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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 Jan 04. 2023

걸리버 여행기에 담긴 인간의 불완전한 이성과 극복방안



1. 서론

(인간의 이성은 완전 한가?)

 

2. 본론

2-1.릴리퍼트, 인간의 교활함과 허위의식의 상징

2-2. 걸리버의 시선, 자만과 무지의 상징

2-3. 전쟁을 통해 비춰지는 인간의 폭력성

2-4. 그럼에도 인간을 바라봐야 하는 이유

 

3. 결론

(인간의 불완전한 이성과 인간사회의 퇴보 과정, 그럼에도 인간을 바라보아야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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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서론

(인간의 이성은 완전한가?)


플라톤의 『국가』에선 인간의 영혼을 이루고 있는 3요소로 이성과 기개 그리고 욕구를 말했다. 여기서 이성은 영혼의 합리적인 요소로서 사물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며 진리를 추구하고 지혜를 증진시키는 역할을 한다. 인간의 이성에 대한 논의는 한 세기의 걸쳐 이루어졌다. 이성을 통해 욕구와 기개를 적절히 조화해 나가야한다고 주장한 플라톤의 『국가』와 달리 인간의 이성, 그 자체를 과연 신뢰할 수 있는 지에 대해 의문을 던진 소설이 있다.


그것은 바로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이다. 조너선 스위프트는 이성이 없는 존재인 야후를 통해 이성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인간은 동물 이하의 존재로 전락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국가』는 이상적인 철인 통치 국가와 타락해버린 사회와의 비교를 통해 진행되었다. 『국가』의 논의는 올바른 국가를 세운다는 하나의 가정을 통해 시작되었다. 이 가정에는 인간이 이성, 기개, 욕구가 조화를 이뤄 정의로운 사회를 이룰 수 있다는 희망과 그 반대의 경우 타락한 사회를 이룰 수 있다는 경각심이 모두 담겨있다. 이상사회의 희망을 전한 플라톤의 국가와는 달리 걸리버 여행기는 인간의 본성이 항상 타락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의 이런 비판은 당시 사회에서 인간의 이성이 애초에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다는 판단에 의한다. 스위프트의 비판 대상은 그와 같은 시기에 살아왔던 계몽주의자들 그리고 근대주의자들이다. 특히 스위프트는 그들의 합리주의에 반대했다. 합리주의자들은 근대과학이 고전문학에 보다 우월하다고 믿어왔으며, 인간을 이성적인 동물로 파악했다. 그들은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이며 그들의 과학과 발전에는 큰 의미가 있다고 주장한다.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는 인간이 정말 합리적인 존재인가라는 물음과 근대 과학을 통한 발전이 인간에게 올바른 길을 제시해주고 있는 지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스위프트는 인간이 본성은 이성적이라 판단할 수는 없으며 인간과 동물을 구분 짓는 것은 근대 과학과 문명의 발전에만 있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걸리버 여행기』는 인간의 이성이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전제로 시작한다. 불완전한 이성이 작동하고 있는 인간 사회는 릴리퍼트인, 라퓨타인, 야후를 통해 소설 속에서 그려진다. 릴리퍼트인들은 그들만의 언어를 만들고 정치체제를 이루며 사회를 이뤄가지만 이들이 이성적인 존재라고 보기는 힘들다. 그들은 교만과 허위의식으로 가득한 존재이다. 그들 자신보다 육체적으로 월등한 걸리버를 대함에 있어 무례함을 범하고 있으며 관리를 선출하는 과정도 비상식적이다. 라퓨타인들은 지적으로 우월한 존재이지만 이들이 완전히 이성적인 존재는 아니다. 그들은 상식과 과거를 배제한 순수 실험만을 추구한다. 이들의 연구에는 확실성과 직접적인 수치만 있을 뿐 이성에 따른 판단은 찾아볼 수 없다. 걸리버가 혐오의 시선으로 바라본 야후는 인간이 이성에 제재를 받지 않을 시 동물보다 더 추한 존재로 변할 수 있다는 걸 시사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 소설의 주인공 걸리버에게서도 인간의 이성의 불완전함을 찾을 수 있다. 걸리버가 자신과 다른 존재인 브롭딩낵인, 야후에게 갖는 역겨움과 편견을 통해 그의 자만과 무지를 발견할 수 있다.


