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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 Jan 09. 2023

문화와 예술을 변화시킨 문화산업과 기술적 복제에 대하여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문화 산업: 대중 기만으로 서의 계몽>은 문화가 산업과 합쳐지면서 나타나는 여러 문제점들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발터 베냐민의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작품 1936,제 2판>은 기술적 복제가 예술작품에 끼칠 여러 변화들을 기술하고 있다. 위의 두 글의 공통점은 향후 예술과 문화에 나타날 변화를 말하고 있단 점이다. 본고에서는 위 두 글의 내용에 대한 요약과 이에 대한 필자의 문제의식과 생각들, 그리고 이것이 소재, 배경 등으로 사용된 문화 콘텐츠 등을 다뤄 볼 것이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문화 산업: 대중 기만으로 서의 계몽>은 문화산업에 대한 전반적인 비판을 담고 있다. 오늘날의 문화는 모든 것은 동질화 시키고 있다. 영화, 라디오 그리고 잡지는 전체적으로 획일화된 체계를 만들어 내고 있다. 대중문화는 독점 하에서 모두 획일적인 모습을 갖게 된다. 대중문화의 조종자들은 그들의 독점을 숨기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 독점이 강해질수록 그 힘의 행사도 노골화 시키려한다. 이런 상황에서 여러 작품들은 더 이상 예술인 척을 할 필요가 없다. 어떤 영화와 음악들은 그것을 감상하자마자 앞으로 그것이 어떻게 진행될지 예측 가능하다. 이처럼 여러 오락물들의 내용도 겉보기엔 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변화 없는 반복에 불과하다. 이런 예술작품은 대중들의 여가시간에도 영향을 미친다. 사람들의 여가시간은 문화산업이 제공하는 획일적 생산물로 채워질 수밖에 없다. 생산자들이 소비자들을 위한 분류를 끝내 놓았기에 실제로 소비자가 분류할 무언가는 더 이상 남아있지 않게 된다. 이런 문화상품의 속성 중 하나는 관객으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사유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 


