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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이 Sep 13. 2023

그녀의 청첩장 03

희는 세 번째 연애를 마치고 잠시 연애 휴식기를 가졌다. 주야장천 이별 발라드만 들으며 세상 다 잃은 듯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는 그녀가 안쓰러웠지만 내버려 뒀다. 사랑은 사랑으로 잊힌다지만 응급처방을 잘못 썼다가 덧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래, 바닥을 찍어야 또 올라올 힘이 생기겠지 싶었다. 희는 빅마마의 체념을 백만 번쯤 들은 후에야 청승떨기를 그만두었다.    

       


그녀의 네 번째 연애


대학 졸업 후 한 외국계 회사의 홍보팀에 입사한 희는 영업팀에서 근무하던 회사 동료 이대리와 만나기 시작했다. 희가 처음부터 이대리를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영업부와 홍보팀은 협업할 일이 많았기에 업무상 마주치는 회사 동료에 불과했을 뿐. 그러다 두 사람은 회사 프로젝트 사업에 함께 참여하게 되었고, 이대리는 회사 인트라넷이나 메신저로도 충분히 소통할 수 있는 일인데도 자동문이 닳도록 홍보팀에 들락거렸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희만 빼고 홍보팀 직원들이 모두 이대리 마음을 눈치챌 정도였다고. 

     

어느덧 프로젝트가 끝나고 이대리가 더 이상 홍보팀 문지방을 안 밟으니 희의 마음이 조금 섭섭하더란다. 이대리의 실없는 아재개그가 그립더란다. 구내식당이고 회사 로비고 이대리를 찾고 있는 자신을 깨달았더란다. 그렇다고 당장 고백할 정도는 아니었고 사내연애도 망설여져 어영부영 흐지부지되던 와중에 이대리가 외근하고 퇴근하던 길에 교통사고를 당해 팔다리 골절상을 입었다는 소식이 희의 귀에까지 전해졌다.  

    

동료들과 병문안을 가서 팔다리에 깁스를 하고 침대에 누워있던 이대리의 수척한 얼굴을 보자마자 희의 마음속에서 잠자고 있던 애틋함과 연민이 폭발해 버렸고, 희는 이대리가 퇴원할 때까지 이대리가 홍보팀을 드나들었듯 병원을 들락거렸다. 이대리의 깁스 위엔 하트 뿅뿅 낙서가 그려졌고 그가 퇴원하자마자 두 사람은 연애를 시작했다. 


(C) Unplash


Love is both the path to happiness and the path that happiness travels
- William Shakespeare



희와 이대리는 한쌍의 바퀴벌레처럼, 아니 한쌍의 짚신처럼 한쌍의 원앙처럼 붙어 다녔고 알콩달콩 3년을 연애하더니 결혼을 한다고 했다. 상견례를 치르고 날을 잡고 희는 본격적으로 결혼준비를 시작했다. 결혼을 하려고 결혼식을 하는 건지 결혼식을 하려고 결혼을 하는 건지 몸도 마음도 지쳐가던 와중, 희는 귀갓길에 전화를 한통 받았다. 평소 같으면 모르는 번호라 받지 않았을 텐데 여자의 직감은 무서운 건지 전화벨이 울리는데 이상하게 싸한 기분이 들더란다. 받아야만 할 것 같더란다. 

     

수화기 너머의 여자는 자신이 이대리 여자친구라면서 지난 일요일이 두 사람 만난 지 일주년 기념일이었다고 했고, 요즘 이대리가 연락이 잘 안돼 그의 핸드폰 잠금을 몰래 열어 확인 후 희에게 전화를 한 것이라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집 앞 골목길에서 희는 풀썩 주저앉아버렸다. 눈물로 밤을 지새 눈이 퉁퉁 부어버린 희를 붙잡고 이대리는 그녀와는 볼링 동호회에서 만난 사이일 뿐이라며 어르고 달래다 절규하기에 이르렀으나 희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희는 수화기 너머 그녀를 통해 이대리의 핸드폰에 자신이 내 사랑이 아닌 희주임으로 저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고 그녀와 이대리가 다정하게 찍은 일주년 기념사진도 그녀에게 전송받아 모두 확인한 후였다. 어쩐지 1년 전부터 볼링을 무지 열심히 하더라니. 딴에는 스트레스 풀라고 권장한 동호회 활동이었는데. 이렇게 배려를 배반으로 갚냐~~희는 피눈물을 흘렸다. 결혼은 무산되었고 희는 이직을 했다. 




그리고 마지막 연애


출판사의 마케팅팀으로 회사를 옮긴 희는 일을 열심히 했다. 정말 열심히 했다. 걱정이 돼서 매일같이 전화를 했는데 매일같이 회사에서 야근 중이라고 했다. 그런 희에게서 비장함마저 느껴졌다. 희는 신인작가의 그림책 출간 기념 사은품 증정 이벤트를 기획하다가 거래처의 디자이너였던 을 알게 됐다. 희와 석은 정말 달랐다. 물과 불 같았고 물과 기름 같았다. 사사건건 부딪쳤다. 희가 의견을 말하면 석이 트렌드에 안 맞는다는 식. 석이 아이디어를 내놓으면 희가 독자의 니즈와 안 맞는다는 식이었다. 그러면 석이 자낳괴(자본주의가 낳은 괴물)라며 혼잣말로 비아냥거렸고 그러면 희가 예술병 걸렸다며 비꼬는 식이었다. 둘은 피 터지게 까지는 아니었지만 목이 쉴 때까지는 싸웠다. 주변에서 오히려 의아해할 정도였다. (왜 그래? 그게 그렇게까지 싸울 일이야?)      


그러다 회식자리에 둘만 남아 경쟁하듯 술잔을 기울이다 희는 석이 여자친구와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고 석도 희가 파혼한 지 얼마 안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희는 석이 좀 가여워졌고 석도 예전보다는 희를 대하는 태도가 나긋나긋해졌다. 남녀사이는 정말 알다가도 모르는 것인지 두 사람은 퇴근 후 따로 만나는 일이 잦아지더니, 만난 지 일 년 만에 결혼 소식을 전해왔다.

     

나는 희가 전 남친과 헤어지고 홧김에 결혼을 하는 건 아닌지 좀 걱정이 되었는데 생각보다 석에 대한 희의 마음은 깊고 굳건했다. 싸울 때까지 싸워봤기에 그가 그보다 나빠지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고 여자친구에 대한 그의 세심한 관심은 희의 오랜 결핍을 다정하게 어루만져 주었다. 희에게서 석을 소개받던 날, 서로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다는 희의 말과는 다르게 나는 두 사람이 상당히 닮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임자 만났네, 싶었다. 나는 석이 마음에 들었고 나도 모르게 그를 제부라고 부를 뻔했다. 



<못다 한 이야기가 있어 4회까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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