반부의 차갑고 비정한 시선은 갑작스러운 유괴범의 전화를 기점으로 가파르게 반전, 클라이맥스까지 치달으며 마지막 장면에서 '화르르' 타오른다.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은 누구일까. 그의 이전 작품은 <누가 예수를 죽였는가>(2000)이고 다음 작품은 <간첩>(2012), <내부자들>(2015), <마약왕>(2017) 그리고 2020년 1월에 개봉한 <남산의 부장들>이다. 그는 바로 우민호 감독이다.
영화 속으로 가보자. 그 일이 있은 후 8년이 지났다. 딸을 잃고 목사 주영수(김명민)는 죽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목사가 아니다. 원래 의대 출신인 그는 현재 의료기 납품업체를 운영하고 있지만, 석 달째 직원 월급도 못 주고 있고, 곧 막아야 할 어음이 3억이다. 매상을 올리기 위해 질펀한 술 접대를 하고 사방팔방 돈을 융통해 보지만 소득은 없다. 설상가상으로 별거 중인 아내 박민경(박주미)마저 뺑소니 사고로 의식불명이다. 아내의 병원비를 내기 위해, 그리고 돈도 필요해서 그토록 아내가 지키려 했던 '혜린이가 태어나고 함께 살았던 집'을 팔아치운다. 혜린이는 죽었는데 그 아파트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혜린이 살아 있어요."
딸이 살아 있을 리 없다고 믿는 주영수에게 어느 날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혜린이를 유괴했던 그놈 목소리다. 혜린이가 살아 있으니 2억을 가져오면 돌려주겠단다. 영수는 더 이상 유괴범의 수작에 놀아나던 과거의 주 목사가 아니다. 그의 전화를 먼저 끊어 버려서 혜린이가 살아 있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면 몸값을 건네기로 다시 딜을 한다. 반신반의로, 그저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보여주려 했는데, '오 마이 갓!', 유괴범의 손을 잡고 서 있는 소녀는 틀림없이 혜린이었다. 엄마와 똑 닮아서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이제 2억이라는 돈을 마련해야 하는 미션이 주어진다.
혜린이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주영수가 자신을 학대하듯 살았던 그 8년 동안, 아내 민경은 '혜린이는 살아있다'라며 실종아동 가족모임 사무실을 운영하는 등 끈질기게 혜린이와 다른 아이들을 찾는 일에 몰두했다. 논바닥 갈라지듯한 아내의 발바닥을 그녀가 의식불명이 되고서야 쓰다듬게 된 영수. 그것이 아내의 미련함이 아닌 사랑이었음을 뒤늦게 알고 후회하지만, 혜린이를 되찾기 위해 2억이라는 큰돈을 마련해야 하는 영수의 현실은 냉정했다. 아내가 사고당하기 전 마지막 남긴 말 한마디를 예언이자 유언처럼 부여잡고 매달려야 했다.
"혜린이를 찾을 수만 있다면 난 몇 번이라도 죽을 수 있어."
그날 민경은 혜린이를 찾았다. 혜린이의 성장을 반영해 제작한 가상 사진과 흡사했기에 흘깃 스쳤음에도 알아볼 수 있었던 것. 이내 정신없이 뒤쫓다가 차에 치었고 의식불명이 되었다. 민경은 혜린이가 살아있다는 말을 영수에게 전할 수 없었지만, 병원 근처 주차장에서 우연히 영수를 알아본 유괴범 최병철(엄기준)이 마침 돈이 필요하던 차에 몸값을 뜯어내려고 영수에게 전화해 혜린이 살아있음을 알려준다.
화려한 음향장비가 즐비한 리스닝 룸은 병철의 낡고 허름한 시골집 구석에 숨어 있었다. 극 중에서 그는 주로 교회에 음향장비를 염가에 설치해 주는 기술자로 알려져 있다. 그런 그가 어떻게 저런 비싼 음향장비를 소유할 수 있었을까. 그가 어느 교회에 스피커를 설치하는 장면에서 남기는 대사가 의미심장하다.
