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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innarie Jul 31. 2023

목사 성추행 폭로, 교회는 어떻게 덮었나

성추문 등 종교계 민낯 다룬 영화 <로마서 8:37>

▲ <로마서 8:37> 성스캔들에 휩싸인 강요섭 목사 (서동갑 분) ⓒ <로마서 8:37>


이 남자는 누구일까? 무엇을 하는 사람일까. 만면 가득한 저 미소는 무엇으로 인한 것일까. 저 표정에서 우리가 무엇을 읽을 수 있을까. 적어도 내가 읽은 키워드는 '개운' 혹은 '흡족' 두 단어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남자가 처한 상황은 '개운' 혹은 '흡족'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이 남자의 직업은 교회 목사이며, 그는 현재 여신도 성추행 의혹으로 인해 교회 안팎에서 진흙탕 싸움을 벌이고 있다. 자신을 영웅으로 믿고 따르던 후배 기섭은 그를 비난하고 떠난다. "난 형을 진짜 많이 존경했었어요." 그 한 마디가 만들어 낸 미소가 바로 저것이다.



▲ <로마서 8:37> 돌아온 강요섭 목사를 맞이하는 강원로 목사와 기섭 ⓒ <로마서 8:37> 스틸 컷


강요섭. 그가 주인공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없다면 이야기는 시작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사건과 갈등은 그로 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새벽, 강요섭의 도착과 함께 영화의 세상은 어둠에서 깨어난다. 해외 한인교회에서 목회를 하던 요섭은 동생 현민의 비보를 접한다. 


어릴 적 버려진 요섭과 현민을 자식으로 거두어 키운 강원로 목사와 그의 사위 기섭이 이제 막 현민의 매장을 마치자마자, 요섭의 귀환이다. 이 장면은 익숙하다. '돌아온 탕자' 비유의 변형으로, 차남의 비참한 생환이 장남의 금의환향으로 변주되었다. 그러나 그가 입은 금의가 이내 더럽혀지고 찢길 것임을 그는 알지 못한다.



▲ <로마서 8:37> 현민이 강가에 설치한 기괴한 기도 처소. ⓒ <로마서 8:37>


돌아온 요섭이 바쁘게 발걸음을 향한 것은 새로 부임할 '부순교회'이다. 그가 원로목사와 교회 내 권력 다툼을 벌이는 동안, 그가 꼭 알아야 할 한 가지가 잊혀 있다. 바로 동생 현민의 죽음이다. 강가에 기괴한 기도 처소를 만들어 하루 종일 틀어박혀 기도만 했다던 현민. 


켜놓은 촛불이 광목에 옮겨 붙어 기도하던 현민이 그 화마에 휩쓸려 사망한 것이다. 그러나 이상하지 않은가? 기도처소의 위치와 외관이 지닌 기이함, 그리고 하루 종일 매일같이 기도해야 할 제목이 무엇이었을까? 현민 죽음의 미스터리는 이상할 정도로 잊혀져 있다.


▲ <로마서 8:37> 요섭의 아내가 예배 시간에 이상증세를 보이고 있다 ⓒ <로마서 8:37> 스틸컷


죽음의 미스터리는 또 있다. 요섭의 아내다. 그녀의 죽음 역시 잊혀져 있다. 그녀는 새벽기도를 다녀오던 중 실족사했다. 그녀는 해외 한인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는 남편을 두고 홀연히 시댁(강원로 목사의 교회)으로 돌아온다. 


남편도 없는 시댁에 머문다는 것도 언뜻 이해가 가지 않으며, 신앙인으로서 사모 역을 놓고 돌아온 것도 이상하며, 더 이상한 것은 그녀가 교회에서 기이한 행동을 많이 보였음에도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넋 나간 사람처럼 있거나 답답해하며 가슴을 쥐어뜯거나 예배 중에 소리를 지르며 밖으로 기어나가기도 했다. 도대체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괴롭힌 것일까. 그리고 무엇이 그녀를 죽음에 이르게 했을까.