이처럼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인물들은 대부분 불완전한 이성을 갖고 있다. 본고에서는 [걸리버 여행기]가 말하는 인간의 불완전한 이성에 대해 말해볼 것이다. 본고는 첫 번째로 릴리퍼트 인들에게서 보이는 인간의 교활함과 허위의식에 대해 말해볼 것이다. 다음으로 걸리버가 브롭딩낵인들로 부터 느끼는 역겨움과 혐오감을 통해 인간이 얼마나 교만한 존재인지에 대해 말해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걸리버 여행기에서 묘사된 전쟁의 역사들을 통해 인간이 얼마나 폭력적인 존재인지 말해보겠다.


본고를 작성하는 데 있어 필자에게 스위프트가 인간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버렸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스위프트를 존경하는 사람들은 그가 인간 전체는 싫어했지만 개별 인간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고 주장한다. 걸리버 여행기에서도 인간의 사회가 타락해가고 퇴보 중이지만 개별인간에 대한 혐오까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은연중에 말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후이늠 국에서 빠져 나온 걸리버가 멘데스 선장에게 갖는 오만과 편견일 것이다. 걸리버는 인간이 야후라는 점에 집착한 나머지 인간 내면에 숨은 호의와 친절에 대해 보지 못한다. 이런 걸리버의 모습은 인간의 타락에만 집착한 나머지 그 내면의 선함을 보지 못했던 스위프트 자신에 대한 반성이다. 걸리버 여행기는 타락해 버린 이성의 잔재만을 지닌 인간이 얼마나 타락해질 수 있는 지 인간 사회를 통해 보여주었지만 그와 동시에 개별 인간에게는 이런 불완전한 이성을 극복할 희망이 있다고 전하고 있다. 그렇다면 걸리버 여행기가 말한 희망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걸리버 여행기가 인간의 불완전한 이성만을 제시한 소설이었다면 오늘 날만큼의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을 것이다. 걸리버 여행기는 인간의 이성이 불완전한 하지만 그 내면에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호의와 친절 그리고 발전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이 글은 걸리버 여행기가 말하는 인간의 불완전한 이성에 대해 말함과 동시에 인간이 불완전한 존재이지만 인간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말아야할 이유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2. 본론


2-1. 릴리퍼트, 인간의 교활 함과 허위의식의 상징



걸리버보다 왜소한 육체를 가졌음에도 위엄 있는 자세를 취하며 그들만의 교리와 법률을 만드는 릴리퍼트인들의 모습은 이들이 얼마나 교만과 허위의식으로 가득한 존재인지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자신만의 관점에서 권력을 잡고 사회의 규칙을 정한다. 걸리버는 이들의 모습을 인형에 비유함으로써 이들의 행동을 우스꽝스럽게 표현한다. 걸리버에게 보이는 릴리퍼트인의 모습은 작은 인형에 지나지 않으며 이들의 공격 또한 그에게 따끔할 정도의 고통만을 줄 뿐이다. 릴리퍼트인들은 자신만의 관점에서 걸리버를 묶어 쉽게 조종할 수 있다 판단하고 그를 릴리퍼트의 법령에 쉽게 따르게 만들 수 있다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릴리퍼트의 오만과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릴리퍼트인의 손톱만한 키 차이가 그들 사이에는 매우 중요할지 몰라도 걸리버의 관점에서는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심지어 자신보다 거대한 걸리버를 눈앞에 두고도 자신의 왜소함을 깨닫지 못한 채 거대한 걸리버에게 릴리퍼트의 법령을 운운하며 그들만의 정의를 지키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여기서 릴리퍼트가 이성을 지닌 존재들임을 알아야 한다. 릴리퍼트는 이성을 지닌 존재로서 그들만의 사회를 구현하고 그들만의 권력을 만든다. 허위의식과 자만으로 가득한 그들의 모습은 당시 인간 사회의 모습과 별반 차이가 없다.


