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영이 Sep 10. 2023

만일, 을 다시 쓴다


요즘 날씨를 보면 ‘인디언 서머’라는 단어가 생각난다. 원래는 북아메리카에서 사용되는 기상용어로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기 직전의 일주일 정도의 고온현상을 의미하는 말이지만,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기 직전의 한국의 더운 날씨에 대입해도 어울릴 듯싶다.


처서가 지난 후 잠시 선선해졌던 날씨는 늦여름 태양의 아쉬움을 머금고 뜨겁게 달궈지고 있다. 한낮의 기온은 다시 30도를 넘나 든다. 한 블록 걷는 것조차 버거워 집 근처 카페로 들어와 아이스커피를 마신다. 오늘의 원두는 브라질 세하도. 쓴맛이 강하지 않은 고소한 커피다. 얼마 전 동네 주택가를 누비다 발견한 핸드드립 커피전문점은 골목 안쪽 모퉁이에 위치해 있어 아늑한 아지트 느낌. 산책의 끄트머리, 이곳에서 카페라테 한잔을 주문해 마시고는 반해버렸다. 그 이후로 일주일에 두세 번 이 카페에 온다. 너무 화려하지도 정형화되지도 않은 인테리어도 마음에 든다.  노출콘크리트 벽에 투박하게 발린 하얀색 시멘트.  빈티지한 느낌이 물씬 나는 각기 다른 모양의 나무 테이블은 적당한 여백을 두고 놓여있다. 유리로 된 통창엔 하얀색 반투명 커튼이 설치되어 매장 내부를 적당히 감추고 드러낸다. 창밖의 낡은 시멘트 담벼락 아래로 마구 자라난 넝쿨식물들, 다가왔다 멀어지는 동네주민들의 모습은 카페 인테리어의 일부인 양 바깥 풍경을 안으로 끌어들인다.


카페 안, 옆 테이블에 마주 앉은 젊은 연인은 서로의 이마가 닿을 정도로 상체를 테이블 앞으로 숙이고 토요일 오후의 데이트 계획을 짜고 있다. 창가에 앉은 두 명의 중년여성이 나누는 이야기들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팝음악에 섞여든다. 한낮의 햇살과 카페인, 사람들의 대화 소리와 함께 느릿하게 흘러가는 휴일 하루. 삶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다시 코앞까지 밀려들어온다.



만일, 만일이라는 단어를 생각한다. 어떤 단어들은 쓰이고도 떠나가지 않는다. 오히려 쓰이고 나서 정체를 선명히 밝히고 길고 느릿한 잔향이 되어 글쓴이의 머릿속을 맴돈다. 만일이라는 단어도 그랬다. 만일이라는 단어 뒤에 따라붙는 건 미래형 가정이 아닌 과거형. 영문법으로 치면 가정법 과거완료쯤 될 것이다. '만일 … 한다면'이 아닌 '만일… 했다면'으로 이어지는 문장이다.


영화 <마미>의 한 장면을 떠올린다. 영화 속 중년의 엄마는 과잉행동장애를 가진 아들을 조수석에 태우고 어디론가 달려가고 있다. 운전 중인 그녀의 머릿속에서 여러 광경들이 펼쳐진다. 아들의 결혼식에서 함께 춤추는 모자의 모습. 아들의 아기를 품에 안은 자신의 모습. 마미의 상상 속에서 그들은 평범한 삶을 살며 행복을 누리지만 현실은 일상적인 삶이 불가한 아들을 태우고 보호시설을 향해 달려가는 차 안. 그녀의 만일은 현실이 될 수 없어 서글프다.


출처: 영화 <마미 Mommy>


이어지는 또 다른 영화의 한 신 Scene. <라라랜드>의 후반부다. 배우의 꿈을 이룬 여주인공 미아는 어느 날 밤 남편과 데이트를 나선다. 거리를 걷다 우연히 들어간 재즈 클럽의 이름은 SEB’s. 미아의 옛 남자친구 세바스찬이 자신의 재즈클럽운영을 꿈꾸며 미리 만들어두었던 가게 이름이다. 그녀의 예감대로 그곳은 세바스찬이 운영하는 클럽. 그가 무대 위로 오르고 관객석에 앉은 미아를 알아본다. 잠시 주춤거리다가 피아노 앞에 앉아 자신의 곡을 연주하는 세바스찬. 그 음악 속에서 두 사람은 함께 있다. 세바스찬은 생계를 이유로 원치 않는 밴드에 들어가 투어를 하느라 미아와 떨어져 있지 않고 영화촬영차 파리로 향하는 미아를 혼자 떠나보내지도 않는다. 만일 그랬더라면이라는 상상 속에서 두 사람은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는다. 그러나 연주는 곧 끝나고 세바스찬은 무대 위에, 미아는 현재의 남편과 관객석에 앉아있다. 가정법 과거도 끝이 난다. 심장이 따끔거릴 정도로 아린 만일, 이다.


출처: 영화 <라라랜드>


만일, 이라는 단어를 머릿속에 집어넣고 세탁한다. 아직 쓰이지 않은 문장들을 세제로 쓴다. 이번엔 과거를 돌이켜 가정하지 않고 오지 않을 미래를 그린다. 상상 속에서 다정한 연인이 함께 데이트를 하고, 어딘가에서 한 번쯤 스쳐 지나갔을 법한 모자母子가 하품이 나올 정도로 평온한 한낮의 오후를 보낸다. 행복이라는 단어를 굳이 상기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무탈한 날들의 연속이지만 그들은 알고 있다. 언젠가 잔잔한 물결이 거센 바람을 타고 흔들릴 수 있다는 것. 만일이라는 단어를 불러온다. 문장을 만든다. 만일, 당신이 언젠가 곤란한 상황에 처하거나 질병에 걸리더라도 나는 당신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살아온 삶과 따뜻한 성정과 쉽사리 사그라들지 않는 생명력을 믿을 것이다. 당신 역시 나를 포기하지 말기를. 예상하지 못한 삶의 파도가 밀려들더라도. 꿈도 현실감각도 서로의 부재보다 큰 의미를 갖지는 못한다는 것을 잊지 않기로 한다. 누군가 끼어든다. 그가 너를 포기하도록 만드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고. 이기심을 버리라고 한다. 너는 아니라고 한다. 서로를 포기하고 견뎌야 할 괴로움의 남은 시간을 잘 알고 있기에. 그래서 말한다. 당신의 손을 놓지 않겠다고, 내 손을 꽉 잡으라고.  서로의 아픔을 불안을 과오를 오지 않은 고통을 우리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기로 한다. 너의 곁에 내가 나의 곁에 네가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로 한다. 누군가를 외롭게 내버려 두지 않기로. 그것이 네가 다시 써 내려간 만일, 로 시작하는 문장이다. 만일, 만일 그렇더라도 우리는.


서글픈 만일 속으로 한낮의 햇살 같은 따뜻한 오렌지색이 스며든다. 시간이 흐르고 카페 테이블에 앉아있던 손님들이 하나둘 일어선다. 말소리는 잦아들고 해가 기운다. 빈 의자들은 또 다른 손님들을 기다린다.




작가의 이전글 꽃들도 닮은 구석이 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