영화 <트루먼 쇼>에서 시청자들은 가상의 세트 장 안에서 살아가는 트루먼의 삶을 관찰한다. 그들은 자신과 같은 트루먼의 평범한 삶에 몰입한다. 트루먼의 삶을 끝까지 관찰한 시청자는 아무 생각 없이 더 재미있는 프로그램이 없냐고 묻는다. 시청자들은 트루먼의 삶을 몰입해서 관찰했지만 트루먼의 삶은 그들에게 아무 생각 없이 볼 오락 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유흥만을 위해 녹화된 누군가의 삶을 소비하는 것이고, 그들의 시선을 끌만한 무언가가 없다면 아주 간단하게 채널을 돌리게 될 것이다. 영화의 이 장면은 오늘날의 문화 상품이 텔레비전 안의 무수히 많은 채널들처럼 생각 없이 즐길 거리로 넘쳐나기에 시청자들의 사유를 막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현재도 연예인 혹은 일반인들의 일상을 담은 영상물들을 별다른 의미 없는 오락거리로 소비하는 프로그램을 종종 볼 수 있다. 문화 상품들이 관객들로 하여금 사유할 여지를 빼앗는다는 주장은 그동안 여러 매체를 통해 전해졌다. 저자의 말처럼 오늘날의 대중들은 문화상품을 보며 사유하지 않을까? 이 질문을 던지기 전에 사유한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사유란 작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보단 끊임없이 물음을 던지며 다양한 해석을 만드는 과정이라 필자는 생각한다. 오늘날 대중들이 작품을 소비하는 방식은 단지 보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소비자들은 방송이나 영화를 보고 여러 가지 해석을 플랫폼에서 나눈다. 현대 사회에서 소비자는 문화산업이 제공하는 생산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시청자 항의를 통해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거나 지나치게 자극적인 콘텐츠들이 방영되는 것을 막는다. 하지만 이것을 대중 전체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 일반화시키긴 어렵다. 이런 사례와 동시에, 시청자들의 몰입만을 위해 그들의 생각이 개입할 부분을 편집하고 오락적인 부분만을 강조하는 텔레비전 방송들은 흔히 볼 수 있고 이것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현상 역시 존재한다. 따라서 문화 상품이 관객들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사유하게 만드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지 아닌지에 대해선 현재 확답할 수 없으며, 아직 까지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다시 저자의 말로 돌아와 문화 산업이 소비자의 욕구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살펴보겠다. 문화 산업은 소비자의 모든 욕구가 실현될 수 있는 것처럼 제시하지만 그 욕구들은 사실 문화산업에 의해 사전 결정된 것들이다. 문화 산업은 자신이 행하는 것이 소비자의 욕구 충족을 위한 것이라 설득하려들 뿐 만 아니라, 문화산업이 무엇을 제공하든 소비자들은 그것에 만족해야한다는 것을 소비자들에게 주입시킨다. 문화 산업의 위치가 확고해질수록 문화산업은 소비자의 욕구를 더욱더 능수능란하게 다룰 수 있게 된다. 문화 산업은 소비자의 욕구를 만들어내고 조종하고 교육시키며, 심지어는 재미를 몰 수 할 수도 있다. 문화 산업에 대한 저자의 주장이 현실화된 사례는 과거에도 있었다. 과거 한국에선 국민들이 정치에 무관심하도록 만들기 위해 3S 정책을 시행한 적이 있다. 스포츠(Sports), 스크린(Screen), 성(sex)는 현재 대중들의 주된 관심사이기도 하지만 어떻게 본다면 과거 문화산업에 의해 규정된 대중들의 관심사라 할 수 있다. 당시 대중들은 문화 산업에서 규정한 세 가지 콘텐츠(Sports, Screen, Sex)를 통해 그들의 욕구를 해소했다. 세 콘텐츠들은 당시 대중들을 우민화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문화산업이 규정한 당시 대중들의 욕구라고 볼 수 있다. 이 사례를 본다면 저자의 주장 역시 절대 과장된 것이 아니라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여러 영화와 드라마 그리고 방송 예능도 즐겨보는 필자의 입장에서 저자의 모든 주장에는 동의할 순 없었다. 하지만 저자의 우려가 현실화된 사례도 몇몇 있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이 책이 전하는 문제의식들은 그냥 넘길만한 것이 아니다. 과거에도 존재했고, 오늘날에도 존재하고, 앞으로도 존재할 문화산업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가. 이 논의는 이 책이 끝난 이후에도 계속 진행될 것이다.


밭터 베냐민의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작품 1936, 제 2판>은 기술을 통한 복제가 예술작품에 끼치는 영향과 효과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예술작품은 원래부터 복제가 가능했다. 사람들이 만든 예술작품은 모방을 통한 복제가 가능했다. 이에 비해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는 좀 새로운 현상이다. 목판 인쇄술에서 석판 인쇄술 그리고 사진에 이르기 까지 기술적 복제는 역사적으로 긴 간격을 두고 발전해왔다. 그중 사진의 복제는 예술 작품에 있어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눈은 손이 그리는 것보다 더 빨리 대상을 포착하기 때문에 영상의 복제 과정은 말하는 것과 보조를 맞출 만큼 빨라지게 된다. 저자는 완벽한 복제도 한 가지는 빠져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예술작품의 여기와 지금으로서, 예술작품이 있는 장소에서 그것이 갖는 일회적인 현존재이다. 원작이 지금 여기 존재한다는 사실은 원작의 다른 어떤 것과는 다르다는 정체성을 면면히 전해준다. 손으로 이루어진 모방의 경우 그것을 위조품이라 규정하는 것으로 진품의 권위를 유지할 수 있지만 기술적 복제가 가능해진 오늘날엔 그러는 것은 힘들다. 기술적 복제는 원작의 수공적 복제보다 더 큰 독자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의 경우 인간의 눈에 미치지 않는 원작의 모습을 강조해서 보여줄 수 있고 기계적 조작의 도움을 받아 고속 촬영 영상과 같은 일반적인 시각에 미치지 못하는 이미지를 포착해낼 수 있다. 이런 상황은 예술작품의 여기와 지금의 가치를 하락 시킨다. 어떤 사물의 진품 성이란, 그 사물의 물질적 지속성과 역사적인 증언 가치를 포함하여 사물에서 원천으로부터 전승될 수 있는 모든 것을 총괄하는 개념이다. 저자는 이러한 사물의 특징들을 아우라라고 설명한다. 기술의 복제로 인해 위축되고 있는 것은 예술작품의 아우라이다. 복제기술은 복제 대상을 전통적인 것으로부터 떼어내고 복제 대상이 다량으로 나타날 수 있게 하여 수용자로 하여금 그때그때 상황 속에서 쉽게 대상을 접할 수 있게 해준다.


