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아색과 연두색 시멘트가 점점이 벗겨져가는 벽들이 빼곡히 늘어서 하늘로 향한다. 나란한 벽들은 좁은 골목을 이루고, 그 비탈길을 따라 여섯 교시 교과서로 가득 채운 가방을 어깨에 울러메어 올라간다. 여름은 아직 멀었는데도 귀갓길의 오후볕은 늘 뜨거워서 계단 한 칸을 오르는 만큼 정수리를 덥힌다. 머리숱 사이로 송골송골 올라오던 땀방울은 결국 서로 만나고 뺨을 따라 주르륵 흘러내릴 즈음되면 달동네 중턱 코너를 돌며 스레트 지붕의 우리 집이기다리고 있다. 나무대문을 지나 샷시 현관을 열자마자 뚱뚱한 가방의 중력에 의지해 마루에 털썩 드러눕는다. 가스나가 치마를 입고 발라당 누워있노, 외할머니의 핀잔이 들려오지만 더운 숨을 다독여 크게 내쉬는 데에 집중한다. 슬슬 넋이 돌아온다. 그리고 이내 몸의 신호를 알아차린다.언덕을 올라오며 진을 다 써버린 탓에 허기로 부푼 12살짜리 여자아이의 배에선 뱃고동이 울려온다. 낡은 금성 냉장고의 문을 열어 구석구석 살펴보지만 초등학생의 손에서 탄생 가능할 만한 식재료는 보이지 않는다.
일주일 용돈이 고작 1500원, 빵이나 사 먹자고 쓸 수는 없지. 엄마는 당신의 부재를 용돈으로 채워주지 않는 절박 생계형 워킹맘이었으니까. 뾰족한 방법이 없는 초등 어린이는 큰 기대감 없이 칠순이 넘은 외할머니를 소심히 불러본다.
"할머니이, 저... 배고파요."
"집에 뭣이 없나? 보자, 느그 집에 물(먹을) 만한 게 없다. 기다리 봐봐라. 찾아 줄꾸마."
구부정한 허리로 부엌 이곳저곳을 살피던 외할머니는 국수 한 줌이 남은 봉지를 발견하셨고 냄비에 물을 끓여 면을 부채꼴로 촤르르 담그신다. 푹푹 삶아진 면들을 찬물에 담가 찰랑찰랑해지면 채반에 받아 놓고 다음 레시피를 준비하신다. 그런데 어딘가 이상하다. 육수는 어디 있지? 요리 경력 없는 초등학생이지만 육수는 멸치로 낸다는 것쯤은 안다. 그러나 외할머니가 준비하신 건 초록색 플라스틱 바가지에 그저 생수를 콸콸 붓는 일이다. 그리고는 계량도 필요 없이 진간장을 쫄쫄 흘려 넣고 다진 마늘을 푹 떠서 휘휘 풀어 넣으신다. 설탕병뚜껑을 따서 한 두 스푼 물에 타서 녹여내시고는 새끼손가락을 푹 찍어 짭짭짭 간을 보며 조리는 끝난다. 물기를 털어낸 소면이 담긴 그릇에 연갈빛 국물을 붓고 참깨만 툭툭 뿌려 손녀에게 건네주신다.
"자, 무 봐라."
외할머니표 국수는 허겁지겁 뱃속으로 사라진다. 뜨거운 볕에 소금 바람맞아가며 몸을 내어준 멸치와 다시마의 희생이 없이도 국수는 맛있기만 하다. 짭조름하면서도 달큰하고 끝맛은 알싸한 맛. 고명 하나 없는 육수의 밍밍함을 눈치 못 챈 건 아니었지만 별미가 되기엔 충분했다. 생전 처음 먹어보는 국수라는 특별함을 담고 있어서. 사실은, 외할머니가 만들어주신 음식은 처음이라서.
보통 사람들의 기억 속엔 외할머니의 애정이 가득했다는데 내겐 그런 추억이 없다. 14명이나 되는 손주들 중 외손녀 하나가 무에 그리 애틋했겠는가. 나보다 다섯 살 어린 장손은 그 굽은 허리 위에 수차례 업혀서 다녔어도 남은 애정 한 자락 나에게 돌아오는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외할머니는 그저 우리 장손, 우리 장손. 국수를 말아주시던 그날도 워킹맘 생활 시작에 익숙지 않은 딸의 행주를 바통 터치받을 중간 주자로 오셨을 뿐. 그래서 나는외할머니와의 동거가 어딘가 어색했다.
"엄마 있잖아, 외할머니가 나 얼마 전에 국수 만들어주셨다? 그게 육수도 안 끓이고 간장이랑 설탕이랑 마늘 다진 것만 들어가는데도 엄청 맛이 있대? 옛날엔 이런 거 종종 먹었다며?"
"먹을 게 없어서 그런 거나 먹었던 거지, 그게 뭐가 맛있겠노? 계란지단 하나도 없는기."
예상했던 반응이 아니다. 오, 맛있었어? 맞아, 엄마도옛날에 그렇게 먹었었지. 이런 대답을 기다리던 아이의 눈에 엄마는 조금 뾰족했고 퉁명스러웠다. 친정어머니가 외손녀에게 간식을 챙겨주었다는데도 놀라거나 고마운 기색이 없었다. 퇴근해서 다시 집으로 출근한 엄마에게는 시절을 회상할 여유가 없었나 보다. 외할머니의 국수는 다시 언급해보지 못하고 그렇게 잊혔다.
