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도시의 사랑법]을 보고
* 영화 설정에 대한 약간의 스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치 않는 분들은 글을 읽음에 있어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혐오란 사회적/생리적/병리학적/심리학적/ 등 다양한 측면에서 다루어진다. 태생적 본능으로부터 기원할 수도 있고, 사회적 합의와 학습을 통해 특정 개념이나 대상을 혐오할 수도 있다. 다른 측면에서 말하자면, 태생적 혐오거나 현재 혐오를 유발하더라도 개인의 인지 변화나 사회적 분위기 조성 및 문화에 따라 혐오는 제거될 수 있다. 혐오란 항구적인 개념이 아니며, 생후 자취와 노력으로 변화되는 개념이다.
소수자는 자연상태의 사회에 놓일 경우, 혐오유발 소수자로 변모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인간은 배타성을 지니고 태어난다. 주류와 다른 이들에게 배타적인 태도를 견지함으로써 자신이 주류라는 인식과 속한 집단에 대한 동질감을 강화한다. 또한, 선제적으로 위협이 될 수 있는 이들을 배제하여 안전을 확보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과거에는 이런 배타적 성질이 생존에 유리하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진화심리학적 측면에서 배타성을 설명하는 것은 영화의 의도와는 어긋나는 일일 것이다. 오히려 현대에서 배타성이 얼마나 많은 사회 문제를, 상처를, 두려움을 야기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 배타성의 현대화를 이루어내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까.
위의 논의에 따라 진정한 혐오유발 소수자 -범죄자, 변태 이상 성욕자- 와 단순 소수자는 결과론적으로 구분하기 어렵다고 보인다. 퀴어와 범죄자 모두 누군가에게는 혐오를 유발할 수 있으나 그 정도나 원인, 실질적 위협의 여부 또한 다르다. 사회가 다양화되고 다름에 대한 논의가 점점 방대해지는 요즘에는 다름에 대한 혐오를 멈추기 위해 사회적 노력뿐 아니라 개인 자신도, 그 주변에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인식과 쓸데없는 혐오를 멈추어 배타성의 현대화를 이루어낼 필요가 있다.
간단하다. 그것이 다름에서 기인한 배타적 감정인지, 실제적 위협에 대비하기 위한 반응인지를 구분하면 된다. 이는 일면 단순하게 보이지만 그 심플함과는 별개로 적용하기는 쉽지 않다. 의식적으로 이러한 구분을 위한 노력 없이는 혐오라는 감정을 마주한 그 순간 대상에 대한 부정이 시작될 뿐이다. 자신의 감정이나 원인을 돌아보려는 시도는 제대로 이루어지기 어렵다. 그리고 이것이 이러한 글을 쓰게 된 이유이다.
혐오와 직면했을 때 그러한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오히려 살아가며 모든 순간에 자기검열을 거치는 것이 더욱 정신적으로 불안정하다는 신호일 수 있다. 또한 운이 좋아 관련된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해서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은 모두를 비난하고 비판하는 것은 같은 이유로 혐오의 반복이다.
나도 동성애에 대해 생각을 해보았고 영화도 보았지만, 여전히 부정적인 감정이 드는 것은 당장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군대에서의 경험 때문이기도 하겠고, 주변에 소수자 친구가 있는데도 좀처럼 긍정적이거나 중립적 관점으로 개선되지 않는 것을 보아 혹여 이 글을 읽는 누군가에도 이런 생각을 하며 괴로워하지는 않을까 사견을 적어보려 한다.
개인의 생각은 그 누구도 억압할 수 없다. 다만 그 생각으로 누군가에게 불편을 주거나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된다. 내가 성적 다양성에 대해 닫혀있다고 하자. 그렇다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호도하고 비난할 자격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와는 다른 생각과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의 삶을 이해할 수 없고 알 수 없기에 더욱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다르게 정의하자면... 나와 다른 사람에게도 다정해야 한다. 다정함은 때로 선택적 특성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그 진가는 울타리 밖의 사람들에게 행해질 때 발휘된다. 왜냐하면, 소수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으니까. 우리에게 개성과 이성이 존재하는 한, 우리는 모두 유일한 소수자로서 살아갈 테니까.
