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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innarie Jul 26. 2023

'인류 최초의 살인 사건'이 된 '인류 최초의 제사'

제단인 줄 모르고 걸어 들어갔네, <미드소마> <유전>

 

▲ <아벨과 가인의 제사> Byzantine mosaic in the Cathedral of Monr


여기 두 남자가 있다. 얼굴과 머리 모양, 옷과 신발, 신장까지 동일한 걸 보아 쌍둥이 혹은 형제로 보인다. '아벨'이라는 이름의 남자는 양을 안고 있고, '카인'이라는 남자는 곡물을 손에 들고 있다. 태양의 손이 쏜 열기가 아벨의 양에 도달하고, 양의 머리에 번제 즉 버닝(burning)이 막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위 모자이크는 성경에 기록된 인류 최초의 번제인 '카인과 아벨의 희생 제사'를 그리고 있다. 지금 둘 중 한 사람과 그의 제물이 열납되는 찰나의 장면이다. 그렇다면 카인과 카인의 번제물은 그다음에 열납되었을까? 불행하게도 버닝은 그걸로 끝이었다. 이 사건은 인류 최초의 제사에서 인류 최초의 살인 사건으로 번져가며 돌이킬 수 없는 비극으로 치닫게 된다.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점. 신은 왜 카인과 그의 제물을 받지 않았을까? 그보다 앞서 드는 의문점이 있다. 카인과 아벨은 왜 신에게 제사를 지냈을까? 힌트를 얻기 위해 선사시대에 시작되었다는 오래된 제사 축제 '하지제'를 독특한 세계관과 상상력으로 재현한 영화 <미드 소마>의 세계로 가 보자.  


▲ 9일 동안 열리는 미드 소마 축제의 한 장면. 노란 삼각형 건물 앞에 배치된 식탁과 외지인들은 볼수록 의미심장하다. ⓒ (주)팝엔터테인먼트


저주받은 한 가족의 이야기 오컬트 호러 <유전(Hereditary)>(2018)으로 유명한 아리 애스터 감독이 낯선 마을 축제에 초대된 방문객들이 당하는 참변을 그린 포크 호러 <미드소마(Midsommar>로 우리를 다시 찾아왔다. <미드소마>는 2019년 7월 본편과 10월 감독판 재개봉으로 한국에선 모두 9만 4천여 명의 관객을 동원하는데 그쳤지만, 넘치는 상징과 비의는 N 회차 관람 열풍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특히나 20여 분이 추가된 감독판에는 본편에서 편집된 대니와 크리스티앙의 관계 균열 과정이 상세하게 수록되어 있어 해석의 풍요로움을 더해 준다. 개성 뚜렷한 공포 신예 감독의 첫 두 작품을 관통하는 특징은 무엇일까. 


조울증을 앓던 동생이 자살하면서 부모님을 함께 데려갔다. 가족을 한꺼번에 잃은 대니(플로렌스 퓨) 역시 정신적으로 불안정하기는 마찬가지. 몸과 마음의 긴 겨울을 지나며 햇빛이 따스해졌을 무렵, 대니는 애인 크리스티안(잭 레이너)이 2주 후에 친구들과 스웨덴 여행을 가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크리스티안은 예의상 같이 가자고 권했는데, 대니가 알겠다고 하자 당황한다. 인류학과 대학원생들에게 스웨덴의 '하지제'는 매우 흥미로운 기회이다. 가장 열심인 조시(윌리엄 잭슨 하퍼)의 목적은 박사 논문 완성이나, 마크(윌 폴터)의 목적은 여자, 크리스티안의 목적은 대니로부터 탈출이었던 것으로 보아 대니는 환영받지 못한 일행임은 분명했다. 정작 그들을 마을로 초대한 교환학생 펠레는 대니에게 네가 꼭 오길 원했다는 묘한 말을 남긴다. 그리고 그때 펠레는 스케치북에 화관을 쓴 어떤 인물화를 그리고 있었다. 


