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왜 선악과를 만들었는가? <원죄>
질문. 낯선 동네에 도착한 당신. 누군가 뒤쫓는 기척을 느껴 돌아봤더니 저 남자가 보인다. 목발을 짚은 불편한 걸음에도 지치지 않고 계속 나를 따라온다. 당신은 어떻게 대응하겠는가?
심화 질문. 당신은 수녀다. 당신은 이곳으로 오는 버스 안에서 저 남자를 이미 만났다. 당신은 몸이 불편한 그를 도와주려 했지만, 거칠게 거절하고 나아가 당신을 모욕하고, 당신의 신을 모욕했다. 과연 어떻게 대응하겠는가.
남자가 계속 따라오는데 덤덤할 수 있는 여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 남자가 취기가 흐르는 상태라면 더욱 긴장될 것이다. 무서워서 도망치지 않을까? 그러나 신분이 수녀라면, 간단치가 않다. 남자가 임지 내에 거주한다면, 그가 성당의 신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녀가 사회적 약자인 장애인을 함부로 대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는 버스 안 사람들 다 듣는 앞에서 '수녀도 섹스를 하라'라고 모욕을 주었다. 적어도 이 사건만 놓고 보면, 남자가 소위 갑질을 하는 셈이다.
여인은 종신서원을 하고 첫 부임지 군산으로 내려온 수녀 에스더이다. 남자는 선천성 소아마비 환자 상문으로, 아내는 군산 아메리카타운에서 성매매를 하다 흑인 군인과 눈이 맞아 도망갔다. 딸 혜정은 간질 환자로, 발작 때문에 학교를 그만두고 근처 항구에서 생선을 나르며 아버지를 부양하고 있다.
에스더 수녀는 혜정의 학교 복귀와 간질병 치료를 돕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그런 수녀를 비웃듯 상문은 수녀에게 술을 권한다. 모욕감을 느낀 에스더는 상문에게 술을 끼얹게 되고, 신부로부터 처신에 대해 경고를 받는다.
어느 날 에스더의 방을 침범한 상문은 자고 있는 그녀의 입술에 립스틱을 괴이하게 바르고 도망가다 잡혀 경찰서에 붙들려간다. 아내가 두고 간 붉은 립스틱.
이 영화는 노인이 된 에스더 수녀가 옛 부임지를 찾아가 신부에게 40년 전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액자 구조를 띠고 있다. 현재 시점은 컬러, 과거 시점은 흑백을 취하는데, 흑백의 세상에서 단 한 번의 컬러가 등장한다. 그것이 바로 몸을 파는 아내의 얼굴에 도장처럼 찍힌 붉은 입술이다. 매춘의 인장 같은 입술.
상문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수녀에게서 성적 매력을 느끼는 것인가. 아니면 청빈과 순결의 상징인 수녀를 매춘부로 끌어내리고 싶은 욕망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신의 사람인 수녀에게 질투를 느끼는 것일까. 아니면 그녀가 신에게서 해방되어 인간으로서 기쁨을 누리길 바라는 것일까. 상문의 립스틱 드로잉은 더한 파국으로 이어진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원죄'는 최초의 인간 아담이 신의 금기를 위반한 죄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기에,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이미 죄인 된 존재라는 의미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세기 2장 17절)."
선악과를 먹은 후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이 벗고 있음을 알고 부끄러워한다. 갑자기 그들의 옷이 벗겨진 것이 아니다. 그들은 원래부터 벗고 있었다. 부끄러움이 없는 벌거벗음에서 이제 부끄러움이 있는 벌거벗음으로 변한 것이다. 아담이 빼앗긴 것은 신의 은총이라는 옷이고, 얻은 것은 부끄러움과 연약한 몸과 고통이다.
2018년 4월 19일 극장 개봉한 영화 <원죄>(감독 문신구)는 종신서원을 하고 이제 막 부임지에 첫 발을 디딘 수녀와 신을 저주하는 장애인 부녀 사이의 비극을 다룬 영화이다. <원죄>가 종교영화이긴 하지만, 영화의 주된 갈등은 부녀가 겪는 사회의 부정적 시선과 최소한의 생의 의지가 맞붙어 충돌하는 데서 빚어지고 있다.
상문은 자신이 신의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한다. 선천성 소아마비로 인해 목발 없이는 걷지 못하며, 하나뿐인 딸은 언제 어디서 발작을 일으킬지 예상할 수 없는 간질병 환자이다. 게다가 마을 사람들은 부녀의 가족사를 다 알고 있다. 아메리카타운이 위치한 군산에서 성매매 여성의 남편, 딸에 대한 시선이 오죽했을까.
옷을 입어도 마치 벗은 듯, 부녀의 프라이버시는 무참히 까발려져 있다. 마을 사람들의 멸시 가득한 시선을 내면화하며, 마치 자신들에게 있는 인간성의 지표를 지우는 듯 그렇게 살아왔는데, 어느 날 말간 얼굴의 수녀가 그들이 지운 인간성의 지표를 되살려 주려 하자 두려워서 거세게 저항하는 것이다.
살아 있는 성전을 표상하는 수녀의 순수한 열정도 벌거벗겨진 자들의 부끄러움을 가리는 옷이 되기엔 부족하다. 수녀 역시 벌거벗음이 부끄러운 원죄를 가진 인간이기 때문이다. 혜정 역시 미사 중 일으킨 발작 때문에 더 이상 부끄러워서 미사도 못 드리러 오겠다고 말한다.
신부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못 본 척하는 게 해 줄 수 있는 전부라고 한다. 소외된 자들의 마지막 보루가 성전이 아닌가. 신의 은총의 옷은 정녕 무엇이 대신해 줄 수 있을까.
날이 갈수록 앞다투어 대형화하고 문화센터화하는, 심지어 체인화하는 교회들을 보며 성전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지역 커뮤니티센터인지 구분이 모호한 세태에 씁쓸해진다. 종교생활을 하려면 스펙이라도 쌓아야 할 것 같은 강박이 들 지경이다.
입은 옷이, 사는 아파트가, 타고 다니는 차가 곧 그 사람의 정체성이 되는 세상, 또는 그 사람이 가진 장애가 곧 정체성이 되는 그런 세상에서 벌거벗은 자들을 위한 자리는 없다. 혜정의 마지막 선택에 마음이 아프다. 성전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근본적인 물음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