목사는 큰 예배당에서 오로지 그를 위한 설교를 하고, 병철은 이런저런 주문을 하며 설교 중단과 재개 지시를 반복한다. 한쪽 구석의 커다란 화분을 치워달라는 말에, 목사가 왜냐고 묻자, 빙그레 웃으며 하는 말이, "회절이요. 물체 뒤에 숨어서 못 나오는 소리들이 있거든요. 그것들을 다 꺼내줘야 해요." 그것이 '잃은 소리' 하나까지 소중하게 찾아내는 음향기술자의 직업의식으로만 끝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유괴범 병철은 특히 '미사곡'을 즐긴다. 그래서 교회에 스피커를 설치하러 다니는 것인지, 아니면 교회에 설치하러 갔다가 미사곡에 귀가 트인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병철이 자신만의 리스닝 룸에서 눈 감고 손 모아 미사곡을 감상하는 모습을 누가 본다면 아마 독실한 신도인 줄 알게다. 고가의 장비가 시중에 나올 때마다 병철은 죄 없는 아이들을 유괴하고, 그 부모들로부터 몸값을 받아 장비를 산다. 최고의 장비가 언제 또 나올지 모르니 부지런히 돈을 모아두려면, 유괴에 이용하기 위한 영리하면서도 고분고분한 아이가 필요하다. 그것이 8년 동안 혜린이가 살아 있는 이유다.
이제 목자의 들판으로 돌아가 보자. 이미 종일 양을 치느라 지쳐있던 터에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 다 돌았는데도 보이지 않고 슬슬 해가 저물면, 이제는 목자의 안위가 더 걱정될 판이다. 해진 후 광야는 칠흑 같은 어둠과 들짐승의 습격만이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다.
한 마리쯤은 포기하고 남은 99마리나 데리고 가자. 삯꾼 목자라면 그랬을 것이다. 그 당시 양을 많이 거느린 주인들은 할 수 없이 삯꾼 목자를 여럿 고용했는데, 광야의 환경이 워낙 척박하다 보니 대략 20%의 손실은 각오하고 양을 맡겼다고 한다. 제 양이 아니니 비실대도 돌보지 않고, 사라져도 찾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 목자는 양을 찾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삯꾼이 아닌 주인 목자였다.
어두워질수록 주인 목자의 마음은 급해진다. 양은 길을 잃으면 덤불 속이나 바위 밑에 숨어서 '메에' 소리를 낸다. 그 소리를 듣고 온 들짐승에 발견되기 전에 내가 먼저 찾아야 한다. 덤불 속에 갇힌, 바위 아래 끼어 옴짝달싹 못하는 양을 꺼내주어야 한다. 탈진했으면 죽기 전에 소생시켜야 한다. 양의 나약함을 잘 알기에 목자의 발걸음은 더 빨라진다. 어둡고 척박한 광야를 수색하고 다니느라 지친 목자는 여기저기 구르고 다치고 기절했다 깨어났을 수도 있다. 기력이 다할 때쯤 들려오는 실낱같은 '메에' 소리.
<파괴된 사나이>의 주영수는 목사였다. 양육해야 하고 이끌어줘야 하는 수많은 성도가 맡겨진 목자였다. 유괴된 딸을 끝내 찾을 수 없자 신을 저주하고 교회를 떠났다. 잃은 양도 우리의 양도 지켜내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아내 민경은 달랐다. 민경에게 혜린이는 살아 있는 딸이다. 이미 종결된 사건이니 그만 전화하라는 형사에게 단서를 제공하며 수사 압박을 한다.
8년 동안 지치지 않고 찾던 그녀의 눈에 혜린이 나타난 것이다. 민경의 사고와 죽음이 주영수의 각성과 고군분투로 이어지고,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는 뒤통수를 크게 맞는다.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너무도 몰랐다. <파괴된 사나이>는 '딸은 잃은 부모의 이야기'가 아니라, '8년 동안이나 부모를 기다리던 딸의 이야기'였음을 말이다.
길 잃은 양은 스스로 돌아오는 방법을 모른다. 그가 바라는 것은 목자가 자신을 찾아내 안고 안전한 집으로 돌아가 주는 것뿐이다. 예수가 누가복음 15장에서 제시한 '잃은 양' 비유는 의외의 마무리를 담고 있다. 목자는 양을 찾은 후 양을 우리에 넣는 것으로 끝내지 않는다. 친구들과 이웃을 불러 모아, 잃었던 양을 찾았다며 잔치를 연다. 실족의 원인이 무엇이든 한 마리의 잃은 양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한다는, 그리고 돌아온 양을 공동체가 품을 수 있도록 성도들이 중재해야 함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잃은 양 한 마리를 품에 안은 주영수는 이제 남은 99마리도 품을 수 있을 것이다. 주인 된 목자가 무엇인지 알았을 테니 말이다. 잃은 양 한 마리는 한 마리가 아니라 천 마리이며 만 마리이며 십만 마리이기도 하다.부디 교회가 교회의 확장이나 부흥을 고민하기보다는, 그동안 잃은 양은 없었는지 주인 된 목자의 자세로 성도들을 돌아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