▲ <로마서 8:37> 요섭의 성폭력 사실을 폭로하는 지민. ⓒ <로마서 8:37> 스틸컷



미투. 원로 황 목사와의 폭로전에서 튀어나온 요섭의 성추행 스캔들은 사실이었다. 그동안 요섭을 영웅으로 믿고 따르던 기섭도 충격에 휩싸인다. 지민을 비롯한 여신도들의 익명 폭로를 끈질기게 추적해 회유, 포섭, 협박하는 일부 교인들의 모습은 충격적이다. 목사의 허물이 보이지 않을 만큼, 혹은 보여도 덮을 만큼 그들이 지키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견고한 그들만의 성에서 내쳐진 그녀들은 침묵 속으로 들어간다. 



▲ <로마서 8:37> 강요섭 목사 측 장로들과 황목사는 언제 싸웠냐는 듯이 기섭에 대항에 연합전선을 형성한다. ⓒ <로마서 8:37> 스틸컷


요섭의 성스캔들이 확대되니, 지금껏 요섭과 각을 세우던 황 목사는 돌연 요섭과 휴전을 선언하며 그의 허물을 감싸고돈다. 요섭의 자진 사퇴로 위기를 무마하려 하지만, 실은 요섭은 새 비전선교센터의 센터장으로 내정되어 있다. 


오히려 스캔들을 폭로한 기섭이 음해를 당하고 교회에서 매장될 위기에 처한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아버지의 것도 가이사에게' 가야 직성이 풀리는 것인가.



▲ <로마서 8:37> 강요섭의 양아버지인 강원로 목사가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설교를 하고 있다. ⓒ <로마서 8:37> 스틸컷


나다니엘 호손의 <주홍글씨>에서 A(Adultery 간통)가 새겨진 채 홀로 지탄받아야만 했던 헤스터 프린은 불행하기만 했을까. 사랑하는 여인이 홀로 멸시와 천대를 받는 것을 지켜봐야 했을 딤즈데일 목사는 과연 마음 편했을까. 


7년간의 침묵은 누구를 위한 선택이었을까. 용기가 필요했던 것일까. 사명을 다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일까. 강원로 목사의 침묵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그 죄악의 씨앗은 거대한 나무가 되어 그를 억누르고 있다.


▲ <로마서 8:37> 기섭이 나은의 죽은 고양이를 묻어주며 기도하다가 오열한다. ⓒ <로마서 8:37> 스틸컷


어딜 봐도 기섭이 의지할 사람 하나 없다. 기섭의 딸 나은은 키우던 고양이가 장폐색으로 죽자 상심이 크다. 나은은 아빠에게 고양이를 묻어주고 기도해 달라고 부탁한다. 


기도하던 기섭은 어느새 고통으로 흐느끼고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며 용서를 구한다. 나은은 그런 아비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영화의 세상은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 <로마서 8:37> 기섭과의 논쟁 후 미소 짓는 강요섭 목사 ⓒ <로마서 8:37> 스틸컷


다시 원점이다. 요섭의 미소를 기억하는가. 그는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신도들의 신망과 선망을 일용할 양식으로 삼은 셀럽화된 목회자다. 또한 자기의 죄를 남의 둥지에 떨구고 대리 회개를 시키는 뻐꾸기 신자이다. 그로 인해 뿌려진 미투의 씨앗은 자갈밭에 떨어져 머리가 깨지고, 뻐꾸기의 죄를 대신 속죄하는 죄 없는 오목눈이들은 부름을 받는다. 뻐꾸기는 여전히 직접 회개하지 않는다.


<로마서 8장 37절>(신연식 연출)은 2017년 11월 개봉, 두 달 남짓한 상영기간 동안 전국 4941명(2018. 4월 현재 영진위 통계)의 관객을 동원했다. 상업영화로서는 작은 스피커에 그쳐 크게 증폭되지 못했으나, 치열하게 반성적인 성찰을 보여주는 본격종교영화로서 손색이 없다. 


기독교가 교회 밖으로 나오고 있다. 교회 이야기가 상업영화화된다는 것은 종교가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영화가 일반 관객들에게 정공법으로 다가가고 있다는 의미이다. 미투에 성역은 없다. 영화 속 부순교회에 뿌려진 미투의 씨앗은 발아하지 못했지만, 영화밖 세상에서는 부디 발아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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