어느덧 외할머니의 딸도 드디어첫 손녀를 보던 해였다. 외할머니께서 생애의 끝에 계시다는 소식을 듣고 증손녀를 보여드리러 먼 길을 달려갔지만 당신의 끊어지는 기억 속에는 내 이름이 없었다. 노쇠한 몸에 담긴 정신도 희미해져 가족들을 분명히 구별하기가 어려운 상태였지만, 뚝뚝 끊긴 기억을 간신히 이어주는 고리가 되어주는 이름은 여전히 장손의 것이었다. 우리 성진이, 우리 성진이.
이듬해 천국의 부름을 받고 떠나신 날, 너무 먼 거리인지라 아기를 데려갈 수 없이 마음으로만 보내드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부고를 듣고도 바로 나오지 않던 눈물이, 7개월 된 딸아이의 배를 간질이며 얼러줄 때 까르르 웃는 말간 얼굴을 보면서 주룩주룩 터져 나왔다.
그래, 어떻게 그게 사랑이 아니었겠어. 굽이 굽이 골목길을 올라와야 하는 딸네 집, 구부정한 허리로 중간중간 허리를 짚고 벽을 짚으며 올라와 딸 대신 손녀들을 기다리시던 시간. 여덟 평 남짓밖에 안 되는 집이지만 걸레 한 장 빨고 짜서 장판을 닦고 텔레비전 위의 먼지라도 닦아내며 살림을 매만지던 손이. 볼품없는 가난한 시절의 국수라도 손녀에게 먹이려 부엌 이곳저곳 살피던 마음이. 헤아리지 못했을 뿐이었다. 내 아이에게까지 이어진 가족의 사랑은 그렇게 흘러 왔다. 어머니는 딸을 낳고, 딸은 또 딸을 낳고, 그 딸은 또 딸을 낳고.
내가 딸을 낳던 날, 엄마는 나의 손을 잡고 함께 아파하시며 눈물을 흘리셨다. 새끼가 새끼를 낳았다고 기뻐하고 감격하며 미역국을 끓이셨다. 어린 나를 다시 키우는 느낌이라 하시며 손녀를 품으셨고 갓난아기의 얼굴에서 딸의 얼굴을 보셨다.
아! 당신도 그러하셨겠지.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생애 최초의 기억 속에 외할머니는 나를 가장 많이어루만져주신 분이시겠지. 몸도 가누기 힘든 엄마를 대신해 내 배꼽을 말리시고, 목욕시켜 주시고, 등을 탁탁 두드리며 트림시키고, 울며 보채는 나를 얼르고 그러셨겠지.
외할머니... 평생 장손에게 향한 사랑에 대한 질투에 눈이 가려 당신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는데딸을 낳고 나서야 이제야 눈을 뜹니다. 언젠가는 나도 이 아이의 출산을 애타는 마음으로 지켜보고 몸조리를 도와주는 외할머니가 되겠구나,라고 생각하며 당신의 의미를 되새기고보니 어느새 너무 멀어지셨군요.
여름이 다가오는 볕이 느껴질 때면 문득 외할머니가 만들어주셨던 국수가 떠오른다. 모처럼 친정집에 내려가 있었을 때 고명이 그득 올라간 엄마표 잔치국수를 먹던 중이었다.
"엄마, 왜 예전에 외할머니가 만들어줬다던 그 국수 생각 나나? 육수 없이 설탕 넣고 간장 넣고 그거 있다이가, 생각보다 맛이 괜찮았었는데."
이번에도 엄마는 가난해서 먹었던 국수라고 무안을 주시려나. 말을 꺼내 놓고 잠시 아차 싶었다. 엄마의 눈치를 보려 국수그릇을 향하던 얼굴을 들었는데 엄마의 시선은 이곳에 있지 않다. 엄마의 어린 시절인지, 외할머니가 돌아가시던 그 해인지, 아니면 엄마가 한창 바빴던 그 시절의 어디쯤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그리고는,
"어, 그땐 그렇게 먹었었지. 의외로 별미이긴 했었다."
용기를 내어 그때 묻지 못했던 질문을 건넸다.
"근데 예전에는 내가 맛있었다 했더니 그게 뭐가 맛있냐고 했잖아, 왜 오늘은 대답이 다르노?"
엄마는 다시 국수를 휘휘 젓가락으로 저어 말아 올리며 답한다.
"그땐 사는 게 바빠서, 뭐 일일이 다 얘기 들어줄 겨를이 있었나, 사실은 내가 힘들어 죽겠는데 느그 할머니가 좀 오래 안 있고 맨날 아들 집에 돌아가신다는 게 서운했지 뭐."
서운했다 말하는데 어째 물기 어린 그 문장은 고해성사 같이 들린다. 더 이상 외할머니 얘길 이어가는 게 어렵고 미안해졌다. 화제를 돌릴까 하는데 엄마가 다시 말을 이어간다.
"느그 외할매, 허리는 다 굽어갖고는 그래도 뭐라도 도와준다꼬 혼자 행주 들고 걸레 들고 이 방 가서 쪼매, 저 방 가서 쪼매, 그랬던 기 어째 그리 생강스러웠겠노."
엄마의 기억도 시간이 흐르며 의미가 달라졌었나 보다.
외할머니의 가난이 만든 국수, 엄마의 가난이 만든 퉁명스러움.투박하고 초라한 모습들이었는데 기억의 편린 속에 그 빛깔이 어둡지 않다. 아스라이 닿는다 해도 손 내밀어 단단히 붙들고 싶은 윤슬처럼 고요히 찬란하다. 무릇 이러한 연유로 한정판이란 것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가 고귀해지는 것이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