아우라가 위축된 오늘날의 현대 예술은 무엇에서 가치를 찾을 수 있을까? 기술적 복제가 이전 예술이 갖고 있는 본연의 가치를 훼손시킨 것은 아니라 생각한다. 사진과 영화는 복제된 영상들을 통해 각기 다른 의미를 전할 뿐이다. 그것은 회화와는 구별된 독자성을 지님과 동시에 예술로서의 기능을 충분히 할 수 있다. 현대 예술은 다양한 주체들이 예술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의 장을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가치를 찾을 수 있다. 오늘날엔 영상과 카메라를 넘어 다양한 디지털 매체들이 예술 활동에 활용되고 있다. 이젠 전문기술이 없는 사람도 카메라를 통해 쉽게 자신의 메시지를 담아낼 수 있다. 또 전문 기술자가 아니더라도 프로그램을 이용해 사진을 합성하고 컴퓨터 그래픽을 입힐 수 있다. 예술의 접할 수 있는 매체가 확대됨에 따라 예술의 주체도 넓어진 것이다. 다양해진 예술의 주체들은 이전 예술에서 볼 수 없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낼 수도 있다. 예술작품을 창작하고 접하는 주체가 다양해짐으로 인해 예술이 표현할 수 있는 범주 역시 다양해질 것이다. 


기술의 복제가 예술작품에 끼친 영향은 예술 작품에 들어 있는 두 극의 대결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 이 두 극은 예술작품의 제의 가치와 전시가치이다. 예술은 주술에 사용되는 형상물에서 시작되었다. 이처럼 주술적인 목적으로 예술작품이 갖는 가치를 제의가치라 한다. 영화 <인디아나 존스>에선 고대의 유물들이 아무도 볼 수 없는 곳에 숨겨졌다는 묘사가 종종 나온다. 이처럼 제의가치 자체의 예술품들은 은밀한 곳에 숨겨두기를 요구한다. 어떤 신상들은 특정 종교인들에게만 허락되거나, 아예 감춰지기도 한다. 오늘날에는 여러 예술 활동들이 이런 의식들 에서 벗어남에 따라 예술작품들이 전시될 기회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전시 가치란 말 그대로 전시물로서 예술작품이 갖는 가치를 말한다. 특히 기술적 복제는 예술의 전시 가치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예술작품을 기술적으로 복제할 수 있는 여러 방법들이 생겨나면서 전시 가능성마저 엄청나게 커졌기 때문이다. 과거 주술 적 목적에 의해 활용되던 작품이 오늘날엔 전시회나 박물관에서 전시의 목적으로 활용되는 사례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는 예술 작품을 대하는 대중들의 태도를 변화시켰다. 회화는 한 사람 내지 극소수 사람에 의해 감상 되어야 한다는 요구를 지녀왔다. 오늘 날의 영화와 달리, 과거의 회화는 동시적인 집단적 수용을 위해 전시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못했다. 18세기 영주의 궁정에서 회화의 수용은 동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위계적 매개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이와 반대로 오늘날의 영화는 동시적으로 집단적 수용이 이뤄지고 있다. 과거 회화에 대해 가졌던 낙후된 태도가 영화에 대해 갖는 진보적 태도로 바뀐 것이다. 이에 따라 영화는 여러 사회적 기능을 갖게 된다. 영화의 사회적 기능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기능은 사람과 기계 장치 사이의 균형을 만들어내는 데 있다. 영화는 클로즈업된 촬영을 통해 대중이 볼 수 있는 공간을 확대시켰고 고속 촬영을 통해 대중이 인식하는 움직임 또한 연장시켰다. 우리는 영화를 통해 불분명하게 보이는 것을 분명하게 보게 되었고 이전까지 알지 못한 움직임들을 정확히 볼 수 있게 되었다. 카메라를 통해 보여주는 현실의 모습들은 사람들이 인식할 수 있는 지각의 스펙트럼에서 벗어나 있다. 영화에서 보이는 일그러짐, 재난 등의 여러 장면들이 실제론 환각이나 꿈에서 나타나는 지각 세계에 해당한다. 즉 카메라가 사용하는 방식들은 관중들의 집단적 지각이 꿈꾸는 자의 개인적 지각을 경험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영화가 정신적인 예방접종의 기능을 한다고 주장한다. 영화는 사디즘 적 또는 마조히즘 적 망상들이 과도하게 발전한 모습들을 보여줌으로써 현실에서 그러한 에너지들이 위험한 방식으로 성숙하는 것을 막아줄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저자가 말한 주장은 영화가 대중에게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일 것이다. 과연 영화는 대중들의 정신적 예방접종이라는 긍정적인 영향만을 끼치는 것인가? 그렇다면 영화가 사디즘적 마조히즘적 망상들이 과도하게 발전한 모습들을 보여줌으로써 생기는 역효과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오늘날 자극적인 장면을 전시하기 만하는 영화들은 창작자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사영금지처분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오늘날의 영화들은 자극이나 폭력을 다루고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비판이 대상이 되진 않는다. 오직 자극만을 위해 만들어진 영화와 드라마는 비판의 대상이 된다. 즉 과한 망상과 자극 에만 의존해 작품성마저 잃어버린 영화들이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영화가 대중에게 정신적 예방접종이라는 긍정적 효과를 줄 수 있다는 주장은 때론 과한 자극에만 의존해 작품성마저 잃어버린 영화들에게 면죄부를 줄 수 있다. 이런 상황 아래 관중들이 접하는 영화들은 오로지 자극만을 추구하는 것으로 변질될 수 있다.


