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에서 셋째 날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나는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뜨거운 커피를 찾는다. 이제는 그냥 습관이 되어버린 일상일지라도 나는 여전히 향긋한 커피 내리는 순간 퍼지는 그 향기가 즐겁고, 뜨거운 첫모금을 마시는 그제야 진정 잠에서 깨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런 커피가 다 떨어졌다.
딸아이, 아내와 셋이서 손잡고 카페를 향해 집을 나선다. 아침 9시 반.
부천집이었다면 거리는 느지막하게라도 출근하는 차들로 바쁘고 도시는 벌써부터 후끈한 증기를 뿜어내는 기계처럼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을 것이나 강릉집은 다르다.
아직도 차갑고 신선한 공기가 참새들 지저귀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동네 골목골목에 남아있다. 따뜻한 커피로 완전 무장한 우리는 소나무길을 따라 아침의 해변을 보기 위해 강문해변으로 향했다.
강릉집에서 해변까지는 25분가량을 걸어가야 한다. 소나무 사이로 바닷바람이 어렴풋이 느껴지는 기분 좋은 산책길은 딸아이가 조르기 시작하면서 우리의 수행길로 바뀌었다.
안아주면 내려달라, 내려주면 마실 물 달라, 울고 소리 지르는 두 살 딸의 투정은 한걸음 디딜 때마다 격렬해졌다. 원래는 가볍게 커피만 마시고 돌아가려던 터라 물도 챙겨오지 않은 마당에 딸아이의 계속되는 "물 줘"라는 칭얼거림과 편의점 하나 보이지 않는 거리에 강릉이라는 동네에 짜증이 밀려왔다.
어제 본 바닷가 한 번 더 보겠다고 듬성듬성 나무나 있고 2월의 차가운 바람만 쌩하니 부는 황량한 시골길에 가족들을 벌벌 떨게 만든 내 결정이 후회스러웠다.
그렇게 후회와 "돌아갈까"라는 생각을 반복하며 걷다 보니 그 이름도 얄밉게 보이는 강문해변에 도착했다.
사람 마음만큼 간사한 게 없는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원효대사가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라고 한 말은 시대를 초월하는 진리가 맞긴 맞는 것 같다.
일단 바닷가에 도착하자 모든 신경질적인 생각들과 불만들이 시원하게 부서지는 파도에 깨끗이 씻겼다. 차갑게 불던 겨울바람은 얼굴 위에 기분 좋게 살랑이며 모래사장에 쏟아지는 따뜻한 햇살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고, 딸아이는 생수 한 잔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빵글빵글 웃으며 조개를 줍고 다녔다.
바닷물은 너무나도 파래서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을 초라하게 만들었고, 파도 피하기 놀이를 하다가 적당히 더워지기까지 한 우리는 해변에 앉아 땀을 말리며 파도가 만들어내는 규칙적인 리듬을 감상했다.
모든 것이 완벽했고 더 바랄 게 없는 행복을 느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분명 같은 길이었는데도 우리는 너무도 재미있고 금세 집에 도착해버리고 말았다.
나는 오늘 걸었던 두 번의 산책길을 오래 기억하고 싶다.
분명 같은 길인데도 한 번은 너무도 힘들고 길었지만, 다른 한 번은 주변의 아름다운 것들로 가득 차있고 아쉬울 정도로 짧았다.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강릉집에서의 이 생활도 끝이 나면 나는 다시 부천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매일 같은 산책길을 걷듯이 일상을 살겠지.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자'라는 진부한 생각 따위는 하고 싶지 않다.
다만 매일 이어지는 하루 속에서 단 한 번이라도 내 마음을 그토록 행복하게 해줬던 '강문해변'을 발견하자. 그리고 그 충만한 행복감으로 매일 같은 산책길을 기분 좋게 걸어보겠다는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