인간의 유일성이 여실히 드러나는 단어, 개성과 나다움. 나라는 사람이 어떤 특징과 역사를 가진 인간인지를 뜻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처지에서 생각해본 없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자신의 개성을, 자신만의 나다움이 뭔지 모르는 사람은 있다.
우리는 각자의 데이터베이스, 기억이 있다. 빠르게는 생후 2년 즈음부터 시작하여 현재까지 자신의 역사를 담아낸 이 기억은 다양한 지식과 지혜뿐 아니라 인생을 대변하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만약 지금 자신의 몸에 다른 사람의 기억이 들어온다면, 그것은 나인가? 아니면 기억의 주인인 그인가. 인류는 그라고 답변해왔다. 실제로 많은 소설과 연구에서도 뇌를 다른 신체에 옮기려는 시도가 이어져 왔다.
자신의 기억을 잘 곱씹어보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빅데이터의 시대라고 했던가? 이제는 그 말도 꽤 옛날 캐치프레이즈같다. 여하튼. 무언가에 대한 정보를 얻거나 동향, 특징을 파악할 때 빅데이터 분석은 여전히 중요하다. 시대예보나 트렌드2024등도 그런 식의 분석으로 발간되었던 도서이며 상당한 통찰을 보여 주곤 했다. 그런데 하물며 더욱 방대한 데이터를 가진 특정한 대상, 개인이라면 어떨까. 그리고 그 빅데이터를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자기 자신뿐이라면? 스스로에 대한 데이터를 해석하는 사람과 노력으로 사람 사이에는 스스로에 대한 이해도에 매우 큰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대도시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간다. 동성애자, 이성애자, 부자, 가난한 자, 범죄자와 이주자, 노동자, 등등. 예로부터 다양성을 끌어안고 화합할 방법은 서로에 대한 편견을 없애고 같은 인간으로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했다.
싱가폴은 독재국가임에도 동아시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 중 하나로 꼽히는데, 여러 이유 중 하나가 이러한 이상을 현실적 정책으로 풀어내 다양한 인종 간의 화합을 이루어냈기 때문이다. 최근 유럽과 미국에서 이민자의 사회 융합 노력으로 다양한 사회적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것과는 상당히 대조된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성과 화합 문제는 노력으로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그보다 더욱 사회에 깊게 침투해있는 부, 성, 정치 등에 있어서 이러한 자세가 더욱 필요하다.
영화에서는 주로 퀴어와 사회적 인식을 다루었지만, 이는 앞서 말했던 것처럼 비슷한 처지의 다양한 개념과 문제로 확장될 수 있다. 대도시에서 사랑하는 재희와 흥수는 이상적인 관계가 아니다. 서로에게 감정을 마구잡이로 쏟아내는가 하면 성숙하지 못한 대응으로 관계에 적신호가 들어오는 때도 있었다. 그러나 서로에게 문제가 생기면 진심으로 걱정하고 화를 내었고, 필요한 순간에는 언제나 힘이 되어주려 노력했다. 우리 사회에도 이러한 다정함이, 서로에 관한 관심과 애정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렇게만 말하면 너무나 이상적인 이야기가 된 것 같아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낭만에 젖은 상태에서 이보다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기는 어려워 노력을 멈추려 한다. 가끔은 이상적인 이야기를 하고 낭만에 머물러 글을 끄적여도 나쁘지 않지 않을까? 두서도 없고 고칠 부분은 많지만... 지금 있는 카페의 분위기가 좋기도 하고, 오전에 영화를 보는 것이 너무 재밌기도 하니 오늘만의 티로 남겨두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