▲ '절벽' 의식 후 혼비백산한 대니와 크리스티앙 ⓒ (주)팝엔터테인먼트

 

온통 화이트에 꽃밭인 평화로운 마을 호루가 의 방문객들을 혼비백산시키기에 하루면 충분했다. 이튿날 아침에 벌어진 충격의 '절벽 의식'이 끝난 후, 잉마르의 초대손님 '사이먼'과 '코니'가 사라진다. 아직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한 대니는 공포심에 마을을 떠나자고 하지만, 논문을 쓰는 조시와 이제야 논문 토픽을 찾은 크리스티안은 경쟁하듯 마을 행사에 더 깊숙이 개입하며 대니의 요구를 묵살한다. 인신공양을 암시하는 의식과 기이한 식사가 이어지며, 친구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총 9일간의 축제는 이제 중반에 접어든다.   


마크가 무심코 서 있는 건물 앞. 무심코 지나치는 철장 속 곰. 무심코 지나치는 마을 처녀의 추파. 무심코 올라서 있던 무대. 무심코 눈 소변. 또는 충격적이지만 남의 일이라 무심코 지나친 죽음. 무심코 쳐다본 소각 장면. 무심코 관람한 공양의식. 무심코 먹은 음식의 기이함. 무심코 지나친 이 모든 것들이 사실 이 방문객들 주변을 팽팽하게 포위하고 있었다. 철저히 계산된 '무심코'들은 왜 의심의 영역으로 가지 못했을까. 왜 다섯 명의 방문객은 나흘 동안 혹은 사흘 동안 혹은 이틀 동안 충분히 의심의 영역으로 가져갈 수 있었을 텐데, 왜 마지막 순간까지도 알아채지 못했을까.  


댄스 의식에서 생존하며 5월의 여왕이 된 대니가 이 광란의 미드소마의 최후 승자가 된 듯 보이는가. 9일간의 축제는 이제 겨우 중반에 들어섰다. 5일이 남아 있고 축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기억하라. 방문객들은 모두 마지막 순간까지 상황을 알지 못했고, 다섯 번째 희생자 크리스티안은 그나마 상황은 알고 갔다는 것이 위안이라면 위안일까.


감독판 포스터의 새겨진 붉은 선이 의미심장하다. 엑소더스, 즉 이집트 탈출을 앞둔 전날 밤, 장자 살인이라는 화를 모면하기 피하기 위해, 유대인들이 집 문설주에 발랐다는 어린양의 피가 이러했을까. 그 어린양은 그 밤을 넘기지 못하고 불에 구워지며 무교병과 쓴 나물과 함께 유월절 의식의 일부가 된다.


"이제 우리 가족 맞죠?" 하며 격렬하게 그녀를 환영하는 마을 사람들 사이로, 죽은 엄마가 마치 경고하듯 차가운 표정으로 지나간다. 이상하지 않은가. 대니가 그토록 원했던 것이 자신을 강하게 붙들어 주는 가족이었음이 말이다. 친구들은 모두 원하던 것을 얻었지만, 누릴 기회는 얻지 못했다. 마치 미끼에 끌려 제 발로 덫에 들어온 동물처럼 말이다.  


▲ <유전> 공식 트레일러 컷


<유전>은 더 노골적이다. 애니(토니 콜렛)의 가족은 숲 속 대저택에 산다. 저택 앞에는 작은 오두막이 있는데, 애니의 아들 '피터(알렉스 울프)'의 방과 마주 보고 있다. 주로 애니의 딸 '찰리(말리 샤피로)'가 오두막에 가서 잠을 자는데, 칠흑 같은 밤, 히터의 불빛이 켜질 때마다, 피터는 오두막을 쳐다보게 된다. 그 오두막의 진정한 용도는 영화의 마지막 순간에 가서야 밝혀진다.


비밀 많고 괴상했던 엄마가 죽고 난 후, 자꾸만 이상한 일을 겪게 되는 애니. 미니어처 아티스트인 애니는 주로 집에서 작업을 하는데, 가끔은 의식하지 못한 채 작품에 알 수 없는 단어를 새겨 넣는다. 애니는 최근 어느 갤러리에서 의뢰한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꼭 주문받은 작품만 하는 것 같지는 않다. 왜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애니의 저택 모형도 여러 개 작업했고, 부부 침실과 피터 방, 찰리 방도 작업해 두었다. 심지어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찰리의 사고 장면을 재현한 모형도를 만들기도 해서, 남은 가족들을 공포에 몰아넣는다.