스위프트는 인간이 만든 사회와 법률이 얼마나 허위의식으로 가득 찬 것들이며 인간이 얼마나 교활한 지를 거인의 관점에서 시사하고 있다. 특히 릴리퍼트의 관리 선발 제도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이 소설은 사회 비판의 정점을 찍는다. 황제가 잡은 막대기 위를 넘거나 그 밑으로 기어가는 오락을 제일 잘하는 사람에게 순위에 다라 파란색, 빨간색, 초록색 훈장을 주는 모습은 당시 영국의 상훈 제도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이다. 릴리퍼트 인들은 절대적인 법률과 권력에 의해 사회가 유지되는 것이라 말하지만 사실 그들의 정치는 막대기 하나로 권력을 나눌 만큼 매우 사소하고 볼품없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스위프트가 바라본 영국의 모습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가 바라본 영국 사회 또한 엄격한 법률과 관습을 통해 유지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허위의식으로 찌든 사람들에 의해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이 장면은 스위프트가 당시 정치권의 인물들을 얼마나 혐오하고 있으며 이들의 권력에 대해 얼마나 하찮게 생각하고 있는 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스위프트의 비판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더 나아가 그가 살았던 시기의 당파 분쟁으로 향한다. 그가 살았던 당시 17세기 영국에서는 카톨릭으로 대표되는 고 교회와 개신교로 대표되는 저 교회 간의 당파 분쟁이 심하게 일어났다. 걸리버 여행기는 이 심각한 당파 분쟁마저 우스꽝스럽게 묘사함으로써 이들의 투쟁과 싸움이 얼마나 무가치하고 허위의식으로 가득 찼는지 그려낸다. 릴리퍼트에는 높은 굽을 신는 트라멕산당과 낮은 굽을 신는 슬라멕산당이 존재하는 데 이 둘은 서로 갈라져 대립하게 된다. 놀라운 것은 이들 사이의 굽 차이가 무려 1.7mm 밖에 되지 않는 다는 사실이다. 이 차이는 걸리버의 눈에 보이지 않을 차이이다. 하지만 이들의 이런 작은 차이 때문에 전쟁을 하고 이로 인해 수많은 생명들이 희생된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차이로 인해 발생하게 되는 전쟁과 갈등은 모든 인간 사회의 분열된 정파나 전쟁은 눈에 보이지 않은 매우 사소한 차이로 부터 왔다고 말해주고 있다. 인간이 당을 나누어 대립하고 전쟁을 하는 것은 이런 눈에 보이지도 않는 차이를 서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차이를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릴리퍼트 인들의 모습을 통해 우린 인간의 이성이 얼마나 불완전한지를 체감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걸리버에 대한 릴리퍼트 인들의 변심을 통해 우린 인간이 얼마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교활한 존재인 지 알 수 있다. 걸리버는 블레푸스크인 들과의 전투에서 엄청난 공적을 세워 인정을 받게 되지만 한순간의 행동으로 미움을 사게 된다. 그가 블레푸스크 인들을 노예로 삼기를 거부하자 릴리퍼트의 일부 대신들은 그를 제거할 계획까지 세우게 된다. 이후 왕국에 불이 나자 걸리버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소변으로 그 불을 끄게 된다. 허나 그들은 걸리버에게 고마워하지 않고 그에게 탄핵 문서를 보내게 된다. 걸리버가 릴리퍼트의 나라를 위해 힘을 써준 공로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당시 군주의 마음에 들었는가의 여부 이다. 걸리버는 후에 글럽덕드립에서 위인으로 기록된 과거의 인물들이 사실은 사기꾼이나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릴리퍼트의 역사에 기록될 걸리버의 모습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걸리버가 전쟁에서 공을 세워 그들의 영웅이 되었을 때는 위인으로 칭송 받았지만 군주에게 눈에 거슬리게 될 시 반역자로 전락할 뿐이다. 릴리퍼트의 역사뿐만 아니라 인간의 모든 역사가 다 이렇게 기록되어 왔을 것이다. 릴리퍼트의 변심은 인간의 만든 여론이 얼마나 비이성적이고 편협 적이며 일시적인 것인지 보여주고 있다.


이 소설 속에 나온 릴리퍼트인들은 작은 눈에 보이지 않는 차이를 통해 권력과 힘을 정하고 그를 통해 사회를 유지하는 이들이다. 걸리버 여행기는 이들의 교활함과 허위의식을 낱낱이 들어냄으로써 인간 사회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허울뿐인 정치와 법률에 대해 말하고 있다. 릴리퍼트를 향한 비판은 인간 사회에 대한 비판에 가깝다. 걸리버라는 거인의 관점을 통해 인간 사회가 얼마나 교활하고 치졸한 인간들로 가득 찼는지 쉽게 보여주고 있다.


