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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선영 Oct 26. 2024

                   내  무의식의  방엔

                    응답하라   1984가   있다.

  어린 시절, 우리가 살던 동네는 그야말로 응답하라 1988에서 나오는  쌍문동과  싱크로율 99.7프로쯤이랄까.

주변의 대여섯 집 정도는  숟가락 젓가락이 몇 갠지 다  알  정도였다.  

  

우리 집  바로 위 골목길에 커다란 평상이 있었는데 거기에 집집마다 아이들이 모두 다 뛰쳐나와 커다란 오디오를 세팅해 놓고 노래가 나오면 다 같이 합창을 하곤 했다.  당시엔 조용필이나 전영록 같은 가수들이 인기절정이었다.

노래도 따라 부르고 술래잡기도 하다 보면 뉘엿뉘엿해가지기 시작하고  밥 묵어라 외치는  엄마들의 고함 소리에 그 집 아이들이 점점 하나 둘 사라졌다. 마지막  아이들까지 가고 나면 동네가 잠잠 해졌다.   그 아이들 중  간혹  엄마말을 안 듣고 대들다가 잠옷 바람에 집 밖으로 울면서 쫓겨 나와 대문 앞에  서 있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것이 또 다음날 아침이면 동네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랬다.  휴대폰도 없고  심지어 집 전화도 다 갖추고 살지 않았던  시절 이건만 어찌 그리 다 알았을까.


  명절 때는 선물을 주고받았는데  주로  설탕포대, 밀가루, 식용유 같은 것이었다.  심부름 다 하고 나면 팔다리가 욱신거릴 정도인데  중간에서  그 집  아이라도 만나면 즉석에서 교환하면  되니까  좋았다.


  우리 부모님은 그 동네에서 하는 계  모임의 계주였다.

커다란 노트에 세로로 줄을 쫙쫙 그어놓고  은성이네,  짱구아빠, 개똥엄마, 찡코할매 등등  써놓은 이름  옆에 돈을  내면 그 표시로 볼펜  끝에  인주를 묻혀서 찍어 놓았다.

인주가 덕지덕지 묻어있던 커다란 노트들.


  세상엔 왜 주식이나 계나 노름으로 돈을 벌었다는 사람은 없는 걸까?  어쨌든 예상한 바와 같이 우리 집에서  주도하던 계도 빵꾸가 났다. 하루아침에 우리는 그들에게 정다운 이웃에서 죽여도 시원찮을 철천지 웬수가 되었다.

네 아이들은 우리와 놀지 않았고 허구한 날 꼭지야 꼭지야 하며 안아주던 어른들은 우리 집으로 쳐들어 와서 엄마 아빠의 멱살을 잡고 패대기를 치기 일쑤였다.

나는 그 상황이 너무 이상했다. 돈이란 게 뭐길래 저 사람의 눈빛이 저렇게 달라지나.  벌레 보듯 차가운 그들의 눈초리.


  하루는 그 사람들 중 한 명이 내가 아끼던 소년소녀 세계명작 전집을 모두 갖고 가버렸다. 엄마에게 한참을 졸라서 겨우 산 건데 64권짜리 그 모두를 단 하나도 남기지 않고 전부 쓸어 갔다.  그때 난 어린 나이였지만 슬픔과 허탈감 그리고 비애를 가득 느꼈던 것 같다.


  얼마 후 학교에서 선생님이  독서증진  주간을 맞아  집에서 책을 한 권씩  가져오라고  했다.  아침 시간에 30분씩 읽는 시간을 가진다고.  변변히 가져갈 게 없던 나는 그냥 갔다가 손바닥  세대를 맞았다.  그리고 그 시간에 산수문제를 풀었다.  그때  내 세계명작 전집 중에 한 권을 자랑스럽게 꺼내놓으며 읽는 아이가 있었다. 허리를 곧게 펴고  얼굴에서  30센티정도 떨어뜨려서.   그  아이는 내 책을 싹 다 싣고 간 아줌마의  아들이었다.  산수  문제를 풀며 그 녀석의 뒤통수를 후려치는 상상을 백번쯤은 한 것 같다.


  그렇게  새드엔딩으로 치닫던 그 동네와의 인연은 우리 집 앞에 큰 도로가 생기고 집이 헐리면서  이사를 나오게 되자

끝이 났다.  그래도 엄마는 한동안 그 동네를 그리워했다.

이사를  나와보니 정 없이 사는 아파트생활보다 그곳이 좋았다는 거였다.  나는 그곳을 나온 것이 엑소더스인 것 마냥  신이 났었는데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나인데 아직도 꿈속에선 내가 그 집에 살고 있다. 그것도 당연스럽게. 과거사란 모름지기 시간이 갈수록  희미해지는 것이 아니던가.  하지만 어떤 기억은  자꾸만  덧칠하는  그림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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