<미드 소마>가 제물들이 각자의 욕망이 이끄는 대로 제단으로 걸어 들어가는 과정을 영화의 본문으로 삼았다면, <유전>은 처음부터 제물로 선택받고 제단에서 태어나 적당한 성체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영화의 본문으로 삼고 있다. 영화 전체가 '제사' 그 자체이다. <미드 소마>가 이교도들의 왜곡된 희생제의라는 블랙 코미디 혹은 대니의 백일몽이라면, <유전>은 악마의 제사장을 조상으로 둔, 후손들의 눌림굿과 그 처절한 실패담이다. 거침없는 인신공양 제의의 향연을 보다 보면, 인간이 도대체 신에게 왜 제사를 드리게 되었는지 단순한 목적에 주목하게 된다.


이제 카인과 아벨에게 돌아가 보자. 두 형제의 부모는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이다. 두 사람은 불멸의 에덴동산에서 살다가 금기의 열매를 따 먹고 신에게서 내쳐진다. 아담과 하와는 알몸의 수치와 일하는 고통, 출산의 고통을 인간의 본질로 부여받고 에덴의 밖에서 살아가다가 부부의 첫 산물, 즉 카인이라는 아들을 얻는다. 카인은 천국에서 쫓겨난 부모로부터 신에 대한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으면서 성장했을 수 있다. 두 죄인 사이에 태어난 죄인의 자식은 불행히도 부모보다 더 죄인이었던 것 같다. 신이 동생 아벨과 아벨의 제물만 열납하고 자신과 자신의 제물을 거부하자 카인의 안색이 변한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세기 4장 6~7절)


주목할 것은 신의 음성은 카인이 아벨을 죽이기 전에 들린 것이란 점이다. 죽인 후 들었다면 아벨 살인이 바로 신이 말한 그 죄라고 해석했겠지만, 아벨 살인 전에 들린 음성이다. 죄가 니 문 앞에 엎드려 있다는 말은, 문을 열자마자 너에게 와락 달려들 정도로 죄가 목전에 있다는 뜻이다. 출발 전에 웅크린 자세로 엎드린 육상 선수처럼 방아쇠가 터지면 그저 달릴 일만 남은 것처럼, 이미 카인은 죄에 대한 통제를 잃고 죄 속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는 뜻이라고 봐야 한다. 


죄 가운데 살아가는 자에게 제사란 어떤 의미였을까. 카인은 제사를 드릴 때 무엇을 생각했을까. 또 무엇을 기도했을까. 무엇을 원망하고, 무엇을 바랐을까. 카인의 모습을 통해 일주일 동안 죄 가운데 살다가, 일요일이 되면 점잖은 옷을 입고 교회에 가서 경건한 척 예배드리고 헌금하고 돌아와 다시 일주일이 시작되면 죄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 모습이 오버랩된다.


신은 이미 죄로 가득한 카인의 삶을 알고 있는데, 그의 제물이 실하든 안 실하든, 제사를 지내든 안 지내든,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신은 이미 아벨의 신실한 삶을 알고 있는데, 그의 제물이 어떻든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제사에 대한 자세한 율법의 규례 등은 이제 더 이상 의미가 없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제사는 공식적으로 사라졌고, 신도들은 기도를 통해 신과 소통한다. 그러나 돌아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제단으로 가득하다. 악은 그 사람이 품은 탐욕에 따라 형체를 달리하며 그 사람에게 미끼를 주며 덫을 놓는다.


탐욕이라는 이름의 악은 매우 교묘해서 한 발짝 한 발짝씩 그를 이끈다. 그리고 제단에 들어서는 순간 덫의 철장이 내려가고 희생양이 현실에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늦었다. 꽁꽁 묶인 채로, 번제를 기다릴 뿐이다. 혹시 내가 잘못된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있는 건 아닌지 항상 경계해야 한다. 잘못된 방식으로, 원하는 걸 다 갖는 순간은 이미 늦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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