실제로 한국 영화에서도 이런 예시를 찾아 볼 수 있다. 2000년대 초, 한국에선 <올드보이>, <타짜>, <살인의 추억> 등 명작들의 탄생으로 인해 범죄, 느와르, 스릴러 영화들이 점차 한국 영화계의 주류를 이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난 10~20년 사이에 이런 장르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은 급격하게 떨어지게 되었다. 영화 <타짜>의 뒤를 이어 나온 후 속편들은 모두 흥행과 평가에서 저조한 성적을 얻었다. 더 이상 대중들이 이런 장르에 호감을 갖게 되지 않은 이유로는 시대에 따른 트렌드의 변화를 들 수 있겠지만, 이런 장르가 시나리오와 연출과 같은 작품 내적인 부분보단, 얼마나 자극적으로 화제성을 불러일으키는가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2017년 영화배우 마동석이 출연한 <범죄 도시>가 흥행에 성공하자, 그 다음해엔 해당 배우를 출연시켜 폭력만을 전시하는 수많은 아류작들이 나오게 된다. 해당 아류작들의 목적은 해당 영화배우를 활용하여 어떻게 더 자극적으로 폭력을 연출할 수 있는 지에 있었다. 이에 따라 한국의 느와르, 범죄, 스릴러 영화들은 영화 내적인 작품성보다, 자극성을 추구하는 것으로 변질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사례를 통해 영화가 사디즘적 마조히즘적 망상들이 과도하게 발전된 모습들을 보여줌으로써 그러한 에너지들이 위험한 방식으로 성숙하는 것을 막아줄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 때론 과도한 자극과 망상만을 위한 작품들만이 영화로 나오는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 생각한다. 


벤야민의 글을 통해 예술이란 하나의 형식과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접하는 사진과 영화들이 과거 사람들의 입장은 어땠는지 살펴볼 수 있는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앞으로의 예술이 어떻게 변할 것이라고 예상할 순 없다. 예술이 기술적 복제에 따라 변화되고 재생산된다면 예술의 본질은 무엇일까? 이 흥미로운 질문은 앞으로의 우리가 계속해서 논의해야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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