2-2. 걸리버, 자만과 무지의 상징


 

『걸리버 여행기』의 비판의 대상에는 걸리버도 포함되고 있다. 릴리퍼트에서 걸리버는 거인의 관점으로 인간 사회의 교활함과 허위의식을 보았다. 브롭딩낵에서 걸리버는 소인으로 전락한다. 릴리퍼트에서 그는 모든 사물을 1:12비율로 축소해서 본 반면 브롭딩낵에서는 1:12의 비율로 확대해서 보게 된다. 걸리버는 두 가지 장소를 통해 다른 관점을 갖게 된다. 하나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인간 사회의 추악함이라면 다른 하나는 미시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자신의 오만과 편견이다. 걸리버는 브롭딩낵의 사람들을 처음으로 접했을 때 그들의 거대한 육체에 의해 편견을 갖게 된다. 이 편견은 걸리버의 달라진 관점으로부터 오게 된다. 걸리버와 브롭딩낵 그리고 릴리퍼트 모두 그 크기만 다를 뿐 이성을 지닌 인간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덩치가 크면 클수록 더욱 잔혹하고 야만적일 것이라는 생각은 인간이 여태껏 학습해온 편견에 불과하다. 릴리퍼트인들이 걸리버를 발견하고 그를 통제하려 했던 이유도 이것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걸리버는 릴리퍼트 보다 더욱 이성적인 존재로서 그들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걸리버는 자신이 릴리퍼트인들에게 친절한 존재였다는 것을 잊은 채 브롭딩낵 인들의 모습에 편견을 갖게 된다. 브롭딩낵에서 걸리버가 겪었던 일은 릴리퍼트의 교활한 모습을 걸리버 자신에게 적용시켜보는 하나의 기회가 된다.


걸리버는 자신과 브롭딩낵의 육체적인 차이만으로 자신이 브롭딩낵인들 보다 덜 폭력적일 것이라는 자만에 빠진다. 이 부분을 통해 이성의 잔재만을 지닌 인간이 자신과 다른 존재에게 얼마나 쉽게 편견을 가질 수 있다는 지를 보여주고 있다. 브롭딩낵을 향한 걸리버의 왜곡된 혐오의 시선은 당시 스위프트가 살아왔던 시대에도 적용할 수 있다. 스위프트는 『걸리버 여행기』 후반에 식민주의에 대한 반감을 표출한다. 15세기 초에서 17세기 중엽까지 이어져온 대항해 시대는 인간이 자신과 다른 인간 사회를 정복하고 그들의 문화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교화 시키는 식민주의라는 참상을 낳았다. 이에 대해 『걸리버 여행기』는 인간이 자신과 다른 인간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인간이 가진 오만과 편견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브롭딩낵의 육체를 바라보는 걸리버의 시선을 통해 혐오란 인간의 불완전한 이성에 의해 만들어진 허울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걸리버가 확대해서 바라본 것은 브롭딩낵의 육체이다. 이들의 육체는 크기만 다를 뿐 걸리버와 사실상 별반 차이가 없다. 그러나 걸리버가 바라본 이들의 육체는 징그럽고 혐오스럽다고 표현한다. 브롭딩낵을 향한 혐오스러운 묘사는 걸리버가 얼마나 편견으로 가득 찬 존재인지 잘 보여주고 있다. 릴리퍼트인의 관점에서 바라본 걸리버의 모습은 브롭딩낵의 거인들의 모습과 하나도 다를 게 없다. 만약 걸리버가 이 사실을 제대로 깨닫고 있었다면 그들을 향한 혐오스러운 시선을 이렇게 직접적으로 표출하진 않았을 것이다. 릴리퍼트인들이 바라본 자신의 모습이 자신이 바라본 브롭딩낵인들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의 모습이 혐오스럽다고 말한다. 이를 통해 그가 브롭딩낵을 향한 오만과 편견을 완전히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이성이란 영혼의 합리적인 요소로써 사물을 정확하게 이해하게 만들어준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걸리버 여행기는 인간의 이성은 불완전하기에 관점이나 상황에 따라 큰 영향을 받게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인간의 불완전한 이성에 의해 정해진 의견이나 판단은 주관적이며 신뢰할 게 되지 못한다.

