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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연함'이 주는 공포

by 언제나 바람처럼


어젯밤 잠들다가 엄마 모습이 또 떠올랐다. 굳게 다문 입술, 온기가 빠져나간 얼굴, 물체로서의 엄마.

지난해 봄 엄마가 떠난 후 잠들 때 자주 생각난다.


난 어릴 때부터 유독 겁이 많았다. 대학 때 자취하던 시절에는 밤에 늘 형광등을 환하게 켜 놓고 잤다. TV 뉴스에서 잔인한 기사가 나면 설거지하다가도 채널을 돌렸다. 영화에서 무서운 장면이 나오면 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갈수록 피하다 보니 겁은 더 많아졌다.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두려움은 여러 형태로 나타났다. 많은 사람 앞에 서기가 무서웠고 낯선 사람과의 교류를 피했다. 두려움의 대상은 실패와 비난, 관계, 상처에 이르기까지 가지를 뻗어나갔다.


그렇게 세상에 두려운 것이 많은 나에게 죽음은 단연 최고였다. 어렸을 땐 죽는 것이 무서웠고 죽은 사람을 보는 것이 무서웠다. 커서는 죽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힘들었다. 몇 해 전 갑자기 형부가 세상을 떠났고 장례식장에서 나는 응급실로 실려 갔다. 지난해는 엄마였다.


엄마를 마지막으로 보기 위해 나는 신경안정제를 먹고 지하 입관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수의로 겹겹이 둘러싸인 엄마 얼굴을 봤다. 무표정한 얼굴에 영원의 시간이 멈춘듯했다. 곧이어 화장터에서 관이 소각로로 들어가고, 두어 시간 만에 도자기 함에 담긴 엄마는 납골당에 안치됐다. 벚꽃 흐드러진 봄날 엄마는 그렇게 떠났다.

그 후 이상하게 죽음이 무섭지 않았다. 죽는다는 것도, 죽은 사람을 보는 것도.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어졌다.

공포는 막연한 상상에서 나온다. 죽음이 두려웠던 것도 마찬가지. 상상 속에서 막연함을 걷어내자 비로소 실체가 보였다. 실제로 직접 대면하니 두려움은 사라졌다. 엄마가 남긴 마지막 선물이다.


이제 막연한 상상은 하지 않기로 한다. 한번 맞닥뜨려보지 뭐.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게 어디 있겠어.

새로운 일, 새로운 사람, 새로운 환경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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