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가을엔 종묘 홍시를 놓쳤다.
홍시가 주렁 주렁 매달린 종묘를 걷자면 마음이 절로 풍요로워 진다.
아쉬운대로 단풍이 끝날 무렵 종묘에서 그림친구들 D&D와 만나기로 했다.
우리는 계절따라 서울의 맛집, 멋집을 찾아다니며 그림을 그린다.
2018년에 만났으니 벌써 5년째 모임이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나와 햄토리, 옥강까지 세명이 D&D의 멤버다.
D&D는 갈곳이 정해지면 그 근처 맛집이 문여는 시간에 만나는 룰이 있다.
오늘은 청계천 [우육면관]에서 11시에 만났다. 가게가 소담하니 예쁘고 음식 맛도 좋았다. 우육면과 대만식 물만두인 수교, 오이소채가 이곳 메뉴 전부다.
우육면은 특과 보통사이즈가 있는데 수교를 맛보려면 보통사이즈를 주문하는게 좋다. 특을 주문했더니 양이 좀 많았다. 보통을 시켜도 소고기가 넉넉하다. 여기에 송송 썬 쪽파와 달걀 반숙이 입맛을 돋군다.
고수와 라장소스는 취향껏 넣는다.
나로 말하자면 고수를 아주 듬뿍, 라장소스도 좀 많이 넣는 편이다.
국물을 맛본 순간 적당히 시원한 고기국물 맛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탱탱한 면발을 후루룩 넘기는 맛도 좋고, 무엇보다 곁들인 수교 속에 통째로 들어간 새우가 제법 오동통하다.
오이 소채를 오도독 씹자니 약간의 느끼한 맛이 상쾌하게 가신다. 비교적 최근에 생긴 곳인데도 몇년째 미쉐린 맛집에 이집이 올라가는지 알겠다.
오늘처럼 약간 쌀쌀한 날이나 비가 올 때 다시 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청계천 주변을 지나면 생각날 맛이다.
식사 후 종각 근처 타이거슈가에서 흑당밀크티를 마시며 여기가 대만인가 했다.
우리는 몇년 전에 대만을 같이 여행한 후 그때를 추억하며 중국 요리, 홍콩 요리, 대만 요리를 자주 먹는 편이다.
우리 중에 대만병은 햄토리가 가장 심각한데 틈만나면 대만에 다시 가자고 노래를 부른다.
반면 옥강은 영국에 다녀온지 얼마 안되어 영국병 증세가 있고,
나는 틈만나면 서울 서울 서울을 노래를 부르며 서울에 살고 싶다고 한다.
서울병에 단단히 걸린 것이다.
오후에 종묘를 산책하고, 바로 옆 퀸즈가드에 들러 목을 축이고, 송해길에서 가볍게 아구찜을 먹었다.
만오천보를 거뜬히 걸었다.
종묘는 본래 시간제 관람으로 운영하지만 토요일과 일요일, 매월 마지막 수요일, 명절과 국경일에는 자유관람이 가능하다. 그러니 자유롭게 관람하려면 평일은 피하는게 좋다.
사극에서 신하들이 "종묘사직을 보호하시옵소서 " 라고 말하는 걸 들어봤을 것이다.
중국 주나라의 [주례]에서는 도읍을 정하면 "좌묘우사"라고 해서 임금이 머무시는 궁궐 왼쪽에 종묘를, 오른편에 사직을 두도록 정해두었다.
그렇다면 종묘과 사직은 뭐하는 곳일까?
일단 사직은 토지신 "사"와 곡식의 신 "직"을 모신 곳이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농업이 중심인 국가였으니 토지와 곡식의 신을 받들어 모신 것이 이해가 된다.
우리가 오늘 들른 종묘는 조선왕조의 역대 왕과 왕후들의 신주를 모신 곳이다.
즉 왕실의 조상신을 모신 일종의 사당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은 자들의 공간인 만큼 건축물이 장엄하기로 유명한 곳이다.
종묘의 가장 중심 건물은 역대왕들의 신주를 모신 정전이다. 정전이 대규모 공사중이었다. 그곁 영녕전 뜰을 잠시 거닐었다.
우리의 오늘 목적은 종묘 단풍이라 부속 건물들을 한바퀴 에두르는 산책 길을 따라 걸었다. 단풍이 절정이었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 이렇게 건강한 숲이 잘 보존되어있다니, 우리 모두에게 축복이다.
퀸즈가드는 종묘 담벼락이 뵈는 명당에 자리잡은 영국식 바다.
누가 여기로 우리를 안내했겠는가.
당연히 영국앓이 중인 옥강이다.
위스키를 넣은 뜨거운 사이다와 영국 맥주 런던프라이드를 마셨다.
취기가 오른 채 종묘 담벼락과 단풍을 끄적 끄적 그렸다.
아무런 근심 걱정 없이 계절 한가운데서 가장 나다운 상태가 되었다.
앞으로도 나를 먹이고, 입히고, 좋은 것들을 보게 하려면 오래도록 건강해야겠다.
몇년 동안 계절 따라 꽃구경, 나무구경, 비구경, 눈구경을 하며 어지간히 먹고 마셨다. 슬금 슬금 그림도 그렸다.
두런 두런 이야기 끝에 봄, 여름, 가을, 겨울 별로 서울의 맛과 멋 기행, 드로잉을 엮어 책을 한권 써보면 어떨까 운을 띄웠다.
햄토리는 요즘은 인터넷이 잘되있어 서울이야기는 안팔릴 것 같다, 팔리는 책을 만들려면 대만에 다시 취재 여행을 가자며 대만병 걸린 사람다운 말을 했다.
옥강은 팔리는 책을 만들려면 나보러 역사 이야기를 보강하라며, 책이 나오면 그림 전시와 엮어서 책을 팔자고 했다. 그러면서 2편은 동해, 3편은 대만으로 하자고 했다. 옥강은 전시병도 있다.
서울병에 걸린 나는 어떻게든 잘 엮으면 좋겠는데 하며 미련을 못버리고 생각한 목차를 읊어봤다.
현실화하려면 그림을 더 많이 그려야할 것 같긴하다.
(봄: 봉은사 라일락 / 창덕궁 홍매화-청매화 / 덕수궁 살구나무
여름: 청계천 버드나무 / 연남동 철길 / 서촌 수성동 계곡
가을: 종묘 홍시 / 서울숲 단풍 / 길상사 단풍
겨울: 경복궁 설경 / 부암동 석파정/ 강남 갤러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