『걸리버 여행기』는 노골적으로 인간의 더러움을 묘사한다. 그것이 걸리버의 모습을 통해서든, 브롭딩낵인들의 모습을 통해서든, 야후들의 모습을 통해서든, 인간에겐 모두 더러운 모습이 있음을 공통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한가지 재미있는 점은 서술자 걸리버는 인간의 더러움을 걸리버 자신의 모습을 통해서가 아닌 브롭딩낵이나 야후에서 훨씬 더 많이 찾고 있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스위프트가 이 소설의 서술자 걸리버 역시 비판의 대상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걸리버의 편협한 시선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이란 본능적으로 자신의 결점을 보기보단 타인의 결점을 먼저 본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걸리버를 릴리퍼트인들 만큼의 사악한 존재라고 해석하는 것은 과하다. 걸리버는 그들에 비해 조금 더 낳은 수준에 인간인 건 맞다. 하지만 그도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이 타인의 모습에 편견을 갖고 자신의 모습에 자만하게 되는 것이다. 릴리퍼트인들 보다 이성적인 걸리버마저도 누군가를 편견으로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은 인간은 어쩔 수 없이 갖는 자만과 무지를 갖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2-3. 전쟁을 통해 비춰지는 인간의 폭력성



『걸리버 여행기』에서 인간의 역사에 대한 반성이 깃든 두 장면이 나온다. 하나는 브롭딩낵 왕과 걸리버의 대화 장면이고 다른 하나는 그럽덥드립에서 과거의 영혼들을 만나는 장면이다. 이 두 장면에서 『걸리버 여행기』의 풍자와 조롱의 시선은 인류 전체를 향하게 된다. 자신보다 작은 생명의 고통에도 연민을 느끼는 브롭딩낵 왕과 화약이 인간에게 가져다 줄 고통을 신경 쓰지 않는 걸리버의 대비를 통해 인간이 전쟁으로 인해 폭력에 무감각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또 글럽덕드립에서 만난 전쟁 영웅들이 사실은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었다는 비화를 통해 전쟁은 역사에의해 미화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두 장면 모두 인간이 해왔던 폭력은 역사를 통해 미화되고 있으며 그것의 잔혹함은 절대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먼저 걸리버와 브롭딩낵 왕의 대화를 보겠다. 브롭딩낵인들은 학식과 철학이 필요 없는 이들이다. 사변 철학은 없지만 자유와 실용성만을 중시하는 이들의 모습은 자유와 실용성 그리고 사변 철학,이 세 가지를 모두 가진 인간들과 대비된다. 대표적인 예로 걸리버가 브롭딩낵 왕 앞에서 화약을 소개하는 장면을 들 수 있다. 브롭딩낵 왕은 화약을 쓴다면 폭정이 가능해질 수 있기에 차라리 나라의 반을 잃는 것이 더 낮다고 말한다. 걸리버는 왕이 융통성 없는 원칙을 지니고 있다고 풍자하지만 역으로 이것은 인간이 국가의 통치를 위해 폭력을 쉽게 정당화한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걸리버는 왕이 근시안 적인 안목을 갖고 있다고 말하지만 이 말은 오히려 걸리버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걸리버는 화약이 가져다주는 통치의 편리성이라는 단편적인 모습만 볼 뿐 후에 그것이 가져다 줄 위험성을 알지 못한다. 이를 통해 소설은 인간의 이성은 편협하며 자칫하면 쉽게 폭력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브롭딩낵 왕은 사변 철학이 없다는 점에서 플라톤이 생각한 철인통치와는 매우 다르다. 