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포식당을 애정하는 남편은 오늘도 퇴근 후 유튜브를 켠다. 오래된 동네엔 꼭 있다는 숨은 찐 맛집 후기들은 참을 수 없지. 서울 시내와 근교를 누비는 유튜버의 카메라 뒤꽁무니를 따라 남편의 눈도 골목골목을 졸래졸래 따라다닌다. 화면에는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수육과 주꾸미와 자장면과 짬뽕들이 즐비하지만, 영상을 켜놓은 그의 책상 위는 메마르고 황량하다. 혀를 감칠게 할 풍부한 음식들 대신 버석버석한 스낵칩과 넌알코올 제로 맥주로 유튜버와 겸상 중이다.
딱해라. 고된 하루의 끝에 자신을 위로하는 방법이 그림의 떡이라니. 밤 아홉 시 이후로는 위도 비워야 하거니와 마음도 공허한데 외벌이 삼 남매 부양으로 지갑도 빌 공인 측은한 가장이다. 일류 식재료를 쓴 요리가 코스로 펼쳐지는 고급식당까지는 아니어도, 분위기 그럴 듯 한 곳에 데려가 '아무거나 골라' 플렉스를 왜 아니하고 싶을까. 오빠가 밥 사 줄게. 이 한 마디를 어쩌다 한 번쯤은 정말 부담 없이 툭 뱉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지혜의 와이프가 되어보기로 한다.
지혜로운 와이프 되기
첫째, 노포 맛집을 물색한다.
그저 그런 수준이면 곤란하다. 점심시간대엔 늘어선 줄 때문에 절대 먹으러 갈 수 없는 정도여야 한다. 자타공증의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둘째, 1 인분의 상한선은 8000원이다.
노포식당의 매력은 과연 그런 것이다. 돌보지 않고 시간과 묵혀둔 인테리어, 한 두 가지 메뉴만 가능한 최소한의 식재료 가짓수, 빨리 소진되는 재료 덕분에 채워지는 음식의 신선함, 그리하여 박리다매의 자애로운 가격.
셋째, 와이프가 굉장히 반색하는 메뉴임을 어필한다.
남편의 입맛에도 충족해야 하지만 일단 아내 쪽에서도 사족을 못 쓸 메뉴인 것처럼 보여야 한다. 그래야 "네가 좋아하는 거잖아."라고 생색낼 수 있다.
넷째, 이 모든 과정은 자연스럽고 남편은 절대 몰라야 한다.
이미 통풍은 걱정 없는 남편의 호주머니에 부담을 채우지 않도록 비밀스럽게 움직이자. 이태리 레스토랑 없이 아내를 꼬시는 남자를 모른 척 눈감아 줄 도량을 키울 때다. 남편의 기 살리기 프로젝트!
언젠가 동네 언니들 손에 끌려 위 프로젝트에 적확히 적합한 보물 같은 곳을 발견했다. 보물지도의 표적지는 송파구 거여동에 위치한 하늘이네 장칼국수. 여기는 그냥 주택가인데 갑자기 네가 거기서 왜 나와하는 언덕 길가에 있다.간판은 만들다 말았는지이전의 가게명을 가리려고 한 건지, 너절한 거적때기가 세월의 비바람에 쥐어뜯긴 모양새로 간판을 덮고 있다. 유리문에 더덕더덕 붙어 있는 스티커형 안내가 없으면 모르고 지나칠 판이다. 입소문으로 공중파도 탔는지 방송출연의 인쇄물도 부착되어 화려한 경력을 자랑한다. 내부로 들어가니 족히 10년은 더 되어 보이는 신문지들이 벽을 덕지덕지 도배된 것이 모던하고 청결함과는 확연히 멀다. 은근히 또 이런 곳이 진국 아니겠는가.앉은뱅이 테이블 앞에 엉덩이를 붙이기 전부터 기대감으로 들뜬다.
좌 잔치국수 우 장칼국수 _발사진 양해 구함
모처럼 남편과 나온 나들이에서 점심시간을 지나 방문했더니 대기 손님도 없이 둘이서 호젓하다(오붓하진 않았으니 오해 없으시길). 메뉴가 몇 가지 되지도 않지만 둘 뿐이라 아쉽다. 입 짧으니도 아니고 1인 분 넘게 먹을 수 있지만 여기 국수는 어찌나 푸짐한지 성인 남자의 배를 채우고도 남는다. 아쉽지만 김치말이 국수는 다음 기회에, 잔치국수와 장칼국수를 한 그릇씩 외친다.
