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루 Feb 10. 2023

혼술

호타루의 빛과 헤어질 결심

술에 약하다. 직장인으로서는 최악인 셈이다. (아, 옛날 직장인으로서는.) 술 잘 마시는 사람이 일도 잘한다는 명제가 여전히 진실이던 시기에 일을 시작했다. 2차, 3차, 새벽까지 술자리가 이어질지언정 다음 날 누구보다 일찍 출근해 업무를 봐야 하던 그런 시절 말이다.


나도 아예 술을 못하는 건 아니었다. 소주 반 병 정도, 맥주는 500cc 두어 잔, 와인도 반 병 정도는 마실 수 있었다. 지금도 그렇게 마신다고 필름이 끊긴다거나 다리가 풀리는 건 아닌데 문제는 두통이다. 평소에도 만성두통에 시달리는데, 술만 들어갔다 하면 그 증상이 더 심해진다. 숙취라고 하기엔 너무 즉각적인 반응이다. 원래도 술 잘 마시는 촉망받는 인재상과 거리가 있었는데 최근엔 회식자리에서 아예 술을 입에 대지도 않는다. 그저 전사자들(혹은 부상자들)을 집으로 실어 나르는 운전병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할 뿐이다.






그런데 이 와중에도 혼술은 끊지를 못했다. '호타루의 빛'이라는 일본드라마가 있었는데, 잘 나가는 커리어우먼인 주인공이 집에만 오면 빨간 츄리닝으로 갈아입고 대청마루에 들러붙어 아주 맛깔나게 맥주를 마신다. 비록 대단한 커리어우먼도 아니고 우리 집엔 대청마루도 없지만, 나 역시 그녀처럼 퇴근 후 영화를 보면서, 혹은 드라마를 보면서 맥주 한 캔 하는 게 일상의 유일한 낙이었다.


집에서 마셔도 두통은 예외 없이 찾아온다. 하지만 손 닿는 거리에 두통약도 있고, 두통의 전조증상이 시작되면 바로 술을 내려놓고 드러누울 수도 있으니 밖에서처럼 부담스럽진 않다.


하루의 스트레스를 날려버릴 한 캔의 행복. 이 정도의 음주는 나쁘지 않을 거라, 혹은 나빠도 어쩔 수 없는 거라 자기 위안을 했는데, 며칠 전 회식에서 어떤 선배분의 이야기가 명치를 쿡 찔렀다.





"난 집에서 술 안 마셔요."

"아유, 세상에 맛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혼자 술을 마셔요."


와, 생각 못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종종 해보는 밸런스 게임이 있다.

"둘 중 하나를 끊어야 한다면, 밀가루를 끊을래요? 고기를 끊을래요?"

"그럼 커피를 끊을래요? 맥주를 끊을래요?"

전자는 너무 잔인해서 대답할 수 없다.

(허나, 대답하는 게 밸런스게임의 룰이니 울면서 고기를 끊을 듯)

하지만 후자에 대한 답은 너무 명확하다. 커피를 위해서라면 맥주를 끊어야지.


세상에 맛있는 게 얼마나 많은가. 나는 밀가루도 먹어야 하고, 고기도 먹어야 하고, 커피도 마셔야 한다. 한정된 내 위장에 넣을 것들이 "빵, 라면, 국수, 삼겹살, 곱창, 수육, 스테이크, 아메리카노, 카푸치노.." 이다지도 많은데.. 이거 다 먹을라 치면 당연히 맥주를 들이부을 위장은 없는 것이다.





어쩐지 간단하게 혼술을 끊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장담하진 않겠다.(...)


나는 과연 혼술을 끊고 술로 인한 두통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 것인가?!


반년 후쯤 이 문제에 대해 다시 얘기해 보겠다.



   


혼술은 아니었지만 (아마도) 마지막 술자리 ㅠㅜ 23. 1. 26.
매거진의 이전글 '중년구간'입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