그럼에도 사변 철학을 지닌 걸리버와 같은 인간들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절대 사변 철학이 없는 국가의 통치자가 사변철학을 지닌 국가의 통치자들보다 더 우월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국가를 통치하는 데 있어 철학에 기반을 둔 통치는 매우 중요하지만 불완전한 철학을 지닌 인간들이 정치를 하게 된다면 그것은 철학이 없는 사회의 통치자만도 못하다는 것이다. 걸리버가 브롭딩낵 왕 앞에서 인간 사회를 설명해주는 장면은 불완전한 철학을 지닌 인간들이 사회를 철저하게 망가뜨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불완전한 철학과 의견을 지닌 인간은 그 불완전성에 의해 서로 분열하며 전쟁을 일으킨다. 반면 사변 철학이라는 것 자체가 없는 브롭딩낵 인들은 분당이란 있을 수 없으며 전쟁 또한 있을 수 없다. 이처럼 [걸리버 여행기]는 불완전한 철학과 이성을 지닌 인간이 철학을 지니지 않은 인간들보다 더 폭력적이고 잔혹 해질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이 주제는 야후와 인간의 대비를 통해 더욱 명확해지기 시작한다. 인간은 완전한 이성의 휘넘과 달리 이성의 잔재만을 지닌 존재이다. 반면 야후는 이성이 없이 타락해버린 존재들이다. 『걸리버 여행기』에서는 인간이 이성의 잔재만을 가졌다는 이유 하나로 야후보다 더 나은 존재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성을 지니지 않은 야후보다 더 사악하고 잔혹 해질 수 있음을 말해준다. 야후와 인간들 모두 탐욕에 의해 동족간의 싸움을 하는 것은 같다. 야후는 원시적인 무기를 만드는 반면 인간은 이보다 더한 대량 살상 무기를 만들고 그전 보다 더욱 강력한 무기를 개발하게 된다. 이 장면은 불완전한 이성을 지닌 인간이 이성 없이 타락한 인간보다 더 추악하진 않을지언정 더 폭력적이고 더 사악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걸리버 여행기』는 인간의 분쟁과 갈등, 이로 인해 벌어지는 전쟁 등은 모두, 인간의 불완전한 이성에 의한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다. 다음은 『걸리버 여행기』를 통해서 스위프트가 전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지 알아보도록 하겠다. 글럽덥드립의 일화를 통해 전쟁영웅들을 바라보는 스위프트의 시선이 좋지만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걸리버는 과거의 영웅들을 소환해 그들과 대화를 나누게 된다. 걸리버가 마주한 전쟁 영웅들은 모두 기록된 바와 달리 그렇게 위대한 사람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역사상 가장 큰 제국 중 하나를 세운 알렉산더 대왕은 사실 부하에 의해 죽은 것이 아닌 열병으로 죽은 것이었고 한니발의 전설적인 행진에는 식초로 바위를 녹였다는 비화가 숨겨져 있었다. 실제 역사와는 다른 전쟁 영웅들의 비화가 뜻하는 바는 전쟁의 영광은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그들이 아무리 전쟁의 영웅이고 위대한 업적을 이뤘다고 해도 이들이 전쟁이라는 폭력의 수단을 사용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위대한 전쟁 영웅들마저 결점을 가진 인간들로 묘사했다는 점에서 스위프트가 전쟁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쟁의 본질에는 폭력이 있고 그 폭력을 통해 이뤄진 전쟁은 신화로써 미화될 뿐이다. 스위프트가 바라본 이상적인 인간은 전쟁을 통해 제국을 이룬 정복자가 아니다. 공화정을 수립해 모든 국민들의 의견이 수렴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준 브루터스이다. 이를 통해 스위프트는 인간 사회의 통합은 전쟁이 아닌 화합과 소통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2-4. 그럼에도 인간을 바라 봐야하는 이유