국수를 기다리며 가게 안을 훑듯이 살펴본다. 커다란 차림표, 방송출연 사진들, 금연딱지, 신문지의 그때 그 시절 기사들. 모든 것이 복고적인 가운데 서로 상반되는 경고문(?)두 장을 발견했다.
'천천히 배불리 먹고 가세요', 그리고 '식사 중 휴대폰 금지'. 이곳은 한창 점심시간에 오면 번호표를 받고 줄을 늘어서야 입장 가능한 곳이다. 주택가 골목길, 건물도 작지만 1층을 나눠 쓰는 협소한 가게라, 더운 여름날 그늘막 대기소 같은 친절함도 기대할 수 없는 곳이다. 기댈 곳은 한 그릇 음식의 빠른 회전율인데 천천히 공짜밥도 말아먹을 수 있는 인심과 관용을 제공한다. 그렇지만 휴대폰 사용은 선을 넘었단다. 주인장의 생각이 엿보인다.
음식을 먹으러 왔으면 음식에 집중하여 온전히 먹는 행위와 맛에 집중하다 가시오. 뜨거운 김이 펄펄 피어오르는 첫 순간부터 미지근해지는 마지막 한 술까지의 시간과 맛의 그러데이션을 제대로 느껴보시오. 그 미묘한 순간에 핸드폰을 하느라 장인이 전하고픈 육수의 메시지를 놓치지 마시오.
몇 년 전, 생생정보통과 VJ특공대에 출연했었다는 사진 속의 남자 사장님이 여전히 국수를 삶고 계신다. 2018년도의 사장님보다는 주름의 고랑에 음영이 짙어진 얼굴이다. 깊어진 고랑만큼 육수의 맛도 깊기를.
남편은 장칼국수, 나는 잔치국수. 같은 베이스의 육수를 쓰는 듯 하지만 장칼국수는 얼큰하고 걸쭉하다. 장맛 특유의 짭짤하면서도 텁텁할 수 있는 진한 맛을 콩나물이 은근히 들어가며 개운하게 중화시켜 준다. 칼국수의의 면은 적당히 퍼져 국물과 닿는 바깥 부분이 이미 육수를 흠뻑 머금고 있다. 들깨가루가 고소하고 장맛은 깊고 얼큰하고 뜨끈한 국수 한 입 식혀 후루룩 넘어가면 '으어!'하고 온탕에 몸을 지지는 소리가 절로 난다. 다만 후춧가루를 즐기지 않는 분에겐 다소 강할 수 있다.
잔치국수는 장칼국수에서 장을 뺀 맛이라 해야 하나, 기존의 멸치육수로 만드는 노란 빛깔의 국수들과는 다른 그윽한 맛이 있다. 김치를 넉넉히 올려 매콤해지는
이유도 있지만 술을 하지 않는 내가 먹어도 딱 이건 해장용이다.
국수를 다 먹은 뒤 밥은 얼마든지 퍼가서 먹으면 된다는 밥솥이 있지만 탄수화물 가득 먹고 또 탄수화물로 넘치게 할 오기와 우매함은 부리지 않는다. 고무줄 바지를 입고 와서 어찌나 다행인지. 다 먹고 나서 부른 배를 두드리며 신문지 벽 위로 차림판에 다시 눈길을 준다. 아무리 봐도 놀라운 가격이다.
식사를 마치고 아빠가 된 오빠가 멋지게 계산을 하러 간다. 지폐 한 장 딱 내놓으며 돌아서는데 사장님이 오히려 돈을 거슬러주신다. 현금계산이면 그릇당 500원씩 빠진단다. 아니 사장님, 포장마차도 아니고 멀쩡한 서울 건물에서 가능한 가격이냐고요. 사실은 점심 식사 오기 전까지 머물렀던 갤러리 카페니 뭐니에서 커피에 곁들었던 조막만 한 빵도 5000원이 넘었는데. 커피는 시그니처 어쩌고 하면 국수 두 그릇 가격이어서 한숨 쉬며 아메리카노를 마시지 않았겠는가.
사장님이 남편의 어깨에 두 번 뽕을 넣어주신 셈이다. 든든한 배를 문지르며 문을 나서는 남편은 유쾌하고 관대하다. 마침 시장도 가까이 있는데 뭐 더 살 건 없냐고 묻는다. 가까이 있는 게 코스트코가 아니라 재래시장이어서 참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