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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흰 죽

by 빨강



쌀 한 컵을 그릇에 부었다. 쌀을 여러 번 씻었다. 안개 같은 뿌연 물이 점점 연해졌다. 여닐곱번 씻은 쌀에 정수물을 부었다. 쌀이 붇기를 기다렸다.


해무가 바닷가에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서너 발짝을 앞서가는 친구의 손을 잡으려고 빠른 걸음으로 걸었지만, 모래가 발을 잡았다. 잡힐 듯 말듯한 친구가 파도를 가로로 가르며 멀어졌다.


눈을 뜨자 새벽의 기운이 등줄기를 쓸어내렸다. 거실을 서성이다 침대에 누웠다. 두 번째 고양이가 다리 사이를 파고 들어왔다. 머리부터 꼬리까지를 길게 쓰다듬었다.



불은 쌀을 손톱 끝으로 누르자 반으로 갈렸다. 채에 쌀을 붓고 물기를 털었다. 채에서 뿌연 물이 뚝뚝 떨어졌다. 냄비에 참기름을 두르고, 쌀을 쏟아 넣자 쌀알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튀어 올랐다. 중불에 놓고 나무주걱으로 쌀을 볶았다. 젖은 쌀알이 바닥에 눌어붙기 시작할 때 찬물을 쌀의 3배로 부었다. 그때부터 젓기가 시작된다. 끓어오르는 물에 쌀알이 붇기까지 계속 젓는다. 아차 하는 사이 바닥으로 가라앉은 쌀알을 물 위로 계속 올려 보낸다.

흰 죽은 한 사람을 위한 애타는 마음이다. 그 사람이 덜 아프라고 하는 기도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반복적으로 죽을 저으면, 쌀알에 금이 간다. 그 틈으로 뜨거운 물이 스미고 쌀알이 부드러워진다. 나무주걱에 붙은 쌀알을 후후 불어 손으로 뭉개본다. 형체가 없게 뭉개지면 흰 죽이 다 된 거다.


가스불을 끄고 죽이 살짝 식길 기다린다. 식으면서 표면에 얇은 막이 생긴다. 국자로 죽을 유리병에 담는다. 연기가 나는 흰 죽은 가는 동안 적당히 식어 먹기 좋은 상태가 될 것이다.


꿈에서 깨어 수목장에 전화를 걸었다. 계약자가 아니면 수목장에 와도 볼 수 없다는 답을 들었다. 친구의 장례식을 떠올렸다. 산꼭대기에 있건 수목장은 흐렸다. 산아래로 안개가 자욱했다.


요 며칠 창밖이 흐렸다. 어두워질수록 안개가 짙어졌다. 어느 날은 창밖 10미터 앞도 보이지 않았다. 누굴 위해 신이 밤마다 죽을 끓이는 것 같았다. 세상에 아픈 사람이 많아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죽 꿇여줄 이 없는 사람들에게.



슬픈 꿈은 아침 돼도 안개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먹먹한 마음으로 쌀을 불렸다. 나라도 먹고 기운을 내려고. 나라도 나를 챙겨보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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