이전 까지 글에선 『걸리버 여행기』에서 나온 인간의 이성의 불완전성을 분석해보았다. 하지만 이 글에서 필자는 『걸리버 여행기』에 나온 인간의 이성에 대한 비판은 필자 자신에게 적용시켜 보려고 한다. 『걸리버 여행기』에서 인간의 이성이 불완전함을 시사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를 통해 인간에 대한 믿음을 완전히 져버려야 하는가?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걸리버 여행기』는 인간의 믿음을 완전히 져버린 걸리버의 모습을 통해 이 오만을 철저하게 비판한다. 휘넘국에서 타락한 존재인 야후를 마주한 걸리버는 인간은 야후라는 편협한 사고에 빠져 인간 안에 있는 호의와 친절을 무시한다. 필자는 이 부분이 『걸리버 여행기』가 말하는 핵심이라고 판단했다. 걸리버 여행기는 인간의 이성의 불완전성을 말해주는 소설임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의 이성이 불완전하기에 더욱 인간을 바라보아야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휘넘의 나라에서 쫓겨난 걸리버의 모습에서 보다시피 인간은 완전한 이성의 존재인 휘넘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무노디와 멘데스 선장과도 같이 인간에게도 지혜롭고 선한 면은 존재한다. 이런 면을 거부한 채로 휘넘의 나라에만 집착하는 걸리버의 모습은 현실 도피와도 가깝다. 걸리버는 자신이 야후와 같아질 수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지만 야후의 모습을 한 인간을 누구보다 혐오하게 된다. 이는 걸리버의 자만이며, 무지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불완전한 이성을 극복하고 더 나은 존재로 성장하기 위해선 인간의 불완전성을 인정하고 인간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걸리버가 휘넘국에 오랫동안 머물지 못했던 이유도 이와 같을 것이다. 인간은 절대 완전한 이성을 가질 수 없지만 그와 가까워지기 위해 한 단계 씩 나아갈 수는 있다. 이러기 위해서는 인간의 불완전성을 깨우쳐야만 한다. 소설 속 걸리버와 같이 인간에 대한 믿음을 져버리고 그들과 화해하지 못하는 삶을 사는 것만큼 오만한 삶은 없을 것이다. 인간의 불완전성은 인간 내면의 선함과 지혜를 통해 극복해 나가야 한다.


필자 역시 이 부분에서 더욱 인간에 대한 희망을 갖게 되었다. 원점회귀식으로 진행되는 구조를 통해 소설은 인간의 불완전성에 대한 극복방안은 휘넘국이나 브롭딩낵 이 아닌 인간 세계에 있다는 걸 말해주고 있다. 인간은 불완전하기에 더욱 인간 사회를 자세히 바라 봐야하고 약간이라도 남아 있는 지혜를 통해 이를 극복하길 힘써야 한다. 필자에게 『걸리버 여행기』는 절대 인간에 대한 믿음을 버리라고 말하는 절망으로 가득한 소설이 아니었다. 인간 사회의 각성을 위해 더욱더 인간 사회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경고에 가까웠다. 『걸리버 여행기』에서도 보았다시피 문명의 발전됨에 따라 인간 사회의 도덕성은 매일 퇴보 하고 있다. 이 퇴보의 과정에서 인간에 대한 믿음을 져버리고 그곳에서 도피하는 것은 걸리버가 한 것과 같은 행위 이다. 필자는 이 퇴보의 과정 속에서도 인간은 지혜와 선의를 베풀 만큼의 아주 작은 도덕성은 남아있다고 생각한다. 『걸리버 여행기』의 무노디, 멘데스 선장 과도 같이 지혜롭고 선의를 베푸는 개개인의 사람들은 주변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영화 『다크나이트 라이즈』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어린아이의 어깨에 코트를 걸쳐주며 세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영웅이다.” 멘데스 선장의 사소한 친절에도 인간의 선함과 친절을 확인할 수 있듯이 타락해가는 세상에서도 작은 선행을 통해 인간은 더 나은 존재로 나아갈 수 있다. 『걸리버 여행기』는 인간 사회가 타락하는 과정에 있지만 그 속에서도 작은 선의와 친절을 베푸는 멘데스 선장을 통해 작은 친절에 의해서도 인간이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전하고 있다. 필자는 『걸리버 여행기』를 통해 인간의 이성이 불완전하고 인간 사회가 타락해가고 있음을 알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인간에 대한 믿음을 완전히 버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더욱 인간 사회를 바라볼 것이고 작은 선의와 친절로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해 매일 노력할 것이다.




3.결론


( 인간의 불완전한 이성과 인간 사회의 퇴보 과정, 그럼에도 인간을 바라보아야하는 이유)


『걸리버 여행기』는 릴리퍼트와 걸리버 그리고 분열과 전쟁으로 가득했던 인간의 역사를 통해 불완전한 이성을 지닌 인간이 사회를 구성할 때 나타나는 참상을 보여주었다. 또 인간의 이성은 불완전하기에 더욱 인간 사회의 참상을 반성해야 하며 인간 사회 안에서 해답을 찾길 촉구하고 있다. 『걸리버 여행기』가 말하는 인간의 불완전한 이성은 3개의 단어로 말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릴리퍼트인들을 통해 비춰지는 인간의 교활함과 허위의식이다. 두 번째는 걸리버의 편협한 관점을 통해 비춰지는 인간의 무지와 자만이다. 세 번째는 인류의 역사를 통해 비춰지는 전쟁의 폭력성이다.


릴리퍼트 인들의 이야기는 허위의식으로 가득 찬 인간사회에 대한 비유였다. 릴리퍼트인들 사이에서 절대 위엄의 상징이 되는 손톱만큼의 키 차이, 막대기 하나로 결정되는 국가의 권력, 아주 작은 구두 굽 차이에 의해 발생한 국가의 분열, 이 세 가지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그럴 듯하게 보이는 국가의 권력과 제도, 정파들이 사실은 허위의식으로 가득 찬 인간들이 만들어낸 허상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걸리버 여행기』는 이를 통해 이성의 잔재만을 지닌 인간들이 허위의식으로 가득한 사회를 만들어 가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브롭딩낵 인들을 바라본 걸리버의 관점은 인간이 가진 의견이 얼마나 편협하고 주관적인지를 말하고 있다. 걸리버는 자신과 같은 육체를 지닌 브롭딩낵을 흉측하고 역겹다고 표현한다. 릴리퍼트의 관점에서 자신이 그렇게 보였을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들을 묘사하는 데 있어 혐오의 시선을 은연중에 갖고 있다. 이는 걸리버와 같은 이성의 잔재만을 지닌 인간이 얼마나 쉽게 오만과 편견을 가질 수 있는 지 말해주는 대목이다. 또 인간의 더러움을 걸리버 자신의 모습보다 브롭딩낵인과 야후의 모습에서 더 많이 찾는 걸리버의 진술을 통해 자신의 결점보다 타인의 결점을 더 자세히 바라보는 인간의 교만을 확인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걸리버 여행기』는 불완전한 사변 철학을 지닌 인간들이 사변 철학을 지니지 않은 인간들보다 더 쉽게 전쟁과 폭력을 일삼을 수 있다는 것을 시사 함과 동시에 그로 인해 발생하게 되는 전쟁은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위한 허상일 뿐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또 전쟁 영웅들을 볼품없이 묘사하고 공화정을 수립한 부루터스를 훌륭하게 묘사함으로써 인간 사회의 통합은 전쟁이 아닌 화합과 소통을 통해 이뤄진다고 말하고 있다.


걸리버 여행기는 인간의 이성이 불완전하기에 결국 타락한 사회를 이룰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 해답은 인간 사회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 또한 말해주고 있다. 인간이 야후라는 생각에만 빠진 걸리버는 멘데스 선장 안에 있는 작은 호의와 친절을 인식하지 못한다. 이후 그는 인간에 대한 믿음을 완전히 져버리게 된다. 자신이 야후와 같은 존재라는 것을 알면서도 야후인 인간을 혐오한 걸리버의 생각은 그의 오만이다. 인간은 절대 후이늠과 같은 완벽한 이성의 존재가 될 수 없으나 그 내면에는 아주 작은 선의와 지혜가 남아있다. 인간의 이성이 불완전하고 그로 인해 사회가 점점 타락해간다. 이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인간 사회로의 도피가 아니라 더욱 인간 사회를 바라보고 그 속에서 인간의 불완전성을 깨달아야 한다. 또 그 사회 속에서 내면의 작은 호의와 친절로 더욱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해 힘써야만 한다.


본고를 통해 『걸리버 여행기』에 나타난 인간의 불완전한 이성과 이에 대한 극복방안에 대해 알아보았다. 인간의 본성은 선천적으로 선하다는 맹자의 성선설, 인간이 원죄를 갖고 있다는 기독교의 윤리 등, 인간의 본성에 대한 문제는 수세기 동안 이어져 왔다. 필자는 이것들 모두 인간의 본성에 대한 단면들을 다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본고에서 다뤄본 『걸리버 여행기』 또한 마찬가지이다. 필자는 본고를 통해 더욱 인간의 본성과 이성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고 이에 대해 더욱 탐구하고 싶어졌다. 필자는 이후에도 인간의 이성을 다룬 서적들을 읽어가며 인간의 본성과 